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30화 (31/137)

30화

“사실이냐?”

“예. 그동안 말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진 사부께서는 알고 계시느냐?”

“처음 뵌 날 말씀드렸습니다.”

“어째서 내겐, 아니 우리에겐 말을 하지 않은 것이냐?”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남이라고 할 수 있는 진청운에게는 말을 했으면서도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으니.

“믿으시는 겁니까?”

조금은 의구심을 느낄 법도 하건만, 정운룡은 정호기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 같았다.

“내가 어찌 널 믿지 않겠느냐? 다만 섭섭할 뿐이고, 흑룡문과 싸워야 한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나하나 풀어 가자꾸나. 우선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 그것부터 말해 주겠느냐?”

“혹시나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을 저어한 사부님이 말씀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정체도 밝히지 않는 이의 가르침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음… 그렇게 말씀하셨느냐?”

“예.”

“어째서 정체를 드러내지 못하시는 것이냐?”

“그것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저도 얼굴을 뵙지 못했고, 다만 무공과 성함만 받았습니다.”

“그래?”

“예. 홀연히 찾아와 제게 무공을 전수해 주셨는데, 아마도 그분은 제가 인형설삼을 먹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누구도 알지 못했던 수수의 병을 가르쳐 주시면서 진 사부님을 모셔 올 수 있도록 해 주셨으니 말입니다.”

“그분이?”

“예. 스스로를 무아(無我)라 칭하시며 드러내시길 꺼렸지만, 대단한 분인 것은 확실합니다.”

“소식이 끊겼다고?”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씩은 제게 연락을 하셨는데, 벌써 이 년째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일전에 남겨 준 전서를 읽었는데, 지금과 같은 경우라면 이미 생이 다하신 것이라며 제가 유지를 이어 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허어… 안타까운 일이구나. 정녕 신변에 안 좋은 일이 생긴 것이라 생각하느냐?”

“약속을 어기실 분이 아닙니다. 지정한 날에 반드시 오셨고, 한 번도 시각에 늦으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흑룡문을 감시하셨다고 하셨는데, 무슨 일이냐?”

“흑룡문은 오래전부터 음모를 꾸몄고, 그 속에는 우리 장도 포함이 되었었습니다. 그리고 중심에는 하 총관이 있었습니다.”

“하 총관이?”

실종된 하 총관은 끝내 행방을 알 수 없었고, 이제는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진 존재였다.

“그렇습니다. 하 총관은 흑룡문과 내통하면서 장을 장악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그것을 파악한 사부님께서 하 총관을 비밀리에 처리를 하신 것입니다.”

정호기의 말을 들은 정운룡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진 사부께서는 어디까지 알고 계시느냐?”

“모두 알고 계십니다.”

“양 사부님과 진 사부님 사이에 뭔가 관계라도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다만 진 사부님의 조부님과 연이 있으셔서 그것을 믿고 추천을 해 주셨습니다. 사부님이 안 계실 때 저를 보호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알았다. 그래도 네가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못내 서운하다만, 사부님의 말씀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 그나저나 이렇게 모든 것을 말한 것은 사부님의 실종과 유지 때문이냐?”

“그것도 있습니다만, 아버지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무엇이냐?”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흑룡문과의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것은 저 혼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 줄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정호기의 말을 들은 정운룡의 얼굴은 조금 심각해졌는데, 그것은 흑룡문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은 온화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물론 네가 원한다면 모든 것을 걸고라도 도움을 줄 것이지만, 진정으로 그런 일이 있다면 정파 전체에 알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누가 믿어 주겠습니까? 있는 것이라곤 의구심과 확인되지 않은 사실뿐입니다.”

“양 사부께서 뭔가 남겨 놓으신 것이라도 없느냐? 그리 오랫동안 조사를 하셨다면 어떤 증거라도 잡으셨을 것이 아니냐?”

“그것을 확인하고자 동분서주하셨지만, 제시할 정도의 성과는 없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양 사부께서는 무엇을 가지고, 어떤 점을 들어 흑룡문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의심하신 것이냐? 그리고 그 음모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이냐?”

“당시 우리처럼 수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문파를 장악한 곳이 중원 곳곳에 있었는데, 의구심은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었습니다. 드러난 것은 하 총관이 흑룡문의 추풍검을 만났고 그의 지시를 받았다는 것밖에는.”

“추풍검 냉백!”

정운룡이 경악에 가까운 소리를 냈는데, 냉백이 흑룡문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그의 무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운룡뿐만 아니라 중원에 있는 무인들 대부분이 그 이름을 알리라.

“그가 무엇이 아쉬워 우리 장을?”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그런 정황이 중원 곳곳에서 파악되고는 있지만, 증명할 수도 없고 증명할 방법도 없습니다.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요.”

“사실이냐?”

되묻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사실이라면 자신을 비롯한 정가장의 모든 이들이 저승사자의 목구멍에 들어갔다가 나온 꼴이니.

“사실입니다. 그 자리에 저도 있었는데, 그날의 계획을 알고 있다고 추궁하니 체념한 듯 모두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곽현 총당주도 함께 가담하였기에 저와 진 사부님이 수를 내어 그를 처리하였고, 그것을 본 다른 이들은 알아서 장을 떠났던 것입니다.”

정운룡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전부라고 여겼고, 굳건한 반석 위에 지어진 단단한 철옹성이라 믿었던 정가장이 사실은 부실한 모래성이었었다니 말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럼 그때,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장을 떠나갔던 이들이 모두 그 일에 가담을 했다는 것이냐?”

“네.”

“허어…….”

