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내가 언제 들킨 적 있던가?”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사내는 이제 삼십 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상이었지만 안대로 인해 조금은 사나워 보였다.
“어, 없습지요.”
[이 개새끼야, 거기 안 서! 눈깔을 확 뽑아 버릴 테다!]
삼 년 전에 쫓겨 도망간 후 갑자기 애꾸가 되어 돌아온 그는 나뭇가지에 찔렸노라고 말을 했지만, 점소이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물론 그때 나까지 팔지 않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덩치 큰 그놈 한 성질 하게 생겼던데. 거기다 그년도 만만치 않아 보였었고.’
유옥접의 허리춤에 매달린 한 쌍의 륜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에라, 모르겠다. 장님이 되면 이놈 팔자인 게지.’
“그럼 그곳으로 모시겠습니다.”
“흐흐흐, 고마워.”
사내가 자리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령아가 돌아왔다.
“아, 령아야.”
“예?”
“아까 그 손님 팔 호실로 옮겨 드려라. 내가 깜빡하고 그 손님이 계신 곳과 옆방을 예약 받은 것을 잊었구나. 죄송하다 말씀드리고.”
“네.”
령아가 뛰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애꾸눈 사내는 입맛을 다셨고, 점소이는 혀를 찼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장님이나 돼 버려라. 이거야 어디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팔 호실에는 목욕을 할 수 있는 방이 따로 있었는데, 그곳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물론 그것을 만든 것은 점소이였고, 훔쳐보던 장면을 애꾸에게 들킨 후에 이런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
“오랜만이군.”
천추산을 찾은 정호기는 그날의 비명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것 같았다.
“천혜의 요새라…….”
조해와 함께 행방을 감춘 정파의 명숙들을 쫓은 지 반 년 만에 이곳에 숨을 것을 알았고, 막대한 희생과 함께 그들을 모두 죽일 수 있었다.
“이쯤일 텐데…….”
정호기 자신도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했었기에 진청운에게 정확한 설명을 하지 못했고, 때문에 진청운이 이곳에서 헤맸던 것이다.
몇 개의 계곡을 살피다 눈에 익은 곳을 발견했고, 계곡 깊숙이 더 내려가자 햇볕도 들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곳에 교묘하게 감춰진 길이 보였다.
사람 두어 명이 어깨를 마주하고 걸으면 꽉 찰 정도의 소로였고, 구불구불한 오르막인 그곳을 통과하니 탁 트인 전경이 정호기의 눈에 들어왔다.
뒤는 좁은 소로였고, 위와 아래는 절벽이었으며, 주변에 울창한 나무가 그 시야를 가려 주는 십여 장의 평지.
움푹 들어간 곳인 데다 절벽에 솟은 나무들 때문에 위에서 바라보아도 보이지 않았기에, 소로를 통하지 않고는 이런 곳이 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진청운이 묻어 줬나 보군.”
나무로 형태를 짓고 흙으로 틈을 메운 두 채의 작은 집이 있고, 그 옆에 네 개의 봉분이 있었다.
두 채의 집 중에서 한 채는 완전히 소각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나머지 하나는 타다 말았는지 검게 그을린 것이 전부였다.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 안은 난장판이었고, 여기저기 붉은 얼룩들이 눈에 띄었는데, 아마도 핏자국 같았다.
“이만하면 충분하겠다.”
집 안에 있던 자질구레한 것들을 모두 버린 후에 계곡에 흐르는 물을 길어 와 청소를 한 정호기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 필요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 정도면 되겠지.”
도피처.
흑룡문과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가족들을 이곳으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장관이구나.”
때마침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탄성을 발했는데, 봉우리들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시시각각 변하는 천추산의 모습이 혼란스러운 그의 마음을 조금은 달래 주었다.
‘나는 누구인가? 혈신인가, 열호아인가?’
백여 년을 사파의 일인자로 살아온 혈신의 그림자는 아직도 짙게 드리워져 정호기를 감싸고 있었기에, 과거는 버릴 수 있었지만 그 속에서 형성된 사고방식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이래서야 내가 경멸하던 정파의 위선자와 무엇이 다른가?’
지금까지 그를 괴롭힌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정파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는 있지만,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커먼 구정물과도 같은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역겨움을 느꼈었다.
‘생각을 정리할 좋은 기회구나.’
가부좌를 튼 정호기가 햇살에 몸을 맡기며 심연 속으로 정신을 이끌었다.
***
“누굽니까?”
객점으로 돌아온 정호기는 유옥접의 옆에 서 있는 애꾸 사내를 가리키며 물었다.
“제 물주예요. 돈줄을 쥐고 있는 분이 열흘이나 소식도 없이 사라지셨으니 다른 물주를 알아봐야 하지 않겠어요?”
남아 있는 한쪽 눈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고, 얼굴도 상당히 부은 상태였다.
“그분과 같이 가신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정 소협이 오셨으니 이젠 필요 없지요.”
말을 마친 유옥접이 애꾸 사내를 바라보더니 손에 들고 있는 젓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정호기의 등장에 안 그래도 잔뜩 긴장해 있던 애꾸 사내가 유옥접의 행동에 납작 엎드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는데, 하나 남은 눈을 거의 잃을 뻔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금 출발할 생각이오.”
정호기의 말에 유옥접이 서둘러 방으로 가더니 행낭을 챙겨 돌아왔는데, 그때까지도 애꾸 사내는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명심해. 다음에 또 걸리면 그때는 진짜 눈알을 확 뽑아 버릴 테니까.”
말을 하면서 탁자 위에 놓인 젓가락을 집어 들더니 애꾸 사내를 향해 던졌는데, 애꾸 사내의 머리 바로 앞에 깊숙이 꽂혔다.
