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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31화 (32/137)

31화

“들었지?”

자신의 운명을 알려 주려 일부러 연무실의 문을 열어 놓은 정호기였는데, 정운룡이나 진청운이 들어와서 조해를 확인할까 봐 고문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조해가 지금 멀쩡한 것은 단지 그 이유 때문이었다.

정호기가 아혈을 풀었지만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그저 빈정댔을 뿐.

“너희도 똑같은 놈들이다.”

나직이 내뱉는 말 속엔 비웃음도 들어 있었는데, 정호기로 하여금 죽이게 한 것을 두고 자신이 유모를 죽인 것과 같은 것이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럴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말이야, 난 신경 쓰지 않아. 왜 그런지 알아? 난 이미 수도 없이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지.”

조해의 아혈을 다시 점한 후에 잠시 뜸을 들인 정호기가 자신이 시간을 역행하여 반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전의 삶에서 혈신으로 불리며 정파의 수많은 인물을 죽인 것도.

“조금 후련하군. 역시 속에 담고 참는 것은 힘들어.”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던 조해의 얼굴이 일그러졌는데, 단검이 그의 가슴 깊숙이 박혔기 때문이었다.

“내 비밀을 알아서 죽는 게 아니라, 죽을 것이기 때문에 알려 준 거야.”

완전히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정호기가 조해의 시체를 들고 나무 밑으로 향했다.

어린 시절 하 총관을 묻었던 그곳으로.

***

‘어떤 변화가 있을까?’

과거 조해가 정파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낮지 않았었고, 그로 인해 목숨을 건진 이들도 많았다.

물론 그것은 먼 훗날의 변화이지만, 조해의 행태로 봤을 때 그에게 목숨을 잃을 이들이 더 생길 수도 있었는데 그것을 없애 버린 것이다.

‘물론 그건 작은 것이야. 조해에게 목숨을 잃을 정도면 나중에 있을 전쟁에서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테니까. 문제는 이제부터인데…….’

자신이 지금 하는 일로 인해 일어날 변화가 훗날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그것이 걱정되었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와 같구나.’

계속된 변화에 흑룡문이 공격하는 방식을 바꾼다면 지금 알고 있는 기억은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도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이미 일어나 버렸으니까.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

그 하나로 흑룡문 내에서도 분명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었다.

‘최선을 다해? 아니, 그것 가지고는 부족해.’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었다.

‘지킨다! 그리고 죽인다!’

원수를 갚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가족의 안전을 위협받으면서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흑룡문을 저지하지 않는 한 위험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야 하리라.

사파의 세상에서 정파가 어떻게 살았는지 직접 목도하였으니까.

가족도 지키고 원수도 갚는 방법.

가장 좋은 것은 지금부터라도 가족을 심심산골에 데려다 두고 혼자 일을 처리하는 것이겠지만 일이 년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고, 그것에 관해서는 이미 복안을 가지고 있기에 나중에 처리를 하기로 했다.

***

그렇게 정호기가 고민하고 있을 때, 진청운과 정운룡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말씀을 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정운룡의 말에 진청운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호기가 꼭 비밀로 하자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제 딴엔 본모습을 보이기 싫었나 봅니다.”

“본모습이라고요?”

“허허허, 예. 처음 그 녀석을 만났을 때 어찌나 의젓했는지 마치 노회한 인물을 보는 것 같았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예?”

“이미 철이 들 대로 들었더군요. 아무래도 노야께서 잘 가르치신 모양입니다. 그런데 정말 모르셨습니까?”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노야라고요?”

“예, 양 사부님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제 생각엔 노야의 부탁도 부탁이지만,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모습을 드러냈다간 하지 못할 일이었으니까요.”

“정말 그랬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록 첫 명(命)을 겪는 일이지만, 잘 해낼 것입니다.”

“자식이지만 지금까지 전혀 속을 모르고 지냈군요.”

“호기가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이제는 아셔야 할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벌써 내년이면 약관입니다. 나이는 그렇지만 정신은 이미 이립(而立)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것에 맞게 대우를 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기를 무척이나 신임하고 계시는군요.”

“장주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까?”

물으나 마나였다.

이 세상에서 정호기를 가장 믿는 이가 있다면 바로 정운룡일 테니까.

비록 숨겨 둔 사부가 있다는 말에 조금 서운한 감정은 들었지만 믿음이 흔들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흑룡문과 싸울 생각일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아마도 힘겨운 싸움이 될 테지요.”

“정말 흑룡문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 믿으십니까?”

“노야의 말씀을 믿습니다. 조해를 잘못 보긴 했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던 수수의 병을 정확히 알아낸 분이시니. 제가 신의께 넌지시 여쭤 보았더니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능력이 하늘에 닿을 정도라 하시더군요.”

진청운은 진수수의 병을 알아낸 노야의 능력을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고, 그것으로 인해 노야의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는 중이었다.

“그런 분이 실종이라……. 흑룡문이 그렇게 대단한 문파였던가요?”

“육십여 년의 세월입니다. 그동안 준비를 해 왔다면 뭔가 있지 않겠습니까?”

“음… 정파가 과연 모르고 있을까요?”

정운룡의 물음에 진청운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의께서도 스스로 무공을 익히고 계시고, 무인들과 만나는 것을 즐기시기에 혹시 중원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는지 여쭤 보았지만 특별한 것은 없다 하시면서, 몇 년 전에 작은 문파들에서 소란이 있었던 적은 있다고 하셨습니다.”

“소란이요?”

