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나를 기다린 것이냐?”
“…….”
“나 때문에 진영이를 죽인 것이냔 말이다!”
정호기가 대답 대신 도를 찔러 갔지만, 사방에서 검이 쏘아지며 그의 행동을 막았다.
“사로잡아라!”
두셋씩 짝을 이뤄 검을 찔렀지만 얼굴이나 몸뚱이를 노리는 것은 없었다.
모두 팔과 다리를 노렸으며, 혹시라도 도와 부딪치려는 순간에는 모두 무기를 거뒀기에 정호기의 도는 허공을 벨 뿐이었다.
차륜전으로 정호기의 힘을 빼고 팔다리에 상처를 입혀 항거불능의 상태로 만들려는 계획인 모양이었다.
‘너무 쉽게 죽이면 이상하려나?’
처음엔 적들의 계획대로 어느 정도 상처라도 입을 생각이었지만, 그가 알고 있는 궁내상의 무공을 떠올리고는 생각을 바꿨다.
‘오히려 시간을 끌면 안 되겠다.’
도를 찌르려는 동작을 취하다 갑자기 자세를 낮추며 회전한 정호기의 공격에 첫 피해자가 나왔다.
“크윽!”
한쪽 발목이 잘린 채 신음하는 그를 향해 정호기가 몸을 날릴 때, 그를 구하려는 듯 사방에서 검이 날아왔는데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었다.
캉!
도와 부딪친 검이 공중으로 튕겨 나가고 검을 놓친 손목을 부여잡은 채 인상을 찡그리던 무사의 얼굴이 세로로 갈라졌다.
그 무인의 피를 맞으며 포위망을 벗어난 정호기의 역공이 시작될 때 사태의 심각성을 안 천예성도 검을 들고 싸움에 합류했지만, 그런다고 바뀌는 것은 없었다.
“컥!”
발에 음낭을 맞고 괴로워하는 무사의 얼굴을 다른 발로 찍으며 허공으로 떠오른 정호기의 도에 다시 한 무사의 목이 날았으며, 땅에 착지함과 동시에 사타구니를 잡고 주저앉은 무사의 뒷덜미를 찔렀다.
“이, 이럴 수가…….”
망연자실 서 있는 천예성의 얼굴에, 분노와 살기보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자리했다.
“누구냐?”
정호기가 말없이 한 걸음 다가가자 천예성은 정신없이 뒤로 물러섰다.
-빚을 독촉하던 그 당당함은 어디로 간 거지?
걸걸한 목소리로 바꾼 정호기의 전음을 들은 천예성이 뭔가가 떠오른 듯 소리를 질렀다.
“빚? 설마… 궁내상 너냐?”
-말이 심하군. 장인이 될 수도 있었는데.
“장인이라니! 너는 아이들의 피땀을 빨아먹고 사는 쓰레기야! 난 그녀를 네놈이 만들어 놓은 시궁창에서 구해 내고 싶었을 뿐이다!”
-난 그 아이들의 아버지다. 그 녀석들의 목숨을 구해 준 것도 나고.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인생을 네가 짓밟을 권리는 없어!”
천예성이 소리를 지르며 검을 찔렀지만 이미 그 검엔 예기가 없었기에 살기와 분노, 그리고 절망이 깃든 망나니의 칼부림과 다르지 않았다.
“커흑!”
배를 뚫고 들어간 도신이 등에 돛대처럼 곧게 솟았다.
“네… 네놈…….”
도가 뽑히자 무너지는 천예성을 뒤로하고 궁의민의 시체를 둘러맨 정호기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경공을 사용해 빠르게 장내를 빠져나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숲 속 깊은 곳에 도착한 정호기가 궁의민을 묻고는 그대로 궁내상의 집으로 향해 달린 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담장을 넘어 사라졌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지켜본 것은 짙은 어둠뿐이었다.
* * *
‘응? 이 소리는?’
마치 밤새가 우는 소리 같았지만 일정한 음률에 따라 높낮이가 달랐고, 자연의 소리라고 하기에는 약간의 부조화가 있었다.
‘어째서?’
일월문에서 사용하는 신호였고, 그것은 당장 그들이 있는 곳으로 오라는 내용의 것이었다.
자신을 은밀히 불러낸 신호를 따라 도착한 곳에서 유옥접이 만난 것은 세 명의 일월문 소속 무인이었고, 그들을 발견한 그녀의 얼굴에 긴장된 빛이 흘렀다.
‘집법사자들이 무슨 일이지?’
검은 장포에 검은 두건을 쓴 그들의 가슴에는 둥근 원과 초승달 모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을 검이 관통하고 있었다.
“문주께서 부르신다.”
현 문주의 호위이자 문 내의 변절자나 큰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처리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기에, 그들을 만난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라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죠?”
“가 보면 알게 된다.”
거부할 수 없었다.
무공도 그녀가 하수였고, 여차하면 문도들을 죽일 수 있는 생사여탈권도 같이 갖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들을 따라 신형을 날린 유옥접은 모처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석실에 앉아 있는 그녀는 일렁이는 횃불을 바라보면서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나를 죄인 취급하는 이유가 뭐지?’
이곳이 일월문의 본거지는 아니지만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고, 무엇보다 이곳에 왔던 이들치고 멀쩡히 살아나간 사람이 드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곰곰이 자신의 행적을 더듬어 봤지만, 이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보고 싶었다면 다른 경로를 통해도 충분했고, 이곳에 가둘 이유도 없겠지.’
