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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36화 (37/137)
  • 36화

    깊은 숲 속에 위치한 한 정자의 그늘에 정호기와 궁의민이 몸을 숨긴 채 앉아 있었다.

    정호기는 특유의 대도 대신 흔한 박도를 쥐고 있었고, 그것은 궁의민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이래도 될까요?”

    “어쩌겠습니까? 솔직히 이것이 아니면 놈을 궁지에 몰 방법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궁 소저를 잡고 싶지 않습니까?”

    정호기의 말에 궁의민이 복면을 뒤집어썼다.

    “놈은 사실 상가로 위장하고 있지만, 미약 장사가 주된 수입원입니다. 그것을 끊어 버리면 더 이상 관이나 다른 곳에 뇌물을 줄 수 없을 테고, 미약 대금을 지불하지 못하면 큰 화를 당할 것이니, 더 이상 궁 소저에게 수작을 부리지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관에 밀고를 하면…….”

    “궁 소협께서 말씀하셨듯이 놈은 관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밀고를 한다고 하여도 오히려 우리가 덤터기를 쓰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만일 내키지 않는다면 이대로 돌아가도 됩니다.”

    정호기가 손을 빼려는 듯 말을 하자 궁의민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나저나 어디 간다고 하고 오셨습니까?”

    “제 처지를 모두 알고 있어선지 술병 하나 들고 마을을 나섰더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더군요.”

    “잘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천가 놈에게 우리 정체가 알려지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자, 그럼 이제 놈들이 올 시간이 되었으니 기다리지요.”

    수풀에 숨어 전방을 노려보는 정호기의 눈에 멀리서 반짝이는 물체가 보였다.

    [저 대머리는 뭐야?]

    [하하하, 저의 오랜 친우입니다. 벌써 이십 년을 넘게 함께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같은 날 이곳에서 놈과 만나 회포를 푸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의 하나랍니다.]

    달빛에 반짝이는 대머리를 당당하게 드러내며 다가오는 이는, 천예성의 친우이자 미약을 공급하는 사마진영이었다.

    “저놈이 바로 하남에 은밀히 미약을 공급하는 놈입니다. 저도 천가 놈을 조사하다 간신히 알게 된 사실이지요. 저놈을 죽이고 미약을 뺏는다면 필시 그 여파가 천가 놈에게 미칠 것입니다.”

    정호기의 말에 궁의민이 침을 삼켰다.

    “저들을 죽인다고요?”

    “예. 저들이 이곳에 올라오면 기습을 할 것이니, 이제부터는 어떤 소리도 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대머리가 바로 사마진영이란 자인데, 제가 그를 상대하는 사이 나머지 네 사람을 막아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별 볼 일 없는 자들이니 궁 소협의 실력으로 충분하리라고 봅니다. 그럼 서둘러 사마진영을 처리하고 도와드리겠습니다.”

    긴장되는지 궁의민이 손을 옷에 문질러 땀을 닦았다.

    “저들은 사회의 해충과도 같은 존재들입니다. 미약으로 아녀자들을 희롱하고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이들이지요. 손속에 사정을 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준비를 하는 사이, 사마진영을 비롯한 다섯 사람이 정자로 다가왔다.

    ***

    “문주님, 술이 적을 것 같은데요?”

    “적기는, 이만하면 충분하지.”

    술 두 동이를 양손에 쥔 사마진영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한 모금씩이면 끝날 것 같은데… 뭐 저희가 조금씩 마시면 되겠지요.”

    “응? 무슨 소리냐? 이건 나와 예성이가 마실 술인데, 왜 한 모금씩 먹는단 말이냐? 너희 먹을 것은 따로 준비하라 일렀는데?”

    “예? 못 들었는데요?”

    “그래? 어쩐지 네놈들이 빈손이더라니. 난 단체로 술을 끊은 줄 알았다. 명이에게 말을 전하라 했는데 잊은 모양이구나.”

    사마진영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 사색이 되어 서 있었다.

