47화
“이것도 우연이겠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연이 계속되면 필연이 되는 법인데, 그런 놈을 살려 둘 필요가 있을까?”
“제거할까요?”
“우선은 놔둬. 하지만 또 놈의 이름이 내 귀에 들어오게 된다면, 그때는 필히 죽여 버리도록.”
천예성의 죽음에 정호기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하는 말이었다.
아직까지 천예성은 흑룡문에서 그리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고 있었고, 그의 죽음을 궁내상이 모두 뒤집어썼기에 윗선까지 보고가 올라오지 않은 것이다.
“알겠습니다.”
***
“하하하하! 인생 삼세번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그만둘 거야?”
정호기의 말에 영초린이 인상을 썼다.
“벌써 많이 마셨지 않습니까?”
“안 되지. 첫 번째는 상진이가 샀고 두 번째는 초린이 네가 샀으니까, 세 번째는 내가 사야 하지 않겠냐? 자, 가자. 마시고 죽는 거야!”
영초린과 나상진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정가장으로 돌아 온 뒤 의형제가 된 기념으로 술을 마시자고 하더니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이다.
“상진아, 어쩔 수 없구나. 오늘은 집에 못 들어갈 것 같다.”
영초린의 나이는 의외로 많아서 벌써 스물여덟이나 되었기에 스물넷인 나상진이 자연 막내가 되었다.
“형님들이 가자고 하면 가야겠지요.”
“가자고!”
술상이 들어오고 주거니 받거니 한 잔씩을 마신 후에 갑자기 정호기가 두 사람에게 전음을 보냈다.
-내가 어떻게 너희를 만나게 되었는지 말해 주마.
그 뒤로 이어진 설명은 정운룡에게 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양조휘라는 가공인물을 내세워 흑룡문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말한 것이었다.
이미 영초린이 악가장이 흑룡문의 지부였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것을 나상진에게 알려 주었기에 정호기의 말은 꽤나 신빙성 있게 들렸다.
-너희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미 제 목숨은 형님께 드렸습니다.
영초린이 먼저 정호기의 말에 수긍했고, 이어 나상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형님께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
-고맙다.
나상진과 영초린에게서 적극적인 지지를 받기로 약조한 며칠 뒤, 정호기는 언무학과 함께 진청운을 찾아갔다.
“내가 말이냐?”
“예. 아직 몸이 채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기초를 다져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다.”
진청운의 눈이 언무학에게로 향했다.
정호기가 시간이 없다 하면서 사손인 언무학의 지도를 그에게 맡긴 것이다.
“열심히 해.”
진수수의 말에 언무학의 얼굴이 조금은 뾰로통했는데, 그녀가 그에게는 정호기와 동급인 사고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진 사고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열심히 할 겁니다.”
“게으름을 피우면 이 진 사고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그리 알고.”
꼬박꼬박 진 사고라 칭하는 진수수는 정호기가 언무학을 가르칠 때도 항상 옆에서 잔소리를 했는데, 가끔은 지금처럼 그의 짧은 머리카락으로 덮여 있는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내가 가끔 물이라도 뿌려 줄까? 빨리 자라라고?”
“안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제가 주고 있으니 진 사고는 수고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헤헤.”
진청운과 독고화란 사이에 더 이상 자식이 생기지 않았기에 진수수는 정호태와 많은 시간을 함께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호태가 무공수련을 하느라 소원해졌는데 언무학이라는 귀여운 아이가 사고라 부르니 마냥 즐거운 진수수였다.
그런 그녀의 철없는 행동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던 진청운이 정호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쯤 떠날 생각이냐?”
“날도 풀렸으니 곧 떠날 생각입니다.”
벌써 오월도 다 지나가는 시점이었기에 활동하기에는 딱 좋은 계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조심하여라.
-알겠습니다.
* * *
“제가 훑어본 바로는 일단 구룡장의 가정호를 끌어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영초린의 말에 정호기가 가정호의 신상 내력이 적힌 부분을 읽으며 대답했다.
“이유는?”
“같은 종남의 그늘에 있으면서 사가장에 밀리는 구룡장이고, 가정호는 그것을 늘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의 이름을 날리고자 몇 번의 시도는 있었지만, 그리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옆에서 부추기면 알아서 움직이겠군.”
“예. 이름을 날리길 원하니 분명 모든 일에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만들어질 영웅회에 자신보다 지명도가 높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나상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건 그것대로 좋다고 생각한다. 대형, 제 생각엔 가정호처럼 이름이 없는 이들로 영웅회를 구성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남들이 보기에도 그 취지가 맞고 말입니다.”
“그럴까?”
“예. 어차피 명성이 올라가면 가문이나 문파에서의 위치도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정호기의 계획은, 영웅회를 조직해 정파의 후기지수들과 안면을 트고 훗날 그들의 지지를 발판 삼아 흑룡문과의 일전에서 허수아비가 아닌 주역이 되려는 속셈이었다.
“그래, 알았다. 그럼 언제쯤 출발하면 되겠느냐?”