하남에 온 이상 인사를 드리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이런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은 그녀가 원한 바가 아니었다.
끼이익.
강철 문이 열리고 면사를 한 여인과 날카로운 기세를 흘리는 두 명의 무인이 석실로 들어섰다.
“문주님을 뵙습니다.”
무릎을 꿇은 유옥접의 인사에도 여인은 본 척도 하지 않고 그녀를 지나쳐 탁자로 향했다.
“네가 왜 여기 왔는지 아느냐?”
말을 꺼낸 것은 두 명의 무인 중에서 오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턱수염을 길게 기른 찢어진 눈의 노인이었다.
“모르겠습니다.”
“궁내상과는 얼마나 아는 사이냐?”
“이곳에 와서 처음 봤습니다.”
“그를 알고 있었느냐?”
“궁내상. 현재 나이 사십육 세, 서른 중반까지 낭인으로 중원을 떠돌다 현재의 궁가촌을 세움. 무공의 고수로 주목을 받다 더 이상의 진전이 없어 세인들에게 잊힘. 벽을 넘지 못한 것으로 사료되며, 언젠가 그가 벽을 깬다면 백대고수에는 능히 오를 것이며 더 정진한다면 오십대고수의 반열에도 오를 수 있음.”
유옥접이 대답을 마치자 노인이 입을 열었다.
“거기다 추가하자면 현재는 도박과 술, 여자에 빠져 인생을 낭비하고 있고, 궁가촌에서 벌어들이는 거의 모든 수입이 궁내상을 통해 소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몰랐습니다.”
“우리는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무재라 불릴 정도로 뛰어났기에 언젠가는 벽을 넘을 것이라 예상했고, 문에 영입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 그리고 그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천예성이었다. 하지만 그는 임무를 망각하고 궁내상의 의녀인 궁아설에게 빠져 오히려 궁내상을 압박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용납했다.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괜찮다는 생각에서였다.”
“몰랐습니다.”
“그 천예성 당주가 사흘 전 살해되었다.”
그 말에 유옥접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았다.
“정말입니까?”
“몰랐느냐?”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그녀가 대답을 할 때, 면사를 쓴 여인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그곳에 적힌 글귀를 읽어 나갔다.
“정호기. 현재 나이 십구 세. 정운룡이 운영하는 정가장의 장남이자 척혼검의 증사손. 십칠 세에 출도하여 염라도 장거이의 목을 벴고, 십팔 세에 사가장에서 열린 무림대회에서 우승함. 이 기세대로라면 그의 성장을 예측할 수 없음. 맞느냐?”
“예.”
“어떤 인물이지?”
“염라도 장거이를 죽이기 전까지는 장을 나선 적이 없으며, 어린 시절에는 지독한 어리광쟁이였다가 진청운을 만나며 무공에 눈을 떴다 알고 있습니다. 또한 지독하게 배타적이며, 친인과 타인을 구별함에 있어 칼날과도 같은 이기적인 인물입니다.”
“그와 궁내상의 관계는?”
“저와 궁내상이 비무를 하는 모습을 보고 흥미를 가진 것 같습니다. 그는 궁내상의 무공이 세인들에게 알려진 것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조만간 그와 비무를 하려 한다고 말을 한 것으로 보면 일종의 호승심을 느낀 모양입니다.”
“정말이냐?”
“예.”
“단지 비무를 본 것만으로 궁내상의 무위를 꿰뚫어 보다니, 알려진 것보다 더 뛰어난 인물인 모양이군. 사가장에서 그를 따라간 이유는?”
“조만간 세상에 나설 인물이라 판단했고, 그와 같이 있게 되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일월문의 문주가 되는 자격 중, 중원 전체에 알려질 정도의 명성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장막 뒤로 사라지는 것이 일월문의 문주인 것이다.
“이번 여행을 함께하게 된 이유는?”
“그를 사모하는 백수련이라는 여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저와 여행을 떠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녀의 귀에 들어가게끔 말입니다.”
“그가 이전부터 궁내상을 알고 있을 확률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그가 섬서를 떠난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 하남에 온 것도 처음입니다.”
“그의 부모는?”
“모릅니다.”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그의 부모도 이십여 년간 섬서를 떠난 적이 없다. 오로지 장과 자식들을 위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들이지. 그럼 그들과 천예성이 얽힐 가능성은 얼마나 되느냐?”
“없다고 사료됩니다.”
“알았다.”
말을 마친 여인이 손짓을 하자 노인과 중년인이 석실을 나섰고, 그곳엔 유옥접과 그녀만 남게 되었다.
“앉아라.”
유옥접이 자리에 앉자 여인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금 상황이 좋지 않구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말 몰랐느냐?”
“예.”
“휴우… 천 당주가 미약을 거래하려다 그의 친우인 사마진영과 같이 살해당했다. 그것을 흑영이 목격했고, 흉수들 중 하나의 시체까지 확보한 상태다.”
“궁내상입니까?”
“시체의 정체가 궁가촌의 궁의민이었다. 궁아설과 연분이 있다 알려진 자였지. 그리고 현장을 빠져나간 흉수는 덩치가 컸으며, 그가 들어간 곳이 궁내상의 집이었다. 제 딴에는 은밀히 움직였다 생각하겠지만 흑영을 알지 않느냐?”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 속에서 살아온 흑영은 누구도 그 존재를 발견하기 쉽지 않았다.
“어머니.”
유옥접이 여인을 어머니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