    “소명아, 우리 잠시 얘기 좀 할까?”

    세 명의 험상궂은 사내가 소명이라 불린 아이를 에워쌀 때, 사마진영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뭣들 하는 짓이냐!”

    서슬 퍼런 사마진영의 호통에 세 남자가 각기 한 번씩 소명에게 주먹을 쥐어 보이고는 다시 발을 놀렸다.

    “쯧쯧, 제 놈들이 신경 안 써 놓고 누굴 탓하는지. 명아, 무겁지 않으냐?”

    “예? 괜, 괜찮습니다, 문주님.”

    사마진영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등에 사각으로 동여맨 짐을 지고 있었는데, 소명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너를 데리고 가는 것은 소당주의 부탁도 있었지만, 너에게 오랜 내 친우를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란다.”

    “저도 어서 뵙고 싶습니다.”

    “그래. 하하하! 너도 만나면 마음에 들 것이다. 그 친구가 무척이나 호탕하거든.”

    누군가가 지금 이들을 본다면 사파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사파라고 해서 항상 누군가를 죽이고 괴롭히려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평상시에는 다른 사람과 별 차이가 없었고, ‘나와 우리’가 아닌 ‘너’라는 존재를 만나면 그들의 성격이 드러났다.

    “자, 얼마 안 남았으니 힘내서 올라가자꾸나.”

    “예.”

    사마진영과 소명이 정자에 다가가자 이곳에 오면 늘 하는 것처럼 이미 짐을 풀어 놓고 정자를 청소하고 있는 사내들이 보였다.

    “어서 오지 못해!”

    한 사내의 호령에 소명이 서둘러 그들에게 다가가더니 빗자루를 들려 했다.

    “넌 가서 이거나 빨아 와.”

    천 조각을 받아 든 소명이 물을 찾아 내려간 사이, 사마진영은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조용하구나.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은 어쩐지 더한 것 같은걸?’

    풀벌레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한 숲이었다.

    산등성을 지나 구분도 힘든 산허리를 훑어 내려오며 막 고개를 돌릴 때, 커다란 암흑이 그를 덮쳤다.

    “헉!”

    경호성과 함께 사마진영이 도를 뽑아 어둠을 막아 갈 때, 뒤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악!”

    세 개의 검에 꼬치 꿰듯 찔린 궁의민의 몸이 잠시 푸덕거리더니 이내 축 늘어졌고, 사마진영을 향해 몸을 날리던 정호기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 지었다.

    그가 원하던 대로 일이 흘러갔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남은 것은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처리해 버리고 기다리는 일이었다.

    “고작 둘이서 내 물건을 노리다니, 나도 참 얕보였구나. 내 네놈들의 뒤를 캐서 다시는 어떤 놈들도 이따위 짓을 하지 못하게 하겠다! 뭣들 하느냐! 이놈은 꼭 사로잡도록 해라!”

    “예!”

    사마진영의 명을 받은 세 명의 사내가 각기 검을 움켜쥐고 정호기에게 다가왔는데, 마침 그때 냇가에 갔던 소명도 올라왔다.

    “됐다. 넌 이쪽으로 오너라.”

    검을 뽑아 들고 달려 나가려는 것을 사마진영이 막더니 자신의 옆으로 불렀다.

    세 명의 사내는 합공을 하는 데 있어 능숙한 이들이었는데 자칫 소명이 끼어들어 그들의 움직임을 방해할 것 같았기 때문인 것도 있고, 사실 소명의 실력은 아직 싸움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켜 보거라. 저놈들이 할 때는 하는 놈들이거든.”

    사마진영의 말에 소명이 눈을 크게 뜨고 전장을 바라보았다.

    쩡!

    불꽃이 어둠을 수놓으면서 검이 튕겨 나갔고, 붉은 선혈이 공중을 유영했다.

    서걱!

    대각으로 잘린 사내의 몸이 무너질 때, 대지에 홍화가 만발했다.

