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호호호호. 그래? 그래서?”
나상진과 정호기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안에서 권비연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는요~ 냅다 튀는데, 원주님께 딱 걸린 거지요. 그때 사부님을 만나게 되었고요.”
“뭐가 그리 궁금했기에 몰래 훔쳐보려고 했는데?”
“동팔이 아저씨가 그러는데, 예쁜 여자들 엉덩이에는 꼬리가 있고, 예쁘면 예쁠수록 그 수가 많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몇 개나 있나 궁금해서요.”
“몇 개나 있는지는 봤니?”
“못 봤어요. 마침 치마를 묶은 끈을 끄르다가 저랑 눈이 마주쳤거든요.”
“이 녀석! 지금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말이냐!”
정호기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호통을 치자 언무학이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거, 제수씨께 폐가 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아니에요. 무학이가 얼마나 재밌게 해 주었다고요.”
침상에 누워 대답하는 여인의 얼굴은 누가 봐도 박색이었고, 얽은 곰보 자국으로 인해 더 흉해 보였다.
“하하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오랜만에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을 마시다 밤을 새서 나 제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요.”
권비연의 시선이 나상진에게로 향했다.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니, 오히려 기쁜걸요. 가가도 이런 시간이 필요했을 거예요.”
그녀의 눈길을 받은 나상진은 그녀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얼마나 아름답고 자연스러운지도.
‘내가 너를 걱정하게 했구나.’
그 미소를 보며 나상진은 자책했다.
“자, 그럼 속도 풀 겸 해장술이나 마셔 볼까요? 안주는 제가 준비하지요.”
오면서 사 들고 온 재료들을 가지고 부엌으로 향하는 정호기를 보면서 유옥접은 어쩌면 그가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 *
“야, 이 썅년아! 어서 나와!”
화기애애한 아침 식사가 시작되려는 그때, 밖에서 걸쭉한 욕설이 들렸다.
“이 개 같은 년아, 어서 나오지 못해! 네년이 거기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마라!”
유옥접이 젓가락을 탁자에 놓더니 살기까지 띤 채 일어섰다.
“오냐, 오늘 죽여주마!”
“유 사고님…….”
“누굽니까?”
“동팔이란 작자예요. 어제 수작을 부리기에 손을 좀 봐줬더니 찾아왔네요. 제가 해결할게요.”
“이곳은 나 제의 집입니다. 그것을 알고도 왔다면 필시 동조자를 구했을 것이니 같이 가지요.”
맞는 말이었다.
이곳에서 청수 나상진을 모르는 이는 없었고, 그의 검법이 얼마나 매서운지 모르는 이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런 소란을 피운다는 것은 분명 믿는 구석이 있다는 증거이니, 유옥접 혼자 내보내는 것은 꺼림칙한 일인 것이다.
“제가…….”
“제수씨와 함께 있어. 그리고 이건 내 일행이 벌인 일이니 내가 해결하겠다.”
따라나서려는 나상진과 언무학을 남겨 두고 유옥접과 정호기가 밖으로 나가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십여 명의 무인이었고, 그중 동팔이란 자를 구분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퍼렇게 멍든 양쪽 눈과 붓고 찢어진 얼굴, 거기다 한쪽 팔은 부목을 대고 목에 줄을 매 고정시켰고 다리 한쪽도 부목을 대고 있었는데, 아주 야무지게 손을 본 모양이었다.
“이…….”
문을 열고 나오는 유옥접의 모습을 보고 또 뭐라 떠들려고 했지만, 뒤이어 거대한 덩치의 정호기가 보이자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형님, 저년입니다! 저년이 절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동팔에게 형님이라 불린 중년인이 앞으로 나서며 들고 있던 도로 유옥접을 가리켰다.
“네년이 내 동생을 이렇게 만들었냐?”
“그래.”
“뭣 때문에?”
“어린 사미에게 고기를 주고, 술을 주고, 여자를 탐하게 만든 것이 첫째 이유고, 나에게 수작을 부린 것이 둘째 이유다.”
“그래? 어린놈에게 인생 공부 좀 시키고, 남자 복 없을 것 같은 년에게 아량을 베푼 것이 이렇게 맞을 죄란 말이지?”
중년인의 말을 들은 유옥접이 륜을 양손에 들고 뛰쳐나가려는 찰나, 그녀의 어깨를 잡는 손이 있었다.
“놔요!”
-쉽게 생각할 자가 아닙니다.
[지옥도 장덕칠입니다.]
분명 파천궁의 인물들과 만났던 자리에서 봤던 놈이었다.
물론 실력으로 치자면 정호기에게 안 되겠지만, 파천궁 소속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놈과 엮일 줄이야.’
그를 알게 된 것이 바로 하남이었으니 이곳에서 본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놔줘라. 어디 얼마나 가랑이를 잘 벌리는지 보게.”
유옥접의 숨이 가라앉고 눈이 차가워졌으며, 그 눈길이 정호기에게 향했다.
‘이런, 큰일 났군.’
