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돌아서서 걷는 여인을 향해 뛰쳐나가려던 유옥접의 팔을 정호기가 붙들었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가만히 계십시오. 만일 따르지 않겠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각자 행동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쳇!”
정호기의 전음에 유옥접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 * *
“아버지께서 허풍이 심하시고 으스대는 걸 좋아하셔서 그렇지, 나쁜 분은 아니랍니다.”
“혹시 그 상처들은 마음 상하게 하신 분들의 분을 풀어드리고자 일부러 얻은 것들이 아닌지요?”
정호기의 물음에 여인, 궁효진이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렇지요. 알아차리신 분은 정 공자님이 처음이시네요.”
궁효진의 말을 들으며 유옥접은 비무를 하면서 느꼈던 이상함을 확인했다.
‘역시 고수였어.’
“흥, 고수를 몰라보고 덤빈 내가 바보였군요.”
“고수라니요. 제가 실력이 없어서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마침 들어오던 궁내상이 유옥접의 말을 받았다.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 어찌 일부러 상처를 입겠습니까? 진이가 뭘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너는 객쩍은 소리는 그만하고 가서 술상이나 봐 오너라. 어서.”
“핏, 알았어요.”
***
“허허허, 이 마을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전부 제 자식들입니다. 궁가촌이란 것도 제 성을 따서 지은 것이지요.”
궁내상은 낭인으로 떠돌던 시절 한 아이를 맡으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고 했다.
그 아이를 필두로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와 기르다 보니 어느새 하나의 촌락을 구성하게 되었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겁니다.”
표독스럽던 유옥접의 눈매가 어느새 부드러워졌는데, 단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궁내상의 넋두리를 듣던 정호기가 잠시 바람을 쐰다며 밖으로 나왔다.
‘웃기는군.’
성인군자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비굴하고 이중적인 모습을 알기에, 정호기는 궁내상의 말을 더 들어줄 수가 없어서 그 자리를 빠져나온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까?’
집을 나서자 여기저기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들이 보였다.
이십여 호의 궁가촌은 대부분의 인물들이 약관 전후였으며, 그들 모두가 궁내상의 자식들이었다.
“응애~ 응애~”
멀리서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에 정호기는 혀를 찼다.
‘겉으로는 이렇듯 평화로워 보이는 곳이지만, 실상을 알고 나면 구정물보다 못한 곳이지.’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을을 돌아다닐 때, 그의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너를 보내려고 하지만 난 결코 그걸 허락할 수 없어!”
“쉿! 미쳤어? 조용히 해. 그리고 아빠는 네 허락 같은 거 필요치 않으실걸?”
“왜! 왜 널 보내는 건데!”
남자가 다시 소리를 지르자 여인이 그를 말렸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그냥 갈 거야. 아무튼 이미 결정이 난 일이야. 마을을 위해서라고.”
“네 의사는? 우리 감정은 어떻게 되는 건데?”
“마을이 우선이야.”
“뭐가 마을이 우선이란 말이야? 모두들 답답한 소리만 하고. 아버지께 세뇌되어 자신의 의사는 포기한 채 마을의 귀신이 되려 하고 있어!”
“민이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아버지께서 거둬 주지 않았으면 너나 나나 죽을 목숨이었다는 걸 잊은 거야?”
“그 대가로 겨울이고 여름이고 쉬지 않고 일을 해서 아버지 술값을 대 드리고 도박 빚을 갚아 드렸잖아. 이제는 그런 희생을 하기 싫어. 설아야, 우리 마을을 떠나자. 내가 어떻게든 널 행복하게 해 줄게.”
“싫다고 했지?”
“그럼 정말 천예성 그놈에게 가겠다는 말이야? 그 색마에게?”
“그래야 마을이 안전해.”
“아버지의 빚을 네가 갚을 필요는 없어!”
“아니, 난 갚을 의무가 있어. 내 목숨을 구해 주시고 지금까지 거둬 주셨으니까. 그리고 동생들을 위해서라도 가야만 해.”
골목에서 후다닥 뛰어나오던 여인이 정호기를 보고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는데, 그녀를 본 정호기도 속으로 깜짝 놀랐다.
[대장님이 우리 둘째 이름을 지어 주세요.]
늦둥이를 얻고 행복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차를 권하던 여인.
천예성의 부인이었던 궁아설이 분명했다.
“늪이야… 이 궁가촌은 우리에게 있어 늪이란 말이야. 우리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어. 크흑…….”
“저기…….”
정호기가 말을 걸자 청년이 눈물을 닦으며 서둘러 멀어지려 했다.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습니다만, 혹시 그 천예성이란 놈이 풍운장의 천예성입니까?”
정호기의 말에 청년이 고개를 돌렸는데, 말하는 것으로 봐서 천예성에게 감정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도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아니라면 됐습니다.”
정호기가 몸을 돌리자 청년이 붙잡았다.
“맞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 죽일 놈이 아직도 그 버릇을 못 버린 모양입니다. 동병상련이라… 술이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
“왜 더 있겠다는 거지요?”
굳이 빈방을 찾아 며칠 묵겠다는 정호기에게 유옥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오히려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왜 그러는 것입니까?”