    믿었던 수하들이 너무도 허망하게 무너지자 사마진영은 이 싸움이 쉽지 않을 것이란 것을 예감했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뒤로 물러나 있어라.”

    마지막 남은 사내의 배에 도를 찔러 넣은 정호기의 눈빛을 보면서 사마진영은 소명을 뒤로 물리고 앞으로 한발 나섰다.

    “어디서 보낸 놈이냐?”

    쉭!

    사마진영의 물음에 돌아온 것은 빠르게 찔러 오는 도였고, 그 도가 노리는 것은 사마진영의 입이었다.

    “감히!”

    문답무용.

    주둥이 나불대지 말라는 뜻이 담긴 한 수였고, 사마진영은 그것을 읽었기에 수하를 잃은 분노에 기름이 끼얹어졌다.

    검이 채찍으로 보일 정도로 빠르게 휘둘러지며 정호기를 공격했다.

    상에서 하로, 좌에서 우로.

    계속해서 검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며 압박했지만, 정호기에게 어떠한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치잉! 치잉! 치잉!

    정호기의 도는 검신을 미끄러지며 궤도를 벗어나게 하여 몸에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았고, 그것을 확인한 사마진영의 전신은 땀으로 물들었다.

    ‘고수다!’

    절대 자신의 실력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마진영은 단순히 미약을 노린 강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를 노린 건가? 아니, 어쩌면 진영이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명아, 북쪽으로 도망쳐라! 가서, 예성이를 오지 못하게 해!

    급하게 전음을 펼치느라 팔에 상처를 입었지만 사마진영은 만족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친우와 수하를 구하고 죽고 싶었기 때문이다.

    상처 입은 팔에서 뿜어져 나온 선혈이 흩날릴 정도로 강하게 정호기를 압박하는 사마진영은, 최소한 소명이 도망칠 기회라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쩡! 쩡!

    단 두 번의 부딪침으로 검의 움직임이 멎었고, 들고 있던 도를 도망치는 소명을 향해 던진 정호기의 주먹이 사마진영의 복부를 강타했다.

    “큭!”

    내장이 다 터질 것 같은 충격에 사마진영이 허리를 숙이며 검을 놓쳤는데, 그런 그의 턱을 정호기가 무릎으로 쳐올렸다.

    이빨 조각이 핏물과 함께 뿌려지면서 들린 목에 정호기의 손날이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콰직!

    목뼈가 바스러지며 사마진영의 숨도 함께 멎었다.

    ‘오는군.’

    소명의 등에 박힌 도를 뽑는 정호기의 눈에 멀리서 달려오는 십여 명의 사람이 보였는데, 분명 천예성의 일행일 것이었다.

    ‘문제는 어디 숨어 있느냐인데…….’

    천예성에겐 세 명의 중요한 인물이 있었으니, 궁아설과 사마진영, 그리고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흑영이었다.

    ‘하긴 상관없나? 어차피 놈들이 볼 것은 궁의민의 시체일 테니까.’

    천예성을 죽이는 것만 생각한다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가 일월문의 후계 다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정호기의 정체가 드러나면 곤란할 일이 많은 것이다.

    ‘궁내상의 덩치가 커서 다행이군. 아니었다면 축골공을 펼쳐야 했을 테니까.’

    축골공으로 몸을 작게 만들면 기의 흐름도 원활치 않고 평소와는 다른 거리감으로 인해 실수할 확률도 높았기에, 그런 상태로 싸운다는 것은 커다란 짐을 지고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면에서 정호기와 궁내상은 덩치가 비슷해서 언뜻 보면 모를 정도였기에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쉬는 천예성의 눈에 분노와 함께 살기가 감돌았는데,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사마진영의 시신을 봤기 때문이었다.

    어둠을 타고 전해진 쇳소리에 불안한 마음으로 달려왔건만,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천예성이 분노에 몸을 떨 때, 그를 따라 달려온 이들이 둥글게 정호기를 포위하며 검을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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