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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40화 (41/137)
  • 40화

    “허허허, 백 시주의 외손자라고?”

    “예.”

    현허는 소림을 벗어나 따로 암자를 짓고 지내는 노승이었는데, 작은 암자는 벼랑 위에 위태롭게 서 있고 주위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래, 백 시주는 잘 계시는가?”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여기, 그분께서 보내신 전갈이 있습니다.”

    천수신의의 전서를 읽고 난 현허가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정호기를 찬찬히 살폈다.

    “자네 자랑이 대부분일세.”

    “과찬이십니다.”

    “그래, 저 아이를 제자로 들이고 싶다 하였는가?”

    “예.”

    “어째서? 오늘 처음 보지 않았는가?”

    “인연이 얽히는 것은 순간이요, 그것을 엮어 나가는 것이 평생입니다. 인연을 어찌 만남의 많고 적음으로 따지겠습니까?”

    “그렇지. 옷깃만 스쳐도 삼생의 연이 있어 그러한 것이라 했는데, 만남은 말해 무엇 하겠나?”

    정호기의 말을 들으면서 현허가 한쪽에 가만히 서 있는 사미를 바라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예?”

    갑작스레 질문을 받은 사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너도 싫진 않은 모양이구나.”

    “…….”

    “쯧쯧! 소실봉이 좁다고 사고를 치고 다니더니, 이제는 속세와 연이 생길 것 같아 설레는 것이냐? 천하를 뒤집어 놓고 싶어서?”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더냐? 얼굴에 쓰여 있는 것을. 승적에 법명이 올라가면 소림이 너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내가 너를 거두려고 했는데, 이렇듯 인연이 너를 이끄는구나.”

    말을 마친 현허가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이전부터 이 녀석을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나와 이어져 있지 않은 모양이네.”

    “알고 계셨습니까?”

    “소림에서 저 녀석을 모르는 이들을 세는 것이 더 빠를 걸세. 벌써부터 계율원주가 벼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쯧쯧. 그래서 내가 이곳으로 빼 오려고 생각 중이었네.”

    현허의 말에 사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계율원은 소림의 승려들 중에서 잘못을 한 이들이 벌을 받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지금까지의 대화를 생각하던 정호기의 눈이 현허에게로 향했다.

    ‘무학이 이 노승과 연이 생길 것이었다고?’

    그렇다면 무학을 가르친 장본인이 바로 이 노승이란 말이 되었다.

    소림 방장이자 역사상 가장 강했다 일컬어지던 무학을.

    ‘기세도 없고 그저 힘없는 학승과 같은데, 어찌 무학을 키웠을까?’

    정호기가 그런 생각을 할 때, 현허가 일어섰다.

    “백 시주의 부탁도 있고 하니 잠시 나가세나.”

    암자의 뜰에 나온 현허가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다 시선을 정호기에게로 돌렸다.

    “무공에 뜻을 두었다고 적혀 있던데, 맞는가?”

    “예.”

    정호기가 대답을 할 때 유옥접이 킥! 소리를 내면서 억지로 웃음을 참았는데, 무공을 익히는 목적이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많은 것을 보여 줄 수는 없지만 잘 보도록 하게나. 너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니 눈을 크게 뜨도록 하고.”

    현허가 정호기와 사미를 바라보며 말을 했다.

    우웅~

    마치 범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현허의 몸에서 들리더니 이내 그의 몸 사방에서 뭔가가 가시처럼 솟아 나왔다.

    황금빛으로 물든 가지각색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손놀림은 천지를 뒤덮고, 정호기의 정신까지도 가둬 버렸다.

    “후우… 어째 갈수록 더 힘이 드는지.”

    잠깐의 시연이었건만 현허의 온몸은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

    “허허허, 정 시주께서는 선계에 들어가신 것인가?”

    멍하니 입까지 벌리고 서 있는 정호기와는 달리 사미는 그저 놀란 표정이었는데, 이내 그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서렸다.

    멋들어진 현허의 무공 시연을 보고 나니 이곳을 떠나야 할 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는 것이다.

    “지금 와서 졸라도 이미 네 연은 이곳을 떠났단다.”

    사미의 갈등을 눈치 챈 현허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무슨 고민이 그리 많아 미몽을 헤매는 것인지 모르겠군.”

    옆에서 뭐라고 떠들든 정호기의 자세는 바뀌지 않았는데, 마치 그저 입을 벌린 채 굳어진 석상처럼 서 있었다.

    “유 시주께서도 들어오시게.”

    정호기를 뒤로한 현허가 사미와 유옥접과 함께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

    자신은 분명 소실봉에 위치한 외딴 암자에 있었건만, 현허의 무공을 본 후 정호기가 정신을 차린 곳은 검붉은 암흑 속이었다.

    “내면에 들어온 것인가?”

    바닥은 질척하고 끈적거렸다.

    “하여간 소림의 땡중들은 요상한 기술을 많이 가지고 있군.”

    현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이런 조화를 부린 것이 틀림없었다.

    “뭔가 계기가 있어야 이곳을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질척이던 바닥이 울룩불룩 솟더니 점차 형상을 찾아갔다.

    “시답지 않은 짓거리를 하는군.”

