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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42화 (43/137)

42화

‘그나저나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분명 이 부근이라고 했는데…….’

한쪽 손과 발을 절벽에 매달고 아래를 바라보는 정호기의 눈에 활짝 핀 보라색 꽃이 보였다.

‘옳지, 저거구나.’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생을 마감하기 위해 찾은 이 절벽에서 영초린은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이다.

‘육망초(六蟒草).’

여섯 마리의 이무기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약초였는데, 특별한 영물이라든가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구하기가 인형설삼만큼 어렵다고 소문이 난 것이었다.

‘다른 이에게는 독약과도 같은 것이 영초린에게는 영약이 된다, 이거지?’

사실 이것이 영물이었다면 영초린을 포기했을지도 몰랐다.

[악가장을?]

[예. 아무래도 들킨 것 같습니다.]

[선봉을 영초린이란 놈이 섰다고?]

악가장은 숭산 밑에 위치한 가문이기는 했지만, 실상 알고 보면 애초부터 흑룡문의 비밀 지부였다.

그것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 것이 바로 영초린이었고, 소림과 정파인들의 선봉에 서서 악가장을 불태웠다.

‘영초린의 검은 대단했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경험이었다.

절로 손이 눈가로 향하는 정호기는 당시 영초린에게 눈 위를 베이는 수모를 겪었고, 그 상처는 그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자, 이제는 그 검을 나를 위해 써다오.’

* * *

“이건 뭡니까?”

“영 소협의 병환을 낫게 할 약초입니다.”

육망초의 기괴한 모습을 본 영초린은 께름칙한 얼굴이었다.

보라색의 꽃을 중심으로 여섯 개의 이파리가 똬리를 틀듯 자라 있었는데, 하나같이 그 끝은 꽃을 향해 있었다.

마치 그것이 여의주고, 그것을 얻어야만 하늘로 승천할 수 있는 이무기가 바라보듯이.

“알겠습니다.”

육망초를 받아 든 영초린이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을 했는지 우걱우걱 씹어 먹기 시작했다.

‘맞겠지?’

영물이라면 그것의 흡수를 도와주고 약효를 억눌러 주는 다른 것들과 함께 복용해야 하는 것이 맞겠지만, 절벽에서 뛰어내린 영초린이 육망초를 발견했을 때 다른 것이 있을 리 없을 테니 분명 지금과 같이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음지체로 태어나 그것을 모르고 음기를 몸속에 축적시킨 채 지내다 악조영의 공격에 의해 무너진 둑을 흐르는 물처럼 온몸을 잠식해 버린 탓이지.’

영초린에 대해서 조사를 한 것은 적으로서 그를 알고자 함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동료로 만들기 위한 거름이 되었다.

“어떻습니까?”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입맛을 다시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쓴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 크윽!”

갑자기 아랫배를 부여잡고 쓰러진 영초린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우아아악!”

이내 그의 비명 소리를 듣고 밖에 있던 유옥접과 언무학이 들어와서 본 것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 눈을 하얗게 치뜬 채 바들거리는 모습이었는데, 누가 봐도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정호기가 만들어 놓은 꼴 같았다.

“죽일 작정이에요?”

일부러 내보낼 때 무슨 목적이 있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사람을 이렇게 병신을 만들 줄은 몰랐기에 유옥접은 책망하는 시선으로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죽이려면 단칼에 보내시든지, 이렇게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무학이도 있는데…….”

단 며칠이었지만, 유옥접이 언무학을 대하는 태도에는 상당한 친밀감으로 가득했다.

“나가 주십시오. 무학이 너도.”

쓰러져 바들거리는 영초린을 바라보며 정호기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할 거면 깨끗하게 하세요.”

유옥접이 언무학을 데리고 나간 후에 정호기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어렸다.

‘이러다 진짜 죽어 버리는 것은 아니겠지?’

그럼 곤란했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 영초린의 몰골은 죽기 일보 직전이었기에, 정호기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곰곰이 따져 보기로 했다.

‘이 몰골로 절벽에 있었다면 바로 떨어져 죽었을 거야. 그럼 그때는 이렇게까지 발작을 하지 않았단 얘긴데, 뭐가 다른 걸까?’

문제는 육망초에 있다고 생각한 정호기의 뇌리에 시간이란 말이 떠올랐다.

‘약초는 거둔 시기에 따라 이름과 효능까지 달라지는 것도 있지. 그렇다면 육망초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채취한 절기가 다른 것일까?’

이제는 숨쉬기도 힘든지 갸르릉거리는 영초린은 꿈틀거리는 것이 전부였고, 곧 세상을 뜰 것 같았다.

‘설마 죽진 않을 거야.’

일말의 바람을 담은 기대였다.

맥을 잡아 보니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몸도 차가워, 이미 시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이놈마저 죽어 버리면 누굴 찾아야 하지?’

정호기가 이런 고민을 할 때, 기적적으로 영초린의 숨통이 트였다.

“하아…….”

깊고 긴 숨이 한 번 나오더니 이내 편안해지고 맥도 돌아왔으며, 체온도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태음지체로 인해 쌓였던 음기가 오히려 영초린의 단전과 기혈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기에 악조영의 공격에도 멀쩡할 수 있었는데, 그 부작용으로 기혈이 막히는 사태가 벌어졌었다.

그것을 육망초가 녹이면서 막혔던 기혈이 뚫린 것이었다.

‘살았구나.’

육망초로 태음지체 때문에 뭉쳤던 음기를 흡수한 이후에, 영초린은 무섭도록 성장할 것이었다.

‘이제 악가장을 상대하는 것만 남았나?’

물론 여기서도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없고, 영초린을 전면에 내세울 생각도 없었다.

‘그러기 전에 나상진 그놈을 만나야겠지?’

