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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46화 (47/137)
  • 46화

    “불이야~!”

    불은 장원 외곽에서 날아온 불화살로 인한 것이었는데, 기름을 같이 매달았는지 삽시간에 전각들로 옮겨 붙었다.

    “당황하지 마라! 각자 조를 나눠 불을 진화하도록 하라!”

    전쟁이 따로 없었다.

    악가장의 하인들은 물을 퍼 나르느라 분주했고, 무인들은 그것들을 이용해 전각의 지붕으로 물을 뿌리는 한편, 불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떻게 되었느냐!”

    악가장의 장주이자 부친인 악구신의 물음에 악조영이 낭패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미 모두 도망치고 없었습니다.”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번졌기에 멀쩡한 전각을 허물어 더 이상 불길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시금 불화살이 날아오는 일은 없었기에 현재 불타고 있는 전각들만 진화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그들이 조금 마음을 놓으려는 찰나 다시 불화살이 기름을 매달고 허공을 가로질렀다.

    “이런 죽일 놈들!”

    땅을 박찬 악구신의 신형이 전각 지붕을 다시 박차더니 허공에 높이 떠올랐다.

    “게 서라!”

    멀리 골목으로 후다닥 사라지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손에는 미처 버리지 못한 활이 들려 있었기에 분명 그들이 범인일 터였다.

    자신의 발등을 찍은 악구신이 빠르게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전각 서너 개를 더 뛰어넘고서야 도망치는 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각기 흩어지는 바람에 그의 손에 걸린 것은 단 한 명이었다.

    우득!

    떨어지며 내지른 발에 복면인의 등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쓰러지는 복면인을 거칠게 붙잡은 악구신이 복면을 벗겼지만,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어디 놈이냐!”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있는 이가 대답할 정신이 있을 리 없었다.

    ‘너무 흥분했구나.’

    발에 경력을 많이 실었던 모양이었다.

    사로잡아 배후를 캐야 했는데 화를 참지 못했다.

    “컥!”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손에 힘이 빠져 잡고 있던 흉수를 놓치긴 했지만,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다.

    “누, 누구냐? 처음부터 나를 노린 것이었느냐?”

    흉수와 악구신을 동시에 찌른 검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복면인이 차갑게 대꾸했다.

    “흑룡문의 개가 궁금한 것도 많군.”

    “그, 그걸 어, 어떻게……!”

    죽음을 목전에 둔 악구신이었지만, 복면인의 말에 죽음마저도 잊을 정도로 놀랐다.

    “역시 형님의 말이 맞았군.”

    복면인의 주인은 영초린이었다.

    나상진을 의동생으로 삼은 정호기가 영초린에게도 의동생이 되어 줄 것을 부탁했고, 영초린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형님의 진정한 정체가 뭘까?’

    자신의 사부가 전설적인 일인살수였던 귀접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며, 악가장이 흑룡문의 주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뭐든 상관없다. 난 이미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하지 않았던가?’

    혈신 정호기를 암살하기 위해 침투했다 의롭게 죽어 간 청접(靑蝶) 영초린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영원히 태어나지 않으리라.

    이제는 열호아 정호기의 수족이 되어 흑룡문의 숨통을 조일 귀접 영초린만이 남았으니까.

    ‘형님의 명대로 악가의 씨를 말리려면, 악조영 그놈도 살려 두어선 안 되지.’

    밤의 황제라 불렸던 귀접의 암영보법을 펼친 영초린의 신형이 골목에서 순식간에 사라졌고, 악구신과 이름 모를 흉수의 시체만이 남았다.

    ***

    “파천궁의 기습이다!”

    누가 외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또한 누가 들었는지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은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는 이들의 귀에 남았고, 머릿속에 각인되었으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파천궁이다! 파천궁이 쳐들어왔다!”

    한 사람이 외치는 것은 공허한 목소리가 될 수 있지만, 수십 명의 목소리는 거짓도 진실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나상진이 잘하고 있군.’

    피비린내 나는 시체들 속에서 정호기는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기습은 영초린 그놈이 제격이지.’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입힌 영초린의 한 수는 자칫 머리가 갈라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공격이었다.

    그것에 비하면 지금 이곳을 기습한 살수들의 실력은 한참 못 미친다 할 수 있었다.

    ‘왜 꼭 나쁜 놈들은 마지막에 마음을 바꿔서 제자들을 힘들게 하는 걸까?’

    귀접은 전설적인 살수였지만, 죽음을 앞두고 돈을 벌기 위한 살행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회유하려 했지만, 끝내 돌아서지 않았지.’

    “컥!”

    “쯧쯧, 심장 소리가 전장의 북소리만큼이나 크구나.”

    영초린은 숨소리는커녕 심장 소리도 들리지 않았었다.

    정호기가 바닥에서 도를 빼 들자 붉은 피가 딸려 올라왔다.

    -접니다.

    전음을 보내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상진의 몸에는 피가 흥건했다.

    -다쳤느냐?

    -아닙니다. 이건 적들의 핍니다.

    -상황은?

    -거의 끝나 가고 있습니다. 한데, 이상하게도 악구신이나 악조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상진의 전음으로 영초린이 일을 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데 놈들이 진짜 파천궁의 인물들입니까?

    -그래. 여기가 흑룡문의 비밀 분타인 것처럼 확실한 사실이다.

    정호기의 말을 들으면서 나상진도 영초린과 비슷한 의문을 품었다.

    어떻게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고, 또한 이곳이 흑룡문의 비밀 분타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아직 확인된 사실이 아니니 뭐라 정의 할 수는 없지만, 맞으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단 말인가? 형님을 따르기로 한 마당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니까.