“세력 다툼을 빙자한 반역 같은데, 그것이 장에서 일어날 뻔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흑룡문과 연관시킬 수도 없고, 아주 작은 문파들이었기에 정파에서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일을 어째서 노야께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신 걸까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그분이 그렇게 생각하신 것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듯싶습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저 혼자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제부터 장주님과 함께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런데 우리 둘만으로 되겠습니까?”

“노야께서 호기에게 저를 포함해서 같이할 사람을 일러 주신 모양인데, 솔직히 힘들다고 봅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신의님을 끌어들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남도 아니니 믿어 주실 겁니다.”

남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누가 선뜻 믿을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호기에게 말을 해야겠지요?”

“장주님이 말씀하시면 될 것입니다.”

***

“여행이요?”

유옥접은 갑작스러운 정호기의 제안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어디로 가실 건가요?”

“세상을 둘러볼 생각입니다. 가능하면 이름도 알리고.”

“섬서에서 유명세를 치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신 모양이지요?”

아직까지도 간간이 정호기와 비무를 하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섬서에서는 유명세를 누리고 있었다.

“무인이라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좋아요.”

이것이 바로 유옥접이 노리던 것이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정호기에 대해서 조사를 해 미리 알고 있던 그녀였기에 빠른 시일 내에 이와 비슷한 일이 생길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고, 그에게 패한 후 따라가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백 소저께서 가만히 계실지 모르겠군요.”

“설마 쫓아오겠습니까?”

백수련은 무림대회에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영호에 의해 끌려갔고, 그 뒤로 한 번도 정가장을 찾지 않았다.

아마도 백영호가 그녀를 막고 있는 것 같았다.

“돌아온 다음이 문제 아니겠어요?”

“신경 쓰입니까?”

“아니요. 전 다만 정 공자님이 걱정돼서 하는 말일 뿐이었어요.”

“보름 후에 출발할 것이니 미리 준비할 것이 있으면 해 두도록 하십시오.”

“예.”

* * *

봄바람이 살랑이려는 춘삼월이 다가오고 있었고, 그날이 정호기가 출발하는 날이었다.

“어쩐 일이세요?”

저녁을 먹은 후 천수신의가 정호기를 찾아왔다.

그동안 천수신의가 찾아오는 일은 없었는데, 정운룡에게 여행을 떠난다고 말을 하자마자 찾아온 것이었다.

“할아비가 손자 찾아오는 데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느냐?”

“아닙니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에헴, 어디 손자가 타 주는 따뜻한 차 한 잔 마셔 볼까?”

차를 마시면서 일상적인 얘기를 하던 천수신의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물었다.

“요새 무공에 진전은 있느냐?”

“예.”

“다행이구나. 지금 속도를 늦추면 퇴보할 수도 있으니, 한 시도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 될 것이다. 그나저나 곧 여행을 떠난다고? 어디로 갈 셈이냐?”

“하남에 가 볼까 합니다.”

“하남이라… 좋은 곳이지. 소림이 있는 숭산도 웅장하지만, 천추산과 대별산도 나름 특색이 있는 곳이란다. 그곳에 가면 꼭 들러 보려무나.”

“알겠습니다.”

대별산은 몰라도 천추산은 꼭 들를 생각이었다.

확인할 것도 있고, 나중을 위해 안배를 해 놓아야 할 것도 있었으니까.

“자, 누워 보려무나. 먼 길 떠나기 전에 이 할아비가 몸을 좀 봐주마.”

침상에 누우면서 정호기는 정운룡이 천수신의에게 어디까지 말을 했을지 궁금했다.

“흠… 호오! 과연…….”

연방 탄성을 발하면서 정호기의 몸을 주무르는 천수신의의 얼굴엔 놀람의 빛이 가득했는데,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무척이나 만족한 것 같았다.

“조금 미흡한 부분이 있지만, 몸 상태는 거의 최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요새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느냐? 기혈이 뭉친 것이 느껴지는구나.”

품에서 침을 꺼내며 천수신의가 물었다.

“여행을 앞두고 긴장한 모양입니다.”

“아비도 그것이 신경 쓰인 모양이더라. 자, 그럼 마음을 편히 가져라. 이건 좀 오래 걸리거든.”

근 반 시진에 걸친 침술이 이어졌고, 천수신의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자, 이제 다 됐다. 뭉친 기혈을 바로잡았으니 개운할 게다.”

“감사합니다.”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하지 말거라. 우리 모두 네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느냐? 하나, 우리가 노력한다면 필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이 할아비도 손을 쓰고 있으니, 미력하나마 네게 힘이 돼 줄 수 있을 게다.”

“고맙습니다.”

“무슨……. 할아비와 손자 사이에 인사치레가 다 무어냐. 그런데 소림에 가면 말이다, 현허라고 내 지우가 있는데 예전에 내가 부탁한 물건을 가지고 있단다. 언제 시간을 내서 간다 간다 하면서도 좀체 가지를 못해서 받지 못했는데, 이번에 네가 받아다 주겠느냐?”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숭산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청운촌이란 마을이 있는데, 거기 혼천주라고 매우 뛰어난 탁주가 있단다.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지. 사실 현허 땡중이 나에게 대접을 했었는데,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하겠구나. 시간 나면 한번 들러서 먹고는 싶은데…….”

“사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겠느냐? 그런데 혼천주는 청운촌 옆의 미림촌에서 만드는 짭짤한 육포와 함께 먹어야 제 맛이긴 하지.”

그 뒤로 대여섯 가지의 부탁을 더 늘어놓은 후에야 천수신의가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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