그때는 하 총관과 곽 총당주의 일로 장이 뒤숭숭해지자 떠나간 것이라며 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자신을 노린 모반이 실패해서였다니, 어찌 허무하지 않겠는가.

“정녕… 정녕 사실이더냐?”

형제처럼 여겼던 이들이었다.

아니, 어쩌면 형제보다 더 가깝게 생각했었다.

“예. 가장 핵심적인 인물들인 하 총관과 곽 총당주는 흑룡문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었기에 그들은 살려 둘 수 없었습니다.”

정호기의 말을 들은 정운룡이 가만히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양 사부께서 나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은 그들을 처리하는 것에 있어 내가 걸림돌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이유였던 것 같다.”

알아서 해답을 찾아 주니 정호기는 고마울 뿐이었다.

“사실 사부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었습니다. 지금은 정에 치우쳐 일을 미룰 때가 아니기에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얘기할 기회를 놓쳐 지금에야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아니다, 이제라도 말을 해 주니 고맙구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끝났고, 이제는 조해의 처리만 남은 것이니 그것을 의논해야 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또 무슨 일이 있느냐?”

“제가 만금장의 무림대회에 참가한 것은 사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더냐? 하면 누구를?”

“바로 조해입니다.”

“조해? 삼척동자 조 대협을 말하는 것이냐”

“예. 사실 조해를 추천한 것도 사부님이셨습니다. 진 사부님을 만나게 한 것처럼. 그렇기에 조해를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조해는 우리가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니라 음흉하고 사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예. 진 사부님도 오시라 말씀드렸으니, 저와 함께 같이 가세요.”

***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네놈의 가족들을 모두……”

말문이 트이자마자 조해는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퍼부었고, 정호기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지쳐 말을 멈추었을 때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가 한 짓에 대한 결과란 생각은 안 드나? 아니, 네 집안이 지금까지 해 온 것에 대한 업보란 생각 말이다.”

정호기의 말에 조해가 가당찮다는 투로 말을 뱉으며 오히려 화를 냈다.

“닥쳐! 그딴 버러지들을 죽였다고 무슨 업보란 말이냐!”

악다구니를 쓰는 조해를 보면서 정호기는 이런 인물이 어째서 정파의 편에 서서 싸웠었는지 그걸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이런 놈을 정파에 붙들어 둘 만한 이유가? 아님 흑룡문과 원한이라도?’

알 수 없었고, 여기서 조해가 죽는다면 그것은 영원한 비밀로 묻힐 것이다.

“숨어 살고 있는 여동생과 매제, 그리고 그 자식들을 무참히 죽일 정도로 야차상에 숨겨진 비밀이 중요했나? 가족 간의 정을 저버릴 정도로?”

“그년이 먼저 부모님을 죽였다! 천륜을 저버린 것은 그년이야!”

원하는 대답은 다 들었기에 조해의 아혈을 점하고는 열려진 연무실의 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들으셨습니까? 모두 제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열린 문을 통해 조해의 악다구니를 다 듣고 있던 진청운과 정운룡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저런 인물이었다니…….”

정운룡은 하루 동안 자신이 알게 된 사실들로 인해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중이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호기가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한단 말인가?’

고민에 빠진 정운룡을 보면서 정호기는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대답 여하에 따라서 결정해야겠지.’

정호기가 할 일은 흑룡문과의 전쟁이었다.

물론 혼자 할 생각도 없고 앞에 나서서 설칠 생각도 없었지만, 아무리 숨기려 해도 주머니 속의 송곳은 드러나기 마련이니 힘든 미래가 될 것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독해져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인데, 만약 정운룡이 지금 여린 모습을 보인다면 그와 많은 것을 의논할 수 없었다.

단호한 모습.

그것이 정호기가 바라는 바였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아버지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진 사부님은 어떻습니까?”

“장주님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을 들은 정운룡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타인의 생명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일이지만, 이번 일은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의 죄를 떠나 호기가 관련되었기에 놓아줄 수도 없습니다.”

정운룡의 대답을 들은 정호기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가 생각한 그대로다.’

배타적인 그의 성격은 어린 시절 겪은 충격으로 형성된 것일지라도 원래 정호기는 대범하고 강단이 있었다.

여리기만 했던 그가 마중마 연성 계획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천성 덕이었다.

어둠 속에서 자신들을 노려보는 눈길을 느끼며 이를 꽉 물었던 그때, 두려움을 느꼈을지언정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었다.

다만 그리웠을 뿐.

진청운을 바라보던 정운룡이 다시 눈길을 돌려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일을 벌였으면 응당 책임을 져야 하는 법. 어렵더라도 네가 마무리를 짓도록 하여라.”

정운룡은 아직 정호기가 살인에 대한 경험이 없기에 걱정하는 말투였지만, 뜻은 단호했다.

“예.”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정호기의 모습은 큰일을 앞둔 이의 고민하는 모습이었으나, 속내는 전혀 달랐다.

이미 수만 명을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거둔 경험이 있는 그였기에 이런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저 혼자 하고 싶습니다.”

“괜찮겠느냐?”

자식에게 살인을 시키고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그렇기에 옆에서 마음의 짐을 덜어 주고 싶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아버지께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알았다.”

정운룡이 일어서자 진청운도 따라 일어섰는데, 그러며 정호기에게 전음을 보냈다.

-언제까지 속일 생각이냐?

정호기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진청운이었기에 이러한 전음을 보낸 것이었다.

살인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을 그라는 것을 알기에.

-어차피 드러날 것입니다. 굳이 지금 알려 드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정호기의 대답을 들은 진청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운룡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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