    -그놈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소란이 진정되어 가는 와중에도 장덕칠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곧 올 거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창문과 문이 부서지며 뭔가가 안으로 던져졌고, 순간 희뿌연 가루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후웅!

    사막의 용권풍이 이러할까?

    정호기가 도를 휘두르자 강한 바람이 일며 가루들이 그 바람을 타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으악!”

    독을 푼 다음 습격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독에 당해 비명을 질렀다.

    “여길 지켜!”

    나상진에게 말을 한 정호기가 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쾅!

    “컥!”

    정호기의 도에 꼬치 꿰듯 찔린 복면인이 비명을 터뜨릴 때 이미 다음 먹잇감이 정호기의 시야에 들어왔다.

    커다란 주먹이 복면인의 머리를 때리자 잘 익은 수박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무너지듯 쓰러졌다.

    “죽어!”

    다른 복면인이 정호기를 공격하자 나머지 복면인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났는데, 그것을 보고 정호기는 무기에 독을 발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시라도 아군의 무기에 당해 죽는 사태가 벌어질 것을 저어한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거리를 벌린 것이었다.

    ‘안 되겠군.’

    손으로 쳐 내려던 것을 마음을 바꿔 시체를 꿰고 있는 도를 휘둘렀다.

    성둥 시체가 잘리며 도와 도가 부딪쳤고, 그사이 다른 복면인이 뒤쪽에서 검을 찔러 왔다.

    “피해!”

    정호기는 몸을 뒤로 눕히는 철판교를 시전한 덕분에 위기를 넘겼지만, 그와 도를 맞대고 있던 이는 아군의 검에 찔릴 위기에 처했다.

    가까스로 두 복면인이 서로의 무기를 부딪치며 위기를 넘긴 사이, 바닥을 굴러 그곳을 빠져나온 정호기가 도를 수평으로 하고 크게 원을 그렸다.

    “아악!”

    정호기의 공격에 다리를 잘린 복면인이 비명을 질렀지만, 이내 날아든 두 번째 공격에 목이 잘리며 비명 소리는 멈췄다.

    ‘다섯인가?’

    남은 복면인의 수는 겨우 다섯.

    그중 왼쪽에 있는 놈의 무기가 눈에 익은 것을 보면 분명 그놈이 장덕칠일 것이었다.

    ‘네놈은 꼭 죽어 줘야겠어.’

    도를 쥔 손에 힘을 준 정호기가 땅을 박차더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

    “이놈이 확실하오?”

    장덕칠의 시체를 가리키며 묻는 중년인에게 정호기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정호기의 사과에 악가장의 총관인 악불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죽일 놈! 파천궁이란 것을 알면서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다니.’

    “설마 했습니다. 그 동팔이란 놈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 여겼는데, 아마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목청 높여 외친 것이오?”

    “예. 그때라도 경각심을 가지시라고 외친 것인데……. 송구스럽습니다.”

    “분명 그 동팔이란 놈이 제 입으로 덕칠이란 이놈이 파천궁 소속이라 말을 했고, 이 덕칠이란 놈도 스스로를 파천궁 소속이라고 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악불패는 정호기가 미리 파천궁이라 말을 했든 안 했든 별반 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설마 쳐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경비는 더욱 강화시켰을 것이었다. 그럼 어쩌면 가주를 비롯한 식솔들이 모두 떼죽음을 당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정말 죄송합니다.”

    정호기가 거듭 사과를 했지만, 악불패는 이 사태를 어떻게 보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

    중경에서 가장 높다는 묘이산에 자리한 거대한 촌락군이 있었고, 그곳이 바로 흑룡문의 본거지였다.

    상주하는 무사들의 수만 수백에 이른다고 알려진 흑룡문은 악의 축이자 중원 사파의 실질적인 우두머리나 다름없었다.

    그런 흑룡문의 심처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누구?”

    되묻는 이는 흑룡문의 문주인 마검 조당이었다.

    “열호아 정호기라는 놈입니다. 천수신의의 외손자로, 작년에 열린 사가장 무림대회에서 우승한 놈입니다.”

    냉백이 조당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놈이 왜?”

    “이번 악가장에서 일어난 일의 뒤에 그놈이 있었습니다.”

    “놈이 획책한 일인가?”

    “조사한 바로는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파천궁의 인물과 시비가 붙은 모양인데, 그놈이 미친놈이었는지 악가장에 쳐들어와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성동격서의 작전으로 불을 놓아 시선을 유인한 뒤 사주한 살수들과 함께 정호기란 놈을 노렸지만, 오히려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지독한 놈에게 걸린 모양이군.”

    “예.”

    “놈이 파천궁 소속인 것은 확실한가?”

    “동생인 장동팔이란 자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이미 어딘가로 빼돌린 직후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악가장에서 싸움이 끝나자마자 이미 영초린이 제거했다.

    “결국 그 정호기란 놈이 한 말을 제외하면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군.”

    “예. 그리고 어차피 파천궁 놈들의 소행이라고 밝혀지더라도 대놓고 항의할 수 없는 노릇이니, 뒤를 캐는 수고를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당하고 있을 건가?”

    “파천궁이 호북에 마련한 비밀 지부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좋아, 쓸어버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 정호기란 놈은 어떻게 할까요?”

    “천수신의의 외손자라고 했지?”

    “예.”

    “특별한 사항이 더 있나?”

    “천이 계획 때 실패한 곳이 바로 정가장이었고, 그곳의 소장주입니다.”

    “음…….”

    조당이 턱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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