“질투라도 하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물론 좋은 사람이란 건 인정하지만, 제 취향은 아니에요. 사람은 모름지기 야망이 있어야죠. 현실에 안주하며 성을 쌓아 지키려고만 하는 것은 패배자나 할 일이에요.”
‘그렇지, 넌 그런 남자를 좋아했지.’
“이것도 인연인데, 이 기회에 알아 두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해서 친분을 쌓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호기의 말을 들은 유옥접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제가 알고 있던 정 공자가 맞는지 해서요. 어째서 궁 대협께 그렇게 관심이 많은 것이지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누구보다 여자를 좋아하니까.”
유옥접의 눈초리가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덩치 큰 사람이 눈치 없다는 말은 다 헛소리라는 것을 정 공자가 몸소 보여 주시는군요.”
“아무튼 그렇게 아시고 푹 쉬십시오.”
유옥접을 뒤로하고 정호기가 향한 곳은 궁가촌의 뒷산이었다.
“오셨습니까?”
“예.”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까 여인과 싸웠던 궁의민이었는데, 오 척이 조금 넘는 단구에 검게 그을린 피부를 가진, 약관을 넘겼을 법한 청년이었다.
“정말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자, 일단 한 잔 하시지요.”
미리 준비한 술병을 건네자 궁의민이 그것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들이켰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떻게 하면 설아를 얻을 수 있죠?”
“먼저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궁 소저도 당신을 좋아하는 것이 맞습니까?”
“물론입니다. 아버지의 도박 빚을 갚으려고 억지로 천가 놈에게 가는 것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천예성이 궁 소저를 노리는 것은 확실합니까? 혹시 다른 것을 노리고 궁소저를 핑계로 압박을 가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걸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설아가 빼어난 미모는 아니니까요. 필시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겁니다.”
[하하하하! 대장님, 제 아내 예쁘지 않습니까? 얼굴보다 마음이 더 예쁜 사람이지요. 제 일생의 복입니다.]
다른 꿍꿍이는 없었다. 천예성은 궁아설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궁아설은 천예성의 잘생긴 얼굴과 그가 가진 재산에 이끌렸을 뿐.
물론 그녀의 말대로 아버지인 궁내상을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정호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밝혔겠지.’
정호기는 죽을 때까지도 궁내상이 궁아설의 의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물론 그녀를 만난 것은 더 후의 일이지만, 한 번도 궁내상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이후로 본 적이 없구나.’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과 마령대(魔靈隊)를 안내한 모습이 정호기가 궁내상을 본 마지막이었다.
‘뭐, 무슨 사연이 있었든지 간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고, 중요한 것은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계획대로 된다면 이곳은 풍비박산이 날 것이고, 그 와중에 천예성은 목숨을 잃게 될 것이었다.
‘궁내상, 너의 정체도 밝혀지겠지.’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인생을 던진 마음씨 좋은 은퇴한 낭인이 아닌, 도박 중독자에 술꾼이자 더 이상 일을 하기 싫은 게으른 인물이 바로 궁내상이었는데, 처음엔 순수한 의도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이 사십 대 중반, 벽에 막힌 것은 언제일까?’
궁내상은 추의 경지에 둘러싸여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벽이 변하게 했을지도.’
절망이 궁내상을 군자에서 망나니로 끌어내린 것일지도 몰랐다.
“정 소협?”
“아, 예? 무슨 말씀을 하셨죠?”
“도대체 어떤 방법인지 여쭤 봤습니다.”
“간단합니다. 빚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니 그것을 없애면 궁 소저도 천예성에게 갈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천가 놈의 풍운장은 일대의 사파들과도 친분이 깊고, 또한 정파는 물론이고 관에도 줄을 대고 있습니다. 섣불리 건드릴 인물이 아니란 말입니다.”
“가능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나저나 보아하니 무공을 익히신 듯한데, 맞습니까?”
“예? 어찌 아셨습니까?”
“기세가 심상치 않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내세울 정도는 아닙니다.”
“궁 대협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까?”
“예.”
‘이놈뿐만이 아니야. 마을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무공을 배운 흔적이 있었어. 촌락이 아니라 하나의 무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오 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께서는 열정적으로 저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변하셔서는 도박과 술에 빠져 지내게 되셨지요.”
‘그때였군, 벽을 만난 것이.’
무공을 익힘에 있어 가장 위험한 것이 주화입마와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한 관문인 벽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 벽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했기에 ‘정한벽’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부수고 나아가든 기어올라 넘어가든 그것을 통과한 이들이 진정한 고수가 되었고, 그러지 못한 이들은 폐인이 되거나 안주하는 그저 그런 무인이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천예성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전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견원쌍귀란 놈들과 싸우는 것을 봤는데, 움직임이 아예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음… 그렇다면 일단 궁 소협이 직접 나서는 것은 문제가 있겠군요. 그럼 다른 쪽으로 공략을 해야겠습니다.”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쓰실 겁니까?”
“혼자서는 용기가 나지 않아 하지 못한 것이지만, 궁 소협이 도와주신다면 그놈을 혼내 주고 궁 소저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