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어떻습니까?”
정운룡의 물음에 천수신의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금제 같은 것은 없었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피고 침술로 내부까지 조사했지만, 이상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네.”
천수신의의 말에 진청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수신의가 걱정한 것은 그 양 사부라는 인물이 혹시나 어떤 사술을 이용해 정호기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저도 그동안 호기를 보면서 딱히 자신의 의지와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좀 이기적인 면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물론 그것을 확인한 것도 기쁘긴 하지만,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틈틈이, 그것도 가뭄에 콩 나듯 드나들며 가르쳐 호기와 같은 실력을 가지게 만들 수 있다면, 왜 굳이 힘들게 흑룡문의 동향 같은 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일세. 그것 때문에 노야란 존재가 의심스러웠던 것이고.”
맞는 말이었다.
그동안 차라리 제자들을 모아 열심히 가르치는 것이 더 나으리라.
사가장의 태상가주인 사비연이 정호기의 무공을 인정하는 것도 진청운이 전심전력으로 가르쳤다 믿기 때문이었지, 만일 그것이 아니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호기가 뛰어난 무재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하나를 가르쳐 천을 깨우칠 정도는 아니라고 보네. 인형설삼의 영향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내공에 국한된 일. 그것 하나만으로 무공의 경지가 지금과 같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 않나?”
단지 내공만 높다고 하여 바로 검기를 사용하고 검강을 뿌릴 수는 없었다.
만일 그렇다면 누가 무공을 익히겠는가?
산으로 영물이나 찾아다니지.
그리고 그런 영물을 가장 많이 모을 수 있는 중원전장은 이미 예전에 천하를 제패했을 것이다.
“그럼 장인어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저간의 것들을 종합해 본 결과, 아마도 희생하셨을 것이라 생각하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많은 것을 넘겨주신 게지. 그래서 흑룡문의 동태를 살피다 변고를 당하신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네.”
정호기의 상태를 살피러 간다면서 우려를 표하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는 노야란 인물이 호기에게 많은 것을 줬다는 듯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럴 가능성이 크겠군요.”
내공을 사부가 제자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방법도 있었지만, 열을 줘도 하나를 제대로 받기 힘들었고, 혹시라도 중간에 내공이 충돌이라도 하면 그대로 둘 다 천장만 바라보면서 사는 신세가 되어야 했기에 함부로 시도하기 힘들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내공이 아닌 정신적인 면에서 어떤 깨달음을 심어 준 것이 아닌가 하네.”
“그것이 더 어렵지 않습니까?”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는지조차 의문인 방법이지. 단지 내공을 전해 줄 수 있다면 정신적인 것도 줄 수 있다는 가정에서 회자가 되는 것이니.”
“그렇게 대단한 분이셨다면 어째서 스스로 흑룡문을 정리하지 않으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위협만 해도 될 것인데 말입니다.”
“각자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지 않겠나? 아무튼 그 덕분에 우리 호기가 은혜를 입었으니 잘된 것이지만, 흑룡문이라는 커다란 짐을 안게 됐군그래.”
“알아보고 계신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일단 개방에 의뢰를 해 놨네. 흑룡문에 어떤 조짐이라도 있는지 말이네. 물론 아는 지우에게 은밀히 부탁을 했으니 염려 말게.”
세 사람이 되도 않는 착각을 하는 것은 노야, 즉 양조휘가 중심이었는데, 그 자체가 가공의 인물이니 이는 한 편의 촌극(寸劇)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여행이 얼마나 길어질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할 생각이냐?”
“기반을 다질 생각입니다.”
“기반?”
“예.”
가만히 정호기를 바라보던 정운룡이 다른 방으로 가더니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네가 떠나기 전에 줄 수 있어 다행이구나.”
정호기가 상자를 열어 보니 야차상으로 손잡이를 장식한 거대한 도가 들어 있었다.
야차상을 포함한 손잡이의 길이만 한 자 반에 달하고 도신이 사 척을 넘는 도는 거의 정호기의 키와 비슷했는데, 거무튀튀한 색깔과 붉은 야차상이 어우러지며 보는 이로 하여금 음산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너무 큰 것이 아닌가 모르겠구나.”
“아닙니다, 딱 좋습니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묵직함이 전해졌고, 야차상의 다리를 물고 있는 손잡이 끝에 자리한 호랑이 두상은 정호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외조부님께 감사 인사드리도록 해라. 그분이 소개해 주신 분이 만들어 주셨으니까.”
“예.”
잠시 도를 살피던 정호기가 그것을 다시 상자에 넣었다.
“꺼내 보지 않을 테냐?”
도는 도실(刀室)에 들어 있었기에 날을 볼 수 없었는데, 정호기는 그대로 상자에 넣은 것이다.
“연무장에서 열어 보고 싶습니다.”
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은 희열에 휘두르고 싶었는데, 도신을 본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정호기는 그 감동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곳에서 만끽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 정도로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긴 하다만, 좋지 못한 사연을 간직한 것을 도에 달다니 어쩐지 께름칙하구나.”
“그것을 가슴에 새기고 생명의 무게를 항상 잊지 않기 위해섭니다.”
정호기의 말을 들은 정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마음가짐을 가져야지. 어떤 일을 하건 항상 사람이 우선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악인을 상대함에 있어 그것을 우선시하다간 네가 다칠 수도 있는 법이니, 타인의 목숨을 아끼려거든 네 자신을 소중히 하는 마음을 잊지 말도록 해라. 알겠느냐?”
