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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39화 (40/137)

39화

“좋구나!”

쩡! 쩡! 쩡!

도와 도가 만날수록 궁내상의 얼굴엔 미소가 어렸고, 온몸은 땀으로 젖어 갔다.

예전의 자신을 보는 듯한 정호기와 어우러지며 그 옛날의 자신을 투영하자, 잊혔던 호승심과 무공에 대한 열정이 순간적이나마 피어올랐던 것이다.

‘좋지 않다.’

반대로 정호기의 얼굴은 굳어 가고 있었는데, 궁내상의 몸에서 서서히 악취가 풍기고 기가 점점 자신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악취가 난다는 것은 그동안 쌓였던 탁기가 자연스레 배출되기 때문인 것이고, 기의 방향이 정확해진다는 것은 경지가 끌어 올려지고 있다는 뜻이니… 답은 하나밖에 없구나.’

궁내상은 자신과 닮은 정호기와의 비무에서 인지하지 못하는 와중에 벽을 넘어서고 있었고, 정호기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나를 위해 죽어라!’

“하압!”

쨍!

이제까지의 그 어떤 소리보다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오며 궁내상이 쏘아 보낸 기가 안개가 되어 바스러졌다.

그리고 지금껏 수세에 있던 정호기가 공세로 전환했는데,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궁내상의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이게 아니야! 이게 아니다! 이렇게인가? 아니, 이렇게?’

쇳소리와 함께 미몽에서 깨어난 궁내상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지 알게 되었고, 그 느낌을 붙잡으려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그것은 멀어졌다.

‘안 돼! 안 돼!’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이었던가?

얼마나 애타게 갈구하던 것이었던가?

“안 된단 말이다! 안 돼, 안 돼!”

흥분했는지 결국 마음속의 절규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고, 정호기를 압박하는 도에는 살기마저 묻어 있었다.

“궁 대협, 정신을 차리십시오! 궁 대협!”

정호기가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는데, 사실 정호기도 그것을 노리고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유옥접과 궁효진이 잘 들을 수 있도록.

‘미치지 않으면 이상한 거지.’

궁내상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정호기였기에 이제 그만 끝을 내고자 했다.

비스듬히 떨어지는 구환도의 궤적에 슬쩍 자신의 도를 디밀고는 부딪치는 순간, 힘을 이기지 못한 것처럼 몸을 휘청거렸다.

다시 궁내상이 공격을 한다면 위기에 처할 수도 있는 찰나였는데,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궁내상이 주저앉으면서 비무는 막을 내렸다.

“괜찮으십니까?”

다리를 부여잡고 쓰러진 궁내상은 정호기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쓰러진 상태로 멍하니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강이를 부러뜨려 놨으니 제대로 싸울 수 없을 거다.’

“안 돼… 안 돼… 안 돼…….”

주저앉아 계속 같은 말만 되뇌는 궁내상의 상태는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아버지!”

궁효진이 달라붙어 그를 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갈!”

웅혼한 내력이 실린 음성이 정호기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그제야 궁내상의 눈동자가 흐릿함에서 벗어났다.

“궁 대협, 괜찮으십니까?”

덥석 정호기의 손을 잡는 궁내상의 손길엔 간절함이 가득했다.

“다, 다시 나와 비무를 해 주시오. 제발, 다시 한 번만!”

엎드려 애걸복걸이라도 할 기세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니 우선 이 팔 좀 놓고…….”

“시작합시다. 으윽…….”

정호기의 대답을 들은 궁내상이 일어나려다 부러진 정강이뼈 때문에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고, 그런 그를 궁효진이 부축했다.

“제가 그만 궁 대협의 다리를 부러뜨린 것 같습니다. 오늘은 도저히 계속할 수 없으니 일단 치료를 받으시지요.”

“이까짓 것은 아무렇지도 않소. 그러니 시작합시다. 난 할 수 있소!”

궁효진을 밀어내며 자세를 잡으려는 궁내상이었지만, 그것이 그리 쉬울 리 없었다.

“궁 대협…….”

“제발, 제발 부탁이오. 난 할 수 있소이다. 자, 먼저 가겠소.”

