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예? 반생문요?”
고개를 갸웃하는 무학을 보면서 정호기는 문득 그에게 흑룡문주의 독문무공인 광랑십삼검을 가르쳐 보고 싶었다.
‘정파의 태두였던 무학이 흑룡문의 독문무공을 배운다?’
생각만 해도 웃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일이지. 그럼 역시 추혼도와 등천공을 가르쳐야겠군. 그러나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정가장의 독문무공으로 삼으려는 것을 가르쳐도 될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일인전승으로 한다고 해도 나중에 가문과 마찰을 빗진 않을까?’
“…부님.”
“응?”
“어디로 가시나요?”
“잠시 여행을 하다 장으로 돌아갈 생각이란다.”
“헤헤, 여행요?”
“좋으냐?”
“당연히 좋지요. 전 산문을 나선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물론 들어오긴 산문을 넘어 들어왔지만.”
절에 사람을 버리는 일은 많이 있었고, 특히 소림에서도 그러한 일들은 비일비재했다.
가뭄이 길어지면 절간에서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는 말이 떠다닐 정도였는데, 무학도 그중 하나였다.
“우와! 이거 정말 맛있어요.”
당과 하나를 손에 쥐고 전병을 입에 문 무학은 저잣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온갖 먹을거리를 섭렵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 번도 안 먹었었느냐?”
“먹긴 먹었지만, 아주 가끔이고 이렇게까지 맛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고기는 먹을 수 있겠느냐?”
말이 필요 없었다.
정호기의 말에 침을 꼴깍 삼키는 무학의 행동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으니까.
‘이놈이 맞는 걸까? 혹시 그 법명을 다른 이가 받았을 수도 있잖아?’
갑자기 자신이 데리고 온 아이가 그 ‘무학’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케 여태 붙어 있었구나.”
“원주님이 많이 봐주셨어요. 현허 대사님도 가끔 저를 챙겨 주셨고요. 사실 이번에도 승적에 오르지 못하면 무승이 될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마지막 기회였는데…….”
“아쉬우냐?”
“네? 아니요, 아쉬운 것보다는… 뭐랄까, 조금 허전하네요.”
“허전해?”
“예. 법명을 받고 승적에 올린 후 무승이 되는 것이 제 꿈이었거든요.”
“그런 놈이 그렇게 말썽을 피우고 다녔느냐?”
“…….”
“올해로 정확히 몇 살이냐?”
“여덟 살입니다. 저기, 근데 사부님.”
“응?”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무학이 유옥접을 곁눈질하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우린 친구 사이란다.”
“알겠습니다. 유 사고님,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이다.”
그 말에 정호기가 고개를 돌렸다.
‘스물?’
“왜 그러세요?”
“정말 스물입니까?”
“네, 그런데요?”
[올해 스물아홉이에요.]
십사 년 후에 만났을 당시 했던 말이었다.
‘뭐, 좀 줄이는 거야 어때?’
“헤헤, 그럼 사고님은 대충 스물셋 정도 되셨겠네요? 동팔이 아저씨가 그러는데, 스무 살이 넘은 여자가 나이를 밝힐 때는 두세 살 더해야 한다고 했거든요.”
무학의 말에 유옥접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여자의 나이를 물어보는 것은 실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니?”
“전 어려서 괜찮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저더러 물어보라고 많이 시키셨어요.”
“누구야? 그 동팔…….”
“자, 그만하시고 떠나시지요. 갈 길이 멉니다.”
***
“다 쓰러져 가네요?”
정말 유옥접의 말대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집이었다.
담도 없고 산중에 홀로 지어진 움막과도 같은 곳이, 바로 정호기가 찾아온 곳이었다.
“흉가 아니에요?”
“아닙니다. 지금은 어디 좀 간 모양이군요.”
그들이 그렇게 일각 정도를 기다리자 한 사람이 다가왔다.
“콜록콜록. 누구십니까?”
누가 봐도 딱 병자의 모습이었다.
호리호리한 몸에 핼쑥한 얼굴, 거기다 쉬지 않고 터져 나오는 기침까지.
“영 소협이십니까?”
“예? 제가 영초린입니다만, 콜록.”
“섬서 정가장의 정호기라고 합니다.”
“열호아 정호기 소협? 들었던 것처럼 정말 크시군요.”
영초린은 정호기의 어깨도 못 미쳐 작아 보였으나, 그가 작은 것이 아니라 정호기가 너무 큰 것뿐이었다.
“절 알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영 소협을 거두고 싶습니다.”
“콜록콜록. 저 같은 것을 무엇에 쓰겠다는 것인지요?”
“제가 계획한 일을 하는 데 있어 첫 동반자로 삼고 싶습니다.”
정호기의 말을 들은 영초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병신을 말입니까?”
손을 들어 보이는데 덜덜 떨리고 있었다.
끊이지 않는 기침과 덜덜 떨리는 손.
이미 무인으로서 영초린은 망가졌다 할 수 있었다.