    그간 자신의 손에 죽어 간 이들이 피 흘리는 모습으로 수 없이 많이 나타났지만, 정호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쩌라고? 이미 과거이자 미래일 뿐이다. 내가 살고 있는 것은 현재! 사라져 버려!”

    천추산에서 결정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혈신이든 열호아든, 지금을 살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과거의 일 때문에 후회하고 싶지도, 미래에 벌어질 일 때문에 자책하고 싶지도 않았다.

    현재에 충실한 삶.

    그것이 바로 정호기가 결정한 것이었다.

    용암에 눈이 녹듯 형체들이 허물어지더니 네 명의 사람이 남았다.

    천예성과 하 총관과 곽현, 그리고 궁내상이.

    “너희는 별다르다, 이거냐? 웃기지 마!”

    스스로는 부정했지만 이들 네 사람은 현재에 와서 그가 죽이거나 죽음으로 이끈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정호기의 내면에서 부담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을 느낀 정호기였기에 강하게 부정했지만, 그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차 그 모습을 키워 나갔다.

    “후회는 없다! 너희가 다시 앞을 막는다면 또다시 벨 것이다! 그것이 천 번이든 만 번이든!”

    어느새 정호기의 손에는 도가 들렸고, 그것이 네 사람을 향해 휘둘러졌다.

    ***

    “허허…….”

    한 시진이 지나고서도 서 있는 정호기를 보면서 현허는 내심 흡족했다.

    “부디 많은 것을 얻길 바라겠네.”

    천수신의가 원한 것은 정호기의 마음을 다스려 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조금 무리를 해서 범천공으로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보며 잠재된 의식에서 깨닫기를 바란 것이었는데, 이런 결과가 나타날 줄은 알지 못했다.

    같이 범천공을 본 사미와 유옥접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것은 그만큼 준비가 되지 않아서였다.

    실상 범천공을 시전한 현허조차 정호기가 그것을 받아들일지 의문이었으니까.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수백 번을 본다고 하여도 깨닫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범천공이었다.

    “후우…….”

    긴 한숨과 함께 정호기가 눈을 뜨자 그 앞에 현허가 서 있었다.

    “무엇을 보았는가?”

    “제 마음속에 있는 갈등을 보았습니다.”

    “그래, 잘 해결되었는가?”

    “예.”

    베고, 베고, 또 베었다.

    그럴 때마다 네 개의 형상은 더 커지고 단단해졌지만, 정호기는 굴하지 않았다.

    결국 네 개의 형상이 가루가 되어 검붉은 내면을 가득 채울 때까지 정호기의 칼질은 멈추지 않았고, 끝내 남은 것은 그 혼자였다.

    ‘이제 와 후회 따위를 할 생각은 없다. 그들의 죽음에 가책을 느끼고 싶지도 않다. 나도 모르는 새에 그들이 나의 가슴에 자리했다지만, 마찬가지로 다시 내 앞에 선다면 벨 뿐이다!’

    “자, 들어가세. 기다리고 있다네.”

    “예.”

    ***

    산문을 나서는 사미의 눈이 계속해서 뒤로 돌려졌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규… 무학요.”

    “무학?”

    “예.”

    “성은?”

    “언요.”

    “언?”

    “예. 제가 산문에 버려질 때 그렇게 쓰인 죽간이 나왔다고 했거든요.”

    “그래, 언무학. 알았다. 나는 정호기라고 한단다. 섬서 정가장의 소장주이지. 그리고 앞으로는 나를 사부라 부르도록 해라. 알겠느냐?”

    “예, 사부님.”

    본디 법명은 같은 사람이 없으니 무학이라 불린 이 사미가 바로 정호기를 이곳으로 이끈 장본인이라 할 수 있었다.

    만일 정호기가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현허의 제자가 되어 소림 최고승이 되었으리라.

    무학이 부르는 사부님 소리를 들으며 만족해하는 정호기를 유옥접이 요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요. 그래도 몇 달간 같이 생활하면서 정 소협에 대해 어느 정도는 파악했다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겠군요.”

    유옥접의 말에 무학이 입을 열었다.

    “무릇 사람이란 바닥이 없는 늪과 같아서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고,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고 하지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예? 에… 그러니까…….”

    정호기의 말에 무학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뜻도 모르는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이 바보라고 떠드는 것과 진배없단다.”

    무학의 얼굴이 벌게졌다.

    ‘이래도 되는 걸까?’

    순간적인 충동이고 찾아온 기회였기에 잡았을 뿐이지만, 벌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무학을 보고 있자니 괜한 짓을 한 것 같았다.

    ‘소림 최고수가 될 정도로 자질이 있는 놈이라 제자로 두어서 나쁠 것은 없겠지만…….’

    어쩐지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지만, 무학을 다시 돌려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저… 사부님.”

    “응?”

    “문파의 이름은 뭔가요?”

    무학의 말을 듣고는 어차피 정가장을 이을 것이 아니라면 문파의 시조가 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다시 살고 너도 새로운 운명을 가졌으니, 반생이란 이름이 어울리겠구나.’

    문파의 이름은 순식간에 정해졌다.

    “반생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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