멀쩡한 한 발로 풀쩍 뛰면서 도를 휘둘렀지만, 슬쩍 비켜서는 정호기의 간단한 움직임에 허공을 가를 수밖에 없었다.

“자, 다시 가오.”

또 도를 휘두르려는 그를 정호기가 재빠르게 다가가 붙잡았다.

“몸이 나으면 언제라도 비무를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그만하시지요.”

“제발…….”

“제가 안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정호기가 도를 붙들자 궁내상이 그제야 체념한 듯 손에서 도를 놓았고, 정호기가 그것을 궁효진에게 건네주었다.

***

“이대로 가도 될까요?”

궁가촌을 나서는 정호기에게 유옥접이 물었다.

“볼일을 보고 돌아오면 몸이 나으실 것이니 그때 다시 비무를 해 드리면 될 것입니다.”

궁내상은 성치 않은 몸으로 부목을 대고 비무를 하자면서 졸랐고, 정호기는 그런 그를 보다 못해 떠나기로 결정을 했다.

마을 밖까지 쫓아 나오며 꼭 다시 찾아줄 것을 부탁하는 궁내상은 마치 사막에서 옹달샘을 발견한 여행자의 모습과 같았다.

유옥접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아직도 그들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 궁내상과 그를 부축한 궁효진의 모습이 보였다.

“걱정되십니까? 깨끗하게 부러졌다니 낫는다고 해도 부작용은 없을 것입니다.”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그래요. 왜 하필 그때 각성의 순간이 찾아왔는지…….”

말을 하다 멈췄는데, 아침에 정호기에게 온 기회를 그녀가 방해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떻게 올지 알 수 없기에 항상 노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말입니다. 그러지 못한 것은 스스로의 책임도 있는 것이지요.”

유옥접의 실수를 덮어 주는 것 같지만, 자신이 한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어디로 가실 생각이지요?”

“이대로 숭산에 갈까 합니다. 어차피 가까운 곳이고, 또한 숭산을 지나야 제가 가고자 하는 곳이 있으니까요.”

“이제는 여쭤도 되겠지요? 진짜 무슨 목적이 있어 나오신 건가요?”

“사실은 사부님께 쓸 만한 사람을 추천받아서 그를 데리러 갑니다.”

“사람요?”

“예. 저는 조금 큰 꿈을 꾸고 있습니다.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과 악명이 높은 이들을 찾아가 무찌른 다음, 이름을 천하에 알리는 것입니다.”

“흑룡문으로 가시면 되겠네요. 지금 문주는 꽤나 악명이 높으니까요.”

“벌써 죽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명성도 살아 명성이지, 죽어 얻으면 뭐합니까?”

“누구, 노리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어려서부터 차근차근 명단을 모아 놨기에 꽤 됩니다.”

“영웅지를 많이 읽으셨나 보네요.”

“조금 읽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영웅이 되는 것을 꿈꿨고요.”

유옥접은 우스갯소리로 한 것이었는데, 정호기가 또박또박 진지하게 대답하자 오히려 그녀가 당황했다.

“정말이에요?”

“사실입니다.”

“그럼 지금까지 죽자고 무공을 익힌 것이 그러한 일을 하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요?”

“예.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조금은 냉정하고 조금은 괴팍하고, 무공이 자신의 길인 것처럼 죽자고 수련하는, 진지한 정호기의 황당하기까지 한 꿈을 들은 유옥접은 순간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호호호호호호!”

“왜 웃으십니까?”

“아, 아니에요.”

눈물까지 흘리며 웃고 난 유옥접은 자신이 또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뱃속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멋진 꿈같아요. 저도 동참할 수 있을까요?”

“원하신다면 그리하십시오. 하지만 길고 험한 여행이 될 겁니다.”

“이미 같이 걷고 있는걸요.”

* * *

“참으로 멋지네요.”

“예, 그렇군요.”

숭산 소실봉에 자리한 소림은 주변의 산들과 어울려 마치 무릉도원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했다.

[모조리 부숴 버려!]

현판은 손수 깨 버렸고, 대웅전에 불을 지른 것도 정호기 자신이었다.