악인들은 타인의 생명을 담보로 협박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을 경계하고 스스로를 먼저 생각하라는 말이었다.
어찌 보면 위선적인 태도라 할 수 있었지만, 정운룡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정호기의 안전이었기에 호기를 부려 악인의 장단에 놀아나지 말라는 경고였다.
“예, 알겠습니다.”
***
“걸어가나요?”
“이번 여행의 조건을 다시 말씀드릴까요?”
“무조건 복종! 알고 있어요.”
“싫으시다면 언제든지 떠나셔도 됩니다.”
유옥접이 정가장에 몸을 의탁하고는 있었지만 딱히 그녀를 붙들어 둔 것도 아니었기에,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든 장을 떠날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이들은 계약을 하여서 그 시기를 채우기 전에 떠난다면 위반이 되지만, 유옥접은 예외인 경우였기에 특별한 제약은 없었다.
“대신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해요.”
“물론입니다.”
정가장의 유옥접이 아닌 윤회곡의 유옥접으로 대해 달라는 것이었고, 그것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겠다는 그녀의 의지였다.
‘결국 자리를 차지하게 될까, 아니면 나와 엮인 것으로 인해 밀려나게 될까?’
정호기가 기억하는 유옥접은 거침없고 남자에 대해서 적개심마저 내보일 정도로 승부욕이 대단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여리고 기댈 수 있는 벽을 찾는 여자였다.
모순을 가지고 끊임없이 고민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여장부.
[유 소저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냐?]
정운룡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은 전생에 이어 지금도 이용하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차하면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속한 문파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를 때만 유효한 계획이었다.
‘최대한 도와주면 실패한다고 해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지, 동료로서.’
만일 이용 가치가 없었다면 그녀를 장에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나란 놈은 그때나 지금이나 독한 놈이군.’
생각하는 관점이 많이 바뀌긴 했다.
전생이었다면 유옥접을 이용하는 것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을 것이니까.
하지만 정호기의 냉정함은 옅어지지 않았는데, 만일 유옥접이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된다면 그때는 가차 없이 손을 쓸 것이었다.
“햇살이 좋네요.”
봄의 시작을 알리듯 따뜻하고 눈부신 햇살이 두 사람을 향해 쏟아졌고, 정호기의 긴 여정은 시작되었다.
* * *
“천추산엔 무슨 볼일로 가시나요?”
“잠시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천 개의 바늘이 꽂혀 있는 것 같다 하여 천추산(千錐山)으로 불릴 정도로 산세가 가파르고 험하여, 무인이라 할지라도 방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이었다.
“혹시 천수신의 님께서 뭔가 가르쳐 주신 거라도 있나요?”
예로부터 험한 곳에 영물이 있고 약초꾼들은 목숨을 담보로 그런 곳들을 헤집고 다녔기에, 유옥접은 정호기가 영물이라도 캐러 가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닙니다.”
“그런가요?”
조금은 실망한 표정이었다.
“이곳에서 묵도록 하지요.”
천추산이 멀지 않았기에 오늘도 노숙을 하려나 했는데, 객점에 들어가는 정호기를 보면서 유옥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찝찝했었는데.”
객점에 들어간 정호기는 이내 점소이를 찾아 셈을 치르고 있었다.
“같이 묵지 않으실 건가요?”
정호기가 계산한 것은 방 하나의 값뿐이었다.
“천추산은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그동안 유 소저는 천천히 피로를 풀고 계십시오.”
“같이 가겠어요.”
“이곳에 계시기 싫다면 어디든 가셔도 됩니다.”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면 떠나라는 말이었다.
“쳇!”
말을 마친 정호기가 뒤돌아서 객점을 빠져나갈 때, 유옥접은 몰래 뒤따라가 볼까 하는 고민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들키면 두말도 않고 나와 헤어지겠지?’
헤어진 후에 ‘길이란 사람 다니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라면서 따라갈 수도 있었지만, 만일 그랬다가는 다리를 부러뜨려 쫓아오지 못하게 할 것 같았다.
‘충분히 하고도 남지.’
그동안 정가장에 있으면서 파악한 정호기란 인간은 냉정과 열정, 그리고 다정을 함께 가지고 있는 오묘한 조화의 존재 그 자체였다.
타인에겐 냉정, 무공엔 열정, 가족과 친인에게는 다정이었는데, 유옥접은 아직 정호기에게 있어 타인에 가까웠던 것이다.
‘흥! 좋아, 이번엔 참아 주지.’
“여기요.”
“네, 손님. 령아, 오 호실로 모셔라.”
점소이의 말에 이제 열 살이나 됨 직한 여자아이 하나가 쪼르르 달려왔다.
“먼저 씻고 싶은데요.”
“목욕물이 준비되면 령아를 보내겠습니다.”
“방으로 가져다주실 순 없나요?”
“그것이…….”
“내가 가져다 쓰는 건요?”
“가능합니다.”
“좋아요. 그럼 들고 가는 것은 제가 하지요.”
무인들은 힘이 장사였는데 대부분 근육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내공에 의한 것이었고, 가끔 있는 일이었기에 점소이가 흔쾌히 승낙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멀어지는 유옥접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인물이 있었는데, 유옥접과 령아라 불린 소녀가 사라지자 점소이에게 다가갔다.
“마음에 드는데?”
“저… 아까 일행이신 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머뭇거리는 점소이는 정호기의 우람한 덩치와 그의 등에 매달린 거대한 도가 생각나는 듯 살짝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