“예, 예, 감사합니다. 절대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맹세합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애꾸 사내를 보면서 정호기가 고개를 저었는데, 절대 바뀌지 않는 인간이란 것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젊고 행색이 깔끔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저놈은 뭐야?]
[버러지 같은 놈입니다. 여자 알몸을 훔쳐보다 두 눈을 잃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 물 끼얹는 소리를 엿듣다 귀까지 잘렸는데, 얼마 전에는 한쪽 고막까지 뚫렸다고 하더군요.]
거지꼴을 하고는 뭐가 그리 좋은지 히죽거리며 걷고 있는 남자를 보며 묻자 그를 안내하던 이가 한 대답이었다.
‘인간이기에 변할 수 있다면, 인간이기에 변할 수 없는 것도 있는 거겠지.’
욕망이라는 괴물에 잡아먹힌 인간의 말로가 그러하리라.
‘문제는 이놈이 아니라 그놈이지.’
애꾸 사내와 함께 떠오른 남자, 천예성에게로 생각의 방향이 바뀌었다.
이번 여행을 떠난 목적 중의 하나가 바로 그를 제거하는 것이었으니까.
하남과 섬서를 잇는 경계에서 마중마 연성 계획을 마치고 나온 정호기 등을 안내했던 사람이었고, 후에 가서는 숨어 있는 정파인들을 찾는 데 귀신같은 솜씨를 발휘해 흑룡문의 정보를 책임지고 있는 세풍당의 부당주까지 올랐었다.
[대장님, 정상을 노리십시오. 성심성의껏 대장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정호기의 눈이 유옥접에게로 향했는데, 그녀가 죽은 뒤 그녀가 속한 문파인 일월문을 접수한 이가 바로 천예성이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정보를 빠르게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네 능력을 알기에 죽일 수밖에 없구나.’
자신과 유옥접을 이어 준 것도 그였으니, 이미 그녀가 문주에 오르기 전부터 흑룡문과 내통을 하고 있었다고 봐야 했다.
‘일월문이 흑룡문과 연수하면 귀찮으니까.’
일월문.
일월문은 기루에 있는 여자들이 만든 단체로, 그녀들의 뒤를 봐주는 남자를 일(日), 여자들을 월(月)이라 칭하여 둘이 모여 하나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여자를 지배하려 들었고, 기녀들은 자신들이 낳은 여자아이들을 따로 가르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했다.
중원에 산재해 있는 기루 중에서 어떤 곳이 일월문 소속인지는 오직 문주만이 알고 있고, 그것이 곧 힘이었기에 아직까지는 여자들이 일월문을 지배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문제는 기녀들이 딸만 낳지 않고 아들도 낳는다는 것에 있었다.
그 아들들이 새롭게 부상하면서 문주의 지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중이었는데, 유옥접은 그들과 경쟁하는 여인들 중의 하나였다.
‘그놈을 죽이기 위해서 이용할 인물이 하나 있지.’
“왜 그러세요?”
빤히 바라보는 정호기의 눈길이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 가시지요.”
“어디로 가실 건데요?”
“소림입니다.”
하남에 왔으면 소림에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정확히는 소림이 자리한 숭산이지. 물론 그것은 예성이 놈을 처리한 후가 되겠지만.’
숭산의 아래에 있는 등봉현이 최종 목적지였고, 소림은 그 중간에 있기에 들르는 것뿐이었다.
***
사건의 시작은 아주 간단했다.
객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와중에 옆에서 들려온 말이 불씨가 되었으니까.
“흥! 이제는 개나 소나 다 대도(大刀)를 들고 다니는군. 열호아란 놈이 뜨니까 지 놈들도 대도를 들면 뭐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 모양이지?”
현재 정호기의 이름은 섬서를 넘어 호북과 하남, 산서로 퍼지고 있었다.
사가장의 무림대회에서 사준우를 꺾으며 우승한 것도 한몫했지만, 그 이후로 찾아오는 이들을 모두 이긴 것이 더 큰 역할을 했다.
그것의 영향인지 능력이 되지 않으면서 대도를 휴대하는 이들이 나타났는데, 가끔은 메고 다니는 것도 힘든지 헉헉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튼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수준이었지만, 사내의 호기는 도를 넘었다.
“흥! 이제 약관도 안 된 놈에게 나가떨어지다니, 분명 이번 사가장의 무림대회는 질이 떨어지는 놈들만 출전했을 거야. 자고로 실력도 없는 것들은 아예 출전 기회도 주지 말아야 하는데, 쯧쯧. 내가 시간이 없어서 나가지 못했지만, 나갔다면 틀림없이 우승했을 거다.”
자고로 남자의 허영은 문제를 부르는 법.
객점 내부에 여인들이 몇 있었는데, 그녀들의 관심을 끌고자 궁내상이 무리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정호기를 깎아내리는 것으로 끝났다면 다툼이 없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에게 진 사람들을 무시하는 듯한 내용이 유옥접을 건드린 것이 문제였다.
“정 공자님, 쥐뿔도 없으면서 주둥아리만 나불대는 인간들을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바로 윤옥(閏剭)이라고 한답니다. 가끔 오는 윤달에 목을 벤다니 자기 목숨이 많이 남은 줄 알지만, 죽을 날 받아 놓은 것을 모르고 천방지축 까부는 꼴이죠.”
“뭣이!”
자신을 비꼬는 것을 알아들었는지 궁내상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감히 어디다 대고 그 따위 소리를 하는 것이냐!”
“너.”
유옥접의 대꾸는 깔끔했다.
“이……!”
분기탱천한 궁내상이 유옥접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