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정말 몰랐습니다. 제가 어찌 문도를 죽일 생각을 하겠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시기가 교묘해 성(星)각의 인물들이 네가 궁내상에게 사주한 것이 아니냐고 따지고 있단다.”
일(日)이 기존에 있던 남자들의 집단이고 월(月)이 여인들의 모임이라면, 성(星)은 여인들에게서 태어난 사내들이 만든 곳이었다.
태양과 달, 별로 이루어진 일월문이 된 것이다.
“그럴 것 같으면 제 손으로 죽여 버렸지요. 이전부터 미약을 파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적대시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니까요. 제가 이렇게 허술하게 계획을 꾸밀 것 같습니까?”
“우리도 그 점을 들어 그들에게 대항하고 있지만, 그들은 이 기회에 네 자격을 박탈하려는 모양이다.”
“설마 그들이 일각과 손을 잡은 것입니까?”
천예성이 사라진 지금, 유옥접마저 자격을 잃게 된다면 일각이 우세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일각주와 성각주가 은밀한 회동을 했다는 정보는 들었지만,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단다. 같은 사내라도 그들은 근본적으로 태생이 다르고 생각하는 바가 달랐으니까. 하지만 이제 이러한 상황이 되었으니 성각주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겠구나.”
세 개의 각에서 두 개의 각이 손을 잡는다면 당연히 우세할 수밖에 없었다.
“전 결백합니다.”
“믿고 있단다. 그러나 조사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자중하는 것이 좋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되도록 궁가촌에서 빨리 떠나도록 하여라. 조만간 복수가 이뤄질 테니까.”
“궁내상을 흉수로 지목한 것입니까?”
“그래. 범인이 덩치가 컸다고 하지만 정 소협이 그런 일을 벌일 이유는 없지 않느냐?”
“제가 지켜본 바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 소협과 천 당주는 일면식도 없었으니까요. 은원이라 부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왜 그가 천 당주를 죽이겠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또한 흑영이 천 당주의 말을 들었는데, 직접 궁내상이란 이름을 언급했다고 하더구나.”
“알겠습니다.”
“접아.”
“예.”
“네게 힘든 짐을 지워 준 것 같구나.”
“아닙니다. 이제 와서 기녀 수업을 받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선택한 길입니다.”
유옥접이 중원으로 나선 것은 월각에서 그녀에게 기녀로 나설 것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빼어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무공이 높고 나름대로 개성이 있었기에 월각에서 밀어주면 단숨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으리라.
거기다 월각의 화장 기술은 거의 변장에 가까워 유옥접을 빼어난 미인으로 탈바꿈시킬 수도 있었다.
“반드시 무공으로 제 이름을 중원에 각인시키도록 하겠습니다.”
***
“어디 갔다 오십니까?”
“잠깐 바람 좀 쐬고 왔습니다.”
정호기의 물음에 시큰둥하게 대답을 한 유옥접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떤 핑계를 대고 이곳을 떠나지?’
정호기가 궁내상과 비무를 하고 싶다는 속내를 비췄기에 비무를 하기 전에는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궁내상 그자가 그런 망나니였다니… 생각도 하지 못했구나.’
인간의 내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누가 올까?’
궁내상의 무위는 일월문 내에서도 인정을 한 것이었고, 그렇다면 분명 그에 걸맞은 이가 찾아올 것이었다.
일월문에 기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천예성이 운영하던 풍운장 같은 상가와 무가, 그리고 그들의 어두운 일면을 해결하는 살수 조직까지 있었으며, 흑영도 그곳에 속한 이들 중 하나였다.
‘모를 일이다.’
한숨을 내쉰 유옥접이 심란한 마음을 감추듯 눈을 감았다.
다음 날,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전각을 나선 유옥접의 눈에, 도를 든 채 마침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정호기의 모습이 보였다.
윗옷을 입지 않았기에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는데,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매끈한 근육들로 덮여 있었고, 그곳에서는 땀이 방울져 흐르고 있었다.
“후우…….”
긴 숨이 내뿜어질 무렵, 유옥접은 정호기의 도에서 강한 기파가 쏘아져 해를 향해 질주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니, 도가 분리되어 해를 난도질하기 위해 쏘아져 가는 모습이었다.
“아…….”
자신도 모르게 나온 탄성에 정호기의 고개가 돌려졌고, 찌푸린 인상에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 죄송해요.”
“제 불찰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타인이 무공을 연성하는 것을 훔쳐보는 것은 살인도 불사할 정도로 금기시되는 행동이었지만, 왕래가 있는 뜰에서 연무를 한 정호기의 책임도 크다 할 수 있었다.
“설마 제가 각성을 방해한 것은 아니겠지요?”
깨달음은 순식간에 찾아오고, 그것을 잡느냐 못 잡느냐의 차이가 바로 고수와 하수로 나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깨달음은 정한벽을 넘어서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으니까.
“아닙니다.”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반 정도만 맞는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얻으려는 순간이 아니라 찾으려는 순간이었지.’
지금 정호기는 예전 혈신이었던 시절의 무위를 완전히 찾은 것은 아니었다.
같은 길을 걷는다고 해서 꼭 같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무공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하필 지금 왔는지…….’
늘 하던 일이었기에 육체의 힘만으로 도를 들고 도첨에 마음을 실어 기세를 날카롭게 만들던 중이었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땀방울이 늘어날수록 육체는 정호기의 지배를 거부했지만, 정신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정신이 육체를 잠식하던 순간 해가 떠올랐고, 그 빛 속에서 하나의 길이 보였던 것이다.
만일 유옥접이 방해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잘게 부서지는 해를 볼 수 있었으리라.
예전에 그가 이미 봤던 그것처럼.