최소한의 전력이자 나중을 위한 포석이었다.

“쿨럭!”

기침과 함께 정신을 차린 영초린은 그 자리에서 한 참을 토했는데, 그것들은 모두 거무죽죽한 색이었다.

“으음…….”

손을 움켜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던 영초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핼쑥한 얼굴이면서도 뭔가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어떻습니까?”

“떨리지 않습니다.”

내밀어진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이제 기력을 회복하셔야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제게 뭘 먹인 겁니까? 어떻게 단전과 폐가 정상으로 돌아왔지요?”

숨 쉬는 것도 편안한지 말하는 도중에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것은 차차 말씀드리겠지만, 한 가지만 알아주십시오. 저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마치 대단한 무언가를 너를 위해 포기했는데, 그걸 알아달라는 말이었다.

“주군!”

갑자기 영초린이 무릎을 꿇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제가 원한 것은 동반자였지, 수하가 아니었습니다.”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죽으라 하시면 죽는다고요.”

“하지만…….”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불감청 고소원이었다.

왜 거절하겠는가?

“저는 위계를 엄격히 따집니다.”

“당연합니다.”

“좋다. 너를 수하로 받아들이겠다.”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지만, 정호기에게서 위화감은 찾을 수 없었다.

말투가 바뀜과 동시에 마치 백만 장병을 다스렸던 장군의 그것처럼 겉으로 드러난 위엄이 영초린에게 느껴졌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지금의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최우선적으로 몸을 회복하는 데 힘쓰도록. 그리되면 기회가 올 것이다.”

“알겠습니다.”

정호기가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더니 영초린에게 건네주었다.

“이거면 한동안 지낼 식량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섣불리 돌아다니다간 악가장에 들킬 수 있으니, 아직 몸이 나았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예.”

“곧 돌아오겠다.”

말을 마친 정호기는 다른 말도 없이 방을 나서더니, 밖에서 서성거리던 유옥접과 언무학을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

“어떻게 됐어요?”

유옥접의 물음에 정호기가 짧게 대답했다.

“듣지 않으셨습니까?”

천리지청술을 전개해 안의 상황을 다 파악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이었다.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예.”

정호기의 말에 유옥접의 얼굴이 벌게졌다.

“물론 듣기는 했지만, 그건 영 소협의 안위가 걱정되어서예요.”

“들으신 대로 안정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천추산에 가셔도 영물은 없을 것입니다.”

“뭐, 뭐가요?”

당황했는지 더듬거린 유옥접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욱 붉어졌는데, 아무래도 속내를 들킨 것이 부끄러운 것 같았다.

“아니라면 상관없습니다만, 괜히 헛고생하실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실 외조부께서 영 소협을 치료하시고자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찾아내신 것인데, 기왕 거둘 사람이니 제가 베푸는 것처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물이라기보다는 영 소협의 치료제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흥!”

무안한지 콧방귀를 뀐 유옥접이 고개를 돌려 정호기를 외면했다.

“유 사고님, 동정호가 그렇게 큰가요?”

언무학의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 그를 바라보는 유옥접이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란다. 처음 보는 사람은 그곳의 물을 먹어 보기도 하는데, 바다로 착각해서 그렇지.”

“바닷물은 짜다면서요?”

“응, 너무 짜서 심한 탈수 현상을 겪는 사람이 자칫 잘못 마시기라도 하면 죽을 수도 있지. 그리고 바닷물을 말려서 소금을 얻는단다. 그러니 얼마나 짜겠니?”

“우우… 생각만 해도 입안이 짠 것 같아요. 그리고 중원 오악에 대해서도 듣고 싶어요.”

은근슬쩍 유옥접과 앞으로 걸어 나가며 정호기를 향해 눈을 깜빡이는 언무학의 의도는 간단했다.

언쟁을 종식시키는 것.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은 젊어서부터 그랬나 보군.’

유옥접의 유일한 약점이라고 한다면 어린아이들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성별에 관계없이 아이들에게는 그녀의 철면이 무너졌고, 목소리는 봄바람과 같이 변했다.

***

“당장 치우시오.”

사내의 태도는 단호했다. 이제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얼굴은 곱상했지만 냉기가 흐르고 있어 오히려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이런 개뼈다귀 같은 놈을 봤나. 네놈이 뭔데 하라 마라야?”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잘못되었다 느껴서 하는 말인데, 그것에도 자격이 있어야 하오?”

“이런 시러배 잡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장한이 뭐라고 더 떠들려는 찰나, 옆에서 들려온 말소리가 그의 입을 막았다.

“이봐, 청수 나 소협이 왜 저러는 거야?”

“저 사람이 의자에 칼을 두고 앉아서 앉을 자리가 없지 않나? 그래서 치워 달라고 하다 시비가 붙었다네.”

“쯧쯧,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사람이었군.”

청수(淸水).

수지청즉무어(水至淸則無魚).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뜻에서 지어진 별호로, 나상진의 지나치게 까다롭고 고지식한 성격을 빗대어 부르는 것이었다.

“험험! 생각해 보니 내가 잘못한 것 같구려. 자, 앉으시오. 사과의 뜻으로 한 그릇 대접하리다.”

“당신에게 뭘 얻어먹는다면 내가 한 행동은 협박으로 인한 갈취가 된다는 것을 알고 하는 말이오? 나를 그런 파렴치한으로 만들고 싶소?”

“아, 그, 그런 뜻이 아니라…….”

“그리고 나에게 잡놈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아직 사과하지 않으셨소이다.”

“미안하게 됐수다.”

말을 마친 장한은 먹던 것도 남겨 둔 채 서둘러 계산을 하고 자리를 떠 버렸다.

“한 그릇 주십시오.”

그러거나 말거나 나상진은 소면을 시키고는 얌전히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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