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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34화 (35/137)

34화

객점의 뒤뜰에서 때아닌 비무가 일어날 판이었고, 주위에는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어, 장 포쾌 아저씨다.”

한 아이가 관복을 입은 장한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명이 아니냐? 이런 곳에서 무얼 하는 게냐? 어서 들어가거라.”

“에이, 제가 뭐 어린앤 줄 아세요? 저는 장차 무공을 배워 장수가 될 거니까 이런 구경도 좋은 공부가 된다고요.”

“장수라… 좋구나.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네가 늘 동경하던 황제 폐하를 뵙는 것은 쉽지 않겠는데?”

“예? 왜요? 공을 세우면 되잖아요.”

“쯧쯧! 무공을 익히면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을 죽이기 쉽지. 그런 무인들을 황제폐하께서 가까이하겠느냐? 무공을 익힌 이는 황제폐하의 허가를 받은 이나, 신임을 얻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곁에 갈 수 없단다. 만일 그것을 속이고 황제폐하의 곁에 갔다가는 삼족을 멸하지. 그렇기에 관직이 높을수록 무공을 익힌 이들이 없으며, 출세하고자 하는 이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는단다. 전장에서 공을 세운다고 해도 그 사람이 신원이 확실하거나 확고한 믿음을 얻은 사람이 아니라면 십 장 너머에서 하사하는 술을 받는 것이 전부란다.”

“진짜요?”

“그래. 만일 너처럼 신분이 낮은 상태에서 공을 세워 높은 벼슬을 받는다고 해도 황제폐하를 뵙기란 요원한 일이지.”

“황궁엔 뛰어난 무공하고 영약이 많다면서요. 황제폐하께서 천하제일인이 되시면 되잖아요.”

“폐하께서도 무공을 익히시긴 하지만 심취하진 않으신단다. 물론 예전엔 그런 분도 계셨지만 드문 경우였지. 아무튼 그런 연유로 관직이 낮을수록 고수가 많고 무공이 높을수록 황성이나 권력에서 멀어지니, 자연 고관들은 무공을 천시하게 되었단다. 자, 그 얘긴 그만하고, 이제 시작하려는 모양이니 구경이나 하자꾸나.”

***

자신의 앞에서 구환도를 짤랑거리는 장한을 보며 유옥접은 양손에 륜을 들었다.

“나서지 마세요.”

“예.”

유옥접이 말을 하지 않아도 정호기는 애초부터 나설 생각이 없었는데, 그것은 구환도를 든 장한이 누군지 알기 때문이었다.

백전불승 궁내상.

얼기설기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와 온몸을 가득 메운 상처들로 인해 험악한 인상이었는데, 덩치도 커서 거의 정호기와 비슷할 정도였다.

[헤헤헤, 이쪽입니다.]

그날의 비굴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네놈은 지금처럼 당당할 자격도 없는 놈이야. 그때의 그 모습이야말로 너에게 어울리는 것이었지.’

정호기가 생각에 잠겼을 때, 궁내상과 유옥접은 이미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감히 이 몸을 비웃다니!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사과한다면 용서해 주겠다.”

“닥쳐.”

궁내상의 너그러운 제안에 유옥접이 짧게 응수했다.

“계집과 손을 섞는 부끄러운…….”

“덤벼.”

“흥!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일도벽천 궁내상 님이 어찌 선공을 한단 말이냐. 선수를 양보하겠다.”

말은 아주 그럴싸했다.

거기다 일도에 하늘을 가르다니.

일도벽천이라는 별호를 누가 지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대목이었지만, 유옥접은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좋아.”

말이 끝날 때 유옥접의 신형은 땅에 낮게 깔리며 이미 궁내상의 면전에 도달해 있었고, 그녀의 륜이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하압!”

궁내상의 구환도가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유옥접의 머리를 향해 휘둘러졌는데, 이는 양패구상을 노리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강단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치졸한 수법이었다.

목숨을 건 생사결도 아니고 단순히 기분이 상해 벌이는 비무에서 상대의 목숨을 담보로 우위를 점하려는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캉!

구환도가 다른 손에 있는 륜에 막히고 여전히 옆구리가 위험해지자 궁내상이 도를 지지대 삼아 공중제비를 돌더니 유옥접의 후위로 내려섰다.

순식간에 뒤를 점한 것이다.

‘호오, 괜찮은 임기응변이군.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마치 그것을 노리고 휘둘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역시 무공은 뛰어난 놈이야.’

정호기가 그런 생각을 할 때 궁내상은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에도 공격을 하지 않고 구경하는 여인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허를 찔려 당황한 표정으로 재빠르게 몸을 돌린 유옥접의 행동이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큰일 나겠군.’

안 그래도 차가워 보이는 유옥접의 얼굴에 서리가 내렸다.

“뒤다!”

사람들이 소리친 것은 유옥접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이 궁내상의 뒤에 나타나자 마치 대단한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쩡!

도와 륜이 만나면서 불꽃이 튀었는데, 순식간에 몸을 돌리면서 도로 유옥접을 공격한 궁내상의 일격은 그녀의 다음 행동을 막음과 동시에 오히려 우위를 점하게 했다.

훙! 훙! 훙!

공기가 파도를 치며 사람들에게 밀려들었고, 그것을 맞으며 정호기는 그 속에 숨어 있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하하하! 아주 발광을 하는군그래.”

“저게 뭐하는 짓거리래? 저래 갖고 얼마나 버티겠어?”