“전 언제든 상관없습니다.”
“저도 괜찮습니다.”
“그럼 모레 출발할 테니 준비하도록 해라.”
“예.”
두 동생과 의논을 마친 정호기가 찾아간 곳은 유옥접이 있는 전각이었다.
“어쩐 일이세요?”
“유람을 할 생각입니다.”
“설마 이번에도 쫓겨 들어오는 것은 아니겠지요?”
유옥접의 말에 정호기가 고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이번엔 확실하게 악인들을 처단하고 이름을 날릴 생각입니다.”
“좋아요, 같이 가겠어요.”
“모레입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려는 정호기에게 유옥접이 물었다.
“백 소저는 잘 계신가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백수련과 만나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고, 백영호가 정가장을 찾지 않은 것도 오래되었다.
한 달 전에 정운룡이 대응방을 찾았지만 하룻밤도 묵지 않고 돌아온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의 사이가 소원해진 것 같았다.
“늦기 전에 한번 찾아가는 것은 어떨까요? 제가 알아본 바로는 많이 상하셨답니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정호기가 방을 나섰다.
[수련이를 직접 보지는 못했단다. 하지만 불행한 일이 일어날까 두렵구나.]
정운룡에게도 이미 들은 말이었다.
‘어떻기에 그렇지?’
솔직히 정호기는 이 정도 됐으면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랑을 찾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싫다는 이에게 심력을 낭비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도 많이 심란하신 것 같던데, 이번에 나가는 길에 들러야겠군. 어차피 그곳을 지나가니까.’
확실하게 끝을 맺어 줄 생각이었다.
‘내 가족의 안전도 보장하기 힘든 마당에 대응방과 엮이면 필시 그들까지 책임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기를 놓칠 수도 있어.’
이제부터 벌이려는 일은 흑룡문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 것이고, 위험수위가 높아지면 아무도 모르게 가족들을 천추산으로 옮겨야 하는데, 대응방까지 챙기려고 한다면 그르칠 수도 있었고, 정호기가 염려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
“목적지가 동양현이라고요?”
“예. 그곳에 우리의 첫 사냥감이 있습니다.”
“사냥감이라…어울리는 말이네요.”
유옥접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일단 그 전에 대응방에 먼저 들렀다 갈 생각인데, 괜찮겠습니까?”
“당연하지요!”
유옥접 자신이 말을 하려던 것이었기에 흔쾌히 찬성했다.
“이거, 너무 좋아하시니 오히려 씁쓸한데요?”
“뭐가요?”
“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것이니 말입니다.”
“처음부터 없었어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혈신으로 만났던 그때, 마지막 순간에 감정을 드러내기 전까지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여자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야. 그러니 애초부터 이해할 생각을 버리는 것이 속 편하지.’
“대형.”
“왜 그러느냐?”
영초린의 부름에 정호기가 그에게 다가갔다.
-지켜보는 눈이 있습니다.
어느새 일행이 접어든 곳은 우족산이란 곳이었는데, 산길을 따라 걷는 그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 것이다.
-몇이나 되어 보이느냐?
-최소한 열입니다.
영초린의 말에 정호기가 목을 푸는 시늉을 하면서 주위를 훑었다.
‘어디 있다는 거지?’
보이는 것이라곤 나무뿐이었고, 들리는 것은 풀벌레 울음소리였다.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이 따사로운, 평화로운 숲이건만 그 속에 열이나 되는 시선이 있는 것이다.
‘기감을 끌어 올려 찾을 수는 있겠지만, 이 상태로는 힘들구나.’
현재 영초린은 따로 특별하게 운기를 하지 않았으니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것도 발견하지 못해야 정상이거늘, 그는 너무도 태연하게 숨어 있는 산적들을 발견한 것이다.
새삼 영초린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이놈의 검을 피한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운이 좋은 거였어.’
늘 보던 방이었고, 늘 그가 눕던 침상이었다.
아무런 기척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었다.
그런데 침상이 만들어 낸 그늘에서 불쑥 검이 솟아올랐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차라리 침상 밑에서 나왔다면 덜 놀랐겠지만, 촛불에 흔들리는 그림자였었다.
-대형도 보아서 아시겠지만 초보들입니다. 아마도 산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초보? 봐서 알아?’
아직 찾지도 못한 정호기였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 그의 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였군.’
행동을 개시하려는지 주위의 풍경이 부조화를 이뤘고, 삽시간에 십여 명의 사람이 앞을 막아섰다.
“멈추… 컥!”
말을 꺼내던 놈은 나상진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졌고, 이제 막 무기를 손에 쥐려던 놈은 영초린의 주먹에 배를 맞고 주저앉았다.
나머지 인물들의 턱과 다리, 팔을 아작 낸 것은 유옥접이었는데, 마지막 한 놈의 턱주가리를 올려 차고 내려서는 모습에선 뭔가 후련함마저 느껴졌다.
‘뭔가 쌓인 게 많았나?’
그런 의문을 느끼는 정호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