-저는 영 소협을 낫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수할 기회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갑작스레 전해진 전음에 영초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지금은 전음을 사용하시기 힘들다는 것을 압니다. 따로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리하시겠다면 저희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십시오.
정호기의 전음을 받고 가만히 서 있던 영초린이 입을 열었다.
“누추하지만 안으로 드시지요. 차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침상과 탁자, 그리고 의자 네 개가 전부인 방이었고, 부엌으로 가면 그 상황은 더욱 열악했다.
“차보다는 식사를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장을 봐 온 것이 있으니 그것으로 조리를 하면 될 것입니다.”
정호기가 준비해 온 재료들을 들어 보이자 영초린이 부엌으로 앞장섰다.
간단히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몸도 낫고 복수도 한다는 말의 진위가 궁금하기도 하련만 영초린은 입을 다문 채 조리하는 것에 열중했다.
***
식사를 마치고 영초린과 정호기가 집 뒤편에 있는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았다.
“드시겠습니까?”
정호기가 건네는 술병을 가만히 바라보던 영초린이 손을 내밀었다.
영초린의 손안에서 흔들리는 술병은 술이 가득 차 있었다면 넘쳤을 정도로 심한 움직임을 보여 주었는데, 술병이 입에 닿고야 그것을 멈췄다.
“크으… 쿨럭쿨럭!”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심한 기침을 한 영초린이 다시 술병을 건네주었다.
“이런 병신을 뭐에 쓰려고 하는 겁니까?”
아마도 영초린은 자신을 낫게 해 준다는 정호기의 말을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전 영 소협을 낫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천수신의 님의 외손자 되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제가 천수신의 님께 진료를 받은 것을 아십니까?”
“몰랐습니다.”
영초린이 정호기를 아는 것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수신의의 행방에 대해 꾸준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분께서 포기한 저를 정 소협이 고칠 수 있다니. 그렇게 고명하신 의술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세상이 여태 몰랐군요.”
말투가 비꼬는 투였다.
“믿지 않으시는군요.”
“복수를 도와주신다 했습니까? 정가장의 힘으로 악가장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악가장은 숭산 서남쪽 아래에 있는 남양현의 토호로서, 근방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문이었다.
가문의 많은 식솔들을 소림의 속가제자로 보내 무공을 배우게 했고 현 가주 또한 소림 속가제자였다.
아무리 천수신의의 비호가 있다 하더라도 정가장으로서는 상대하기 벅찬 곳임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말에 영초린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이 쓸모없는 몸뚱어리를 고쳐 준다면 정 소협이 죽으라고 하신다 해도 따르겠습니다.”
“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제가 하고자 하는 일에 동참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정말 방법이… 쿨럭쿨럭! 이, 있는 겁니까?”
조금 흥분했는지 영초린의 기침이 갑자기 심해졌다.
“단, 복수는 제가 원하는 방법으로 합니다.”
“말했지 않습니까? 죽으라 하신다면 죽는다고. 죽지 못해 살고 있고, 차라리 죽고 싶은 것이 지금의 제 심정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안에 들어가셔서 제 일행과 기다려 주십시오. 내일까지 치료약을 구해 오겠습니다.”
***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이렇게 어울리는 것도 없겠지.’
영초린의 치료약은 멀리 있지 않고 숭산에서 자라고 있었다.
‘일단 그놈이 지금 당장 몸이 낫는다고 해도 악가장에 덤빌 수는 없을 테니 다행이군.’
악가장과 영초린의 악연은 사소한 말다툼에서 비롯되었다.
악가장의 셋째 아들인 악무영이 영초린과 말다툼 끝에 비무를 하게 되었는데, 오른팔이 잘리는 부상을 입은 것이 사태를 촉발시켰고, 둘째 아들인 악화영이 찾아와서 왼쪽 발의 힘줄이 잘리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결국 악가장의 대공자인 악조영이 사건의 종지부를 찍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영초린의 모습이었다.
단전은 황폐화되고 폐는 망가졌으며, 사지의 신경은 비비 꼬여 시도 때도 없이 부들부들 떨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마지막 힘을 모아 죽여 달라는 듯이 몸을 던진 영초린을 향해 악조영이 보인 행동은 잔인하게 외면하는 것이었다.
이미 승패는 가려졌다면서.
그러나 이전부터 승패는 명확하게 갈라졌었다.
악조영이 영초린의 몸을 망가뜨리기 전부터.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영초린이 숭산에서 영약을 구해 먹고 몸이 나았다는 것은 대단한 얘깃거리였고, 그 뒤로 사람들이 그곳을 초토화시키다시피 했었다.
‘약이라고 해서 모두 영약이 아니고, 사람마다 쓸모가 다르다는 것을 왜 모르는 걸까?’
후에 영초린이 밝히길, 자신의 몸이 망가진 것은 악조영과의 비무가 원인이기도 했지만 이미 가지고 있던 지병이 도져 그렇게 된 것이라 하였었다.
그동안 내공으로 억눌러져 있던 것이 충격과 함께 튀어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