모르는 이들이 보면 궁내상의 행동이 그리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정호기는 방위와 힘을 계산해 유옥접이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그의 움직임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사선으로 내려오던 구환도가 살짝 떨림을 보이는 것 같더니 찔러 오는 유옥접의 륜을 향해 움직였는데, 상승의 묘리인 추(追)의 개념을 보인 것이다.

더 나아간다면 상대의 무기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하는 도(導)의 경지를 깨달을 수도 있었다.

‘지금의 유옥접으로는 무리인가?’

정호기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궁내상이 힘이 떨어진 듯 도의 속도가 느려진 틈을 타서 유옥접이 재빠르게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으윽!”

신음과 함께 궁내상의 옆구리가 붉게 물들며 비무의 종말을 고했다.

“음… 제 패배를 인정합니다. 이제 소저께서 저를 도발하신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한 발 물러선 궁내상이 옆구리에 손을 대고 유옥접을 바라보았다.

“열호아 정 소협과 싸웠던 한 사람으로서 의당 나섰을 뿐이에요.”

그녀의 말에 주위가 술렁였는데, 정호기와 싸웠던 이들 중에서 여인은 유옥접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유 소저이십니까?”

“맞아요.”

궁내상이 유옥접의 륜과 얼굴을 살피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소리쳤다.

“화심(火心) 유옥접이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말에 유옥접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지만, 이미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누가 말을 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화심?’

불같은 마음이라는 뜻인데 당최 뭔 소린지 몰랐기에 정호기와 유옥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그때, 궁내상이 고개를 갸웃했다.

“허허, 불같은 마음이라. 참으로 어울리는 별호구려. 듣자 하니 뜨거운 연정을 참지 못하고 정 소협을 따라갔다고 하더니…….”

말을 하면서 묘한 눈으로 정호기를 바라보는 궁내상의 눈길은 어쩐지 음흉스러워 보였다.

“제가 그 미천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소문이 잘못된 모양인데, 유 소저는 장에 얽매인 사람도 아니고 또한 저와 약속된 사이도 아닙니다. 우정을 나누는 친구 사이라고나 할까요?”

정호기의 말이 끝날 무렵 군중 사이에서 빈정거리는 말이 들렸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어? 배꼽 친구라면 몰라도…….”

배꼽 친구란 배꼽끼리 마주치는 사이란 말로, 문란한 연인들을 낮춰 부르는 말이었다.

“무공에 대해서 불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는 유 소저를 화심이라 표현하신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 같습니다.”

“정 소협이 그리 말한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그건 그렇고, 아까 제가 실례된 말을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무시하는 발언을 했으니 민망하긴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머리끝까지 열이 뻗친 유옥접이었다.

“누구야!”

싸늘한 그녀의 눈길에 몇몇 이들이 슬며시 고개를 돌리거나 숙였다.

“도대체 어떤 개자식이 화심이라고 나불댄 거야!”

유옥접은 별호가 없었는데, 자칫하면 화심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마누라가 오늘은 꼭 일찍 들어오라고 했는데…….”

“어이쿠, 나도 우리 아들이 당과 사 오라는 것을 깜빡했네.”

순식간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오직 정호기와 유옥접, 궁내상만 남았다.

“허험, 험! 죄송하게 됐습니다.”

유옥접의 날카로운 눈길에 궁내상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화심이란 외침에 맞장구를 치며 말을 한 죄가 있었으니까.

“허허허, 오늘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몇이라고 소저의 별호가 화심으로 굳어지겠습니까? 노여움을 푸시지요.”

“흥!”

유옥접이 코웃음을 칠 때, 정호기가 궁내상에게 다가갔다.

“저도 아직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술을 한 잔 사 주신다면 용서해 드리지요.”

“허허허, 한 잔쯤이야 못 사 드리겠습니까? 자, 가시지요.”

앞장서 걷는 궁내상의 뒤를 따르려는 정호기의 옷소매를 유옥접이 붙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네?”

“정소협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처음 보는데요?”

심지어 정가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정호기와 말을 섞은 이들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니 생판 처음 보는 사람과 술까지 마시려는 정호기의 행동이 의아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화통한 남자들끼리는 통하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흥!

* * *

“시간이 늦었으니 제 집으로 가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차피 궁내상을 이용해 천예성을 처리할 생각이었으니, 그의 집으로 간다면 불감청 고소원이었다.

‘일이 풀리려니 이렇게 되는군.’

어떻게 궁내상과 인연을 만들까 하고 고민했던 것이 쓸모없게 된 순간이었다.

‘철저하게 이놈의 이름을 내세우고 나를 숨겨야 한다. 벌써 그들에게 주목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정호기가 이런 다짐과 함께 궁내상을 따라 도착한 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었다.

“아버지! 어쩌다 다치신 거예요!”

어귀에 궁내상이 나타나자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또 되지도 않는 허풍 떠시다가 비무라도 하신 거예요?”

“어험, 험! 그 무슨 소리냐. 이건 어려움에 처한 어린아이를 도와주다가 다친 거다.”

“퍽이나 그렇겠네요. 어서 명이에게 가서 치료받으세요. 손님은 제가 모실 테니까.”

“그리해 주겠느냐? 알았다. 내 냉큼 치료받고 오마.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다녀오십시오.”

뛰어가는 궁내상의 뒷모습을 보면서 여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지께서 두 분께 실례라도 하지 않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실례…….”

정호기가 대답을 하려고 할 때, 유옥접이 말을 끊었다.

“대단한 실례를 했지요. 옆구리의 상처를 만든 것이 바로 저니까요.”

“예?”

유옥접의 말을 들은 여인이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아버지께서 취향이 바뀌셨나?”

무심코 말한 내용에 유옥접이 발끈했다.

“뭐라고요?”

“아, 아니에요.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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