유옥접은 화를 안으로 축적시켜 일시에 폭발시키는 여자였고, 지금은 그것이 분출되기 일보 직전의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정호기가 손을 떼자 유옥접이 천천히 장덕칠을 향해 걸어갔다.
“어쭈, 제법 분위기를 잡는데? 퉤!”
손바닥에 침을 뱉은 덕칠이 도를 꼬나 쥐더니 건들거리는 모습으로 마주 걸음을 뗐다.
“이년아, 어디서 서방을 몰라보고 그리 눈깔을 치켜뜨는 것이냐?”
장덕칠의 입은 잠시도 쉬지 않고 유옥접을 도발했지만, 이미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은 그녀의 마음에선 어떠한 파문도 일어나지 않았다.
“으음…….”
냉정하기까지 한 유옥접의 모습에 장덕칠도 긴장했는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쨍!
첫 공방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주 달려간 두 사람의 무기가 부딪치며 이뤄졌고, 그 뒤로 날카로운 이빨을 내민 맹수가 되어 서로의 몸을 물어뜯으려고 했다.
‘둘 중 하나는 죽겠군.’
노리는 곳 모두가 사혈이었고, 스쳐도 중상인 곳이었으며, 제대로 맞으면 최하가 병신인 곳이었다.
‘이런…….’
결국 피를 먼저 본 것은 유옥접이었는데, 가슴 어림이 길게 베어져 핏물이 그녀의 배를 온통 적셨다.
입술을 깨문 그녀는 신음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출혈이 계속된다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죽어!”
결국 한계에 달했는지 비틀거리는 유옥접을 향해 장덕칠이 도를 날렸다.
쩡!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허공을 날아가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장덕칠의 도였다.
“크윽…….”
한쪽 손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서는 장덕칠의 눈가에 은은한 노기와 살기가 깔렸고, 그것은 어느새 도를 들고 유옥접의 앞에 서있는 정호기를 향해 있었다.
“이놈! 끼어들겠다는 거냐!”
“이미 끼어들었다.”
“좋다! 놈! 두고 보자!”
한 번의 겨룸으로 비세를 느꼈는지 정호기와 유옥접을 쏘아 본 장덕칠이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차피 이곳에 있을 저놈을 이용할 생각이었는데, 때마침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또 다른 계획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가슴에 붕대를 감았음에도 피가 배어 나오는지 유옥접은 새로 갈아 입은 옷의 가슴 어림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런 그녀를 정호기가 추궁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저에겐 별일 아니었어요.”
“하지만 이미 큰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죽었으면 끝날 일이었지요.”
왜 구했냐는 투다.
“그게 하실 말씀입니까?”
꼬박꼬박 대꾸하던 유옥접이 이제야 입을 닫았다.
“혹시 아는 자입니까?”
이제껏 가만히 있던 나상진이 물었다.
“모르는 자다.”
“놈이 물러간 것은 어쩌면 세력을 더 모아 공격을 하려는 수작인지도 모릅니다.”
“나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저… 그래서 말씀인데, 이곳을 떠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저도 정가장으로 가려고 했으니, 조금 서두르면 될 일입니다.”
“그놈들이 주위에 매복해 있을까 그것이 걱정이 돼서 그러지.”
“제가 길을 좀 압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곳이 멀지 않으니 여차하면 그곳에서 모두 죽여 버리지요. 대형과 저의 실력이라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라지면 누가 알겠습니까? 혹시라도 놈의 뒤에 다른 놈이 있다 하더라도 시체를 잘 묻어버리면 들키지 않을 것입니다.
나상진의 전음을 받은 정호기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건 너무 빠르잖아?’
고지식한 것을 염려해 천천히 뜯어고치고자 했거늘, 이건 꺼풀을 벗겨 놓고 보니 오히려 말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대나무를 쪼개니 속에 능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과 같았기에 정호기는 대쪽 같은 나상진의 성격을 걱정했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알았다. 그나저나 제수씨가 견딜까 그게 걱정이구나.”
“제가 잘 보살필게요.”
언무학이 권비연의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그럼 일단 짐을 싸도록 해라. 내가 나가서 마차를 구해 오겠다.”
“예.”
집을 나선 정호기가 마차를 구하러 가면서 염두를 굴렸다.
‘어차피 덕칠 그놈이 내 얼굴을 봤다고 해도 계획이 그러니 상관은 없지만, 내가 중심에 있어서는 안 되겠지.’
[하남, 그것도 소림의 턱밑에 우리 파천궁이 비수를 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니 안전할 것입니다. 하하하하.]
이미 수십 년 전에 악가장이란 발판을 만들어 둔 흑룡문 앞에서 잘난 척하는 꼴이 우스웠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듯이.
***
굳이 마부석에 정호기와 같이 앉은 언무학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부님.”
“응?”
“죄송해요. 제가 그 동팔이 아저씨를 알은체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니.”
“그런 말 마라.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중요한 것은 일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것이지,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그리고 일을 벌인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너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흥!”
마차 안에서 싸늘한 콧방귀 소리가 들렸고, 정호기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할 때 그의 눈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넌 그만 안으로 들어가거라.”
마차를 세운 정호기가 언무학을 들여보냈고, 나상진이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