“들어갈까요?”

이미 많은 이들이 소림의 대문을 넘고 있었으며, 또한 그곳을 나서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어 소림으로 들어간 두 사람이 경내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다니다 조금 외진 곳으로 들어섰을 때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이 녀석! 이번엔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란 것은 너도 알겠지?”

이제 열 살이나 됨 직한 어린 사미(沙彌)가 꾸중을 듣고 있었는데, 뭔가 대단한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잘못했습니다, 원주님.”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감히 여신도들이 목욕재계를 하는 것을 훔쳐보다니! 이제까지 무수한 많은 잘못을 했어도 내가 눈감아 준 것은, 네가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생활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이번엔 도저히 봐줄 수가 없구나.”

“원주님,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중년으로 보이는 승려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사정하는 어린 사미의 모습을 스쳐 지나가려는 정호기를 붙드는 소리가 들렸다.

“저도 내일이면 법명을 받고 승적에 이름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러기 전에 너를 내치려는 것이다. 만일 승적에 이름을 올린 상태였다면 가벼이 끝날 일이 아닐 테니까.”

“무학(武學)이란 법명을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시잖아요. 거기다 이곳에서 쫓겨나면 천애고아인 제가 어딜 가겠어요? 원주님,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천둥번개가 정호기의 뇌리를 흔들었다.

“왜 그러세요?”

고개를 돌린 채 멍하니 사미를 바라보는 정호기에게 유옥접이 물었으나 지금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저기, 정 소협?”

뭔가에 이끌리듯 울고 있는 사미에게 다가가려는 정호기를 잡으려 했지만, 유옥접의 손길은 허공을 움켜쥐었다.

“안녕하십니까?”

정호기의 등장에 원주라 불린 승려가 흠칫하며 사미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러자 사미는 외인이 나타난 것에 더욱 용기를 얻었는지 이제는 아예 자리에 누워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이놈이……!”

사미의 행동에 당황한 승려가 그를 말리려는 그때, 정호기가 입을 열었다.

“지나다 듣게 되었습니다.”

“허허허, 못난 꼴을 보였습니다. 아미타불.”

“사람이 사는 곳인데, 어떤 일이든 없겠습니까? 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 아이에 대해서입니다.”

“예?”

“제가 비록 어린 나이지만 무공에 조예가 있어 제자를 두고 싶었습니다.”

정호기의 말에 원주라 불린 승려와 유옥접이 동시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듣자 하니 불가와 인연이 없는 듯한데, 제가 한번 인연을 이어 가도 괜찮을지…….”

“아직 승적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소림에서 거둬 지금까지 자란 아이입니다. 제가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찌 함부로 내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야 괜찮지만, 승적에 이름을 올린 후에 또다시 같은 사고를 친다면 이 사미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고도 멈추지 않는다면요?”

말로 훈계를 하는 것은 승적에 이름을 올리기 전까지였다.

그 이후에는 징벌방이 기다리고 있고, 무공을 익힌 이후라면 사지근맥을 자를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시주의 신분도 확실하지 않은 마당에 함부로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섬서 정가장의 정호기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열호아란 별호를 가지고 있으며, 작년 사가장의 무림대회에서 우승을 했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천수신의께서 제 외조부가 되시는데, 그분의 부탁으로 현허 대사님을 찾아왔으니, 대사님께서 제 신분을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

“현허 사숙님이요?”

“예. 안 그래도 그분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 같이 가셔서 확인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천수신의란 말에 승려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어렸다.

옆에서 열심히 뭔가를 궁리하는 듯한 사미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본 승려가 한숨을 내쉬더니 앞장서 걸었다.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너도 따라오너라.”

걸어가는 승려도 속으로는 무척이나 고민 중이었는데, 사미의 장난이 이제는 도를 넘어서는 지경에 처해 이대로 승적에 이름을 올렸다가는 몸성히 소림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인연이가?’

승적에 이름을 올리기 전인 사미들을 가르치는 사미원의 원주를 지내는 범용은, 이 시기에 말썽꾸러기 사미와 그를 제자로 들이고 싶다는 정호기의 만남을 인연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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