‘어차피 올라갈 정상이다. 조금 늦어진 것일 뿐. 다만, 이번엔 어째서 붉은 길이 아닌가?’
당시에 정호기가 봤던 것이 피처럼 붉은 주단이 길게 깔린 것처럼 보였다면, 지금 그가 본 것은 삼베처럼 누런색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내 마음이 변해서인가, 아니면 광랑십삼검 대신에 절영도를 택한 것 때문인가?’
복수의 대상은 바뀌었지만, 그의 마음속은 아직도 복수심으로 들끓고 있었다.
다만 그 농도가 다를 뿐.
‘이것은 내게 보내는 나 자신의 경고인지도 모르겠구나. 의지가 약해지면 나아가는 속도와 거리가 다른 법. 냉백에 대한 내 증오가 부족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증오하는 마음은 때론 어떤 이에게는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동기 부여가 되기도 했는데, 정호기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언제까지 있을 건가요?”
“안 그래도 곧 떠날 생각입니다. 몸이 준비된 것 같으니 오늘쯤 궁 대협께 비무를 청할 생각이거든요.”
‘잘됐다.’
정호기의 대답을 들으며 유옥접은 일이 잘 풀린다 생각했지만, 이 모든 것은 정호기의 계획에 있는 일이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있어 걸림돌이 되는 것이 바로 궁내상이었으니까.
‘네놈이 살아있으면 안 돼.’
어떤 식으로든 일월문은 궁내상을 처리하려 할 것이고, 그 와중에 혹시라도 궁내상이 살아난다면 일이 꼬일 수도 있었다.
물론 그가 부정한다고 해서 믿어 줄 일월문이 아니겠지만, 의심의 싹이 트는 일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상처를 입혀 주면 처리하기 쉽겠지?’
비무를 핑계로 궁내상의 몸 중에서 어디 한 군데를 불편하게 만들려는 속셈인 것이다.
***
“허허허, 그럼 어디 한 번 어울려 봄세.”
궁내상이 구환도에 달려 있는 고리를 짤랑이며 정호기와 마주 섰다.
“저에겐 안 통할 겁니다.”
정호기의 말에 궁내상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는데, 환을 이용해 음공을 가한 것을 말한 것이었다.
내상을 입힐 목적이 아닌 귓속을 흔들어 주의를 분산시키고 집중력을 떨어뜨리려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간파한 정호기가 말 속에 내력을 실어 음파를 흩트려 버렸다.
“정말 놀랍군!”
솔직한 심정이었고, 스스로를 뛰어난 천재라 생각했던 지난날보다 더욱 뛰어난 것 같았다.
“정말 약관이 되지 않았나?”
“예.”
“이거, 오늘 낭패를 볼지도 모르겠구먼.”
“저를 상대로 유치한 장난은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말을 하면서 궁내상의 옆구리를 바라보았는데, 유옥접에게 한 것과 같이 적당히 상처 입고 꽁무니를 뺄 생각을 하지 말란 말이었다.
“알겠네.”
찌링!
아까와는 다른 날카로운 쇳소리가 정호기를 향했고, 정호기가 그것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퍽.
아무것도 없던 허공과 도가 만났건만 뿌연 안개와 같은 것이 흩뿌려졌다.
“이것도 하나의 초식이라네. 우리 문파에 전해 내려오는 일종의 기수식이라 할 수 있지. 물론 내력이 어느 정도 올라선 자만이 배울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또다시 음공을 펼친 것에 대한 설명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네.”
참관인으로 유옥접과 마을을 들어섰을 때 그들을 맞은 궁효진이 자리했는데, 그녀들은 비무가 시작도 되기 전에 긴장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궁효진은 망가지기 전의 궁내상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설렘을 가져서였고, 유옥접은 자신이 상대했던 궁내상이 얼마나 높은 수준의 고수인지를 깨달아서였다.
그리고 정호기의 강함을 새삼 느꼈기 때문이었고.
‘어떤 종자인 거지?’
약관도 되기 전에 저러한 경지라는 것은 실로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아무튼 그녀들이 그렇게 각기 자신들만의 생각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을 때, 비무가 시작되었다.
***
처음 도와 도가 부딪쳤을 때 정호기의 인상이 찡그려진 것은 귀를 자극하는 충돌음도 원인이었지만 얼굴을 향해 쏘아져 오는 기 때문이었다.
슬쩍 얼굴을 틀었지만 볼을 베일 정도로 날카롭고 시기적절 한 공격이었다.
‘자칫하면 큰일 나겠군.’
그러나 보아하니 기를 의지로 쏘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기가 튕겨져 나왔는데, 전혀 상관이 없는 곳으로 날아가기도 했으니까.
실상 궁내상의 도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음공이고, 음공과 도법을 접목시킨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궁내상이 넘지 못한 벽은 도법이 아니라 음공에 관한 것이었고, 그것을 돌파하면 의지가 향하는 곳으로 기를 쏘아 낼 수 있었다.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쏘아지는 기는 근거리에서 치명적인 수로 작용할 수 있으니, 대성한다면 무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무공이었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그것을 대성한 이는 없었다.
그의 가문이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만들어 낸 궁내상조차도.
어려서부터 무공에 재능이 있던 궁내상이었고, 또한 그것을 받쳐 줄 헌신적인 노력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어김없이 벽은 찾아왔고, 그 시기는 정호기의 지금 나이와 비슷했었다.
그것을 돌파하고자 낭인으로 중원을 떠돌았지만, 결국에 남은 것은 절망뿐이었다.
가문의 모든 기대를 안고 있던 부담감은 크나큰 짐이 되어 그를 누르고 또 눌러, 지금의 망가진 궁내상을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