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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29화 (30/137)

29화

“뭐지? 허튼수작을 부리면 지옥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 주겠다. 이걸로 말이야.”

정호기가 잠깐 망설이자 조해가 품에서 면도를 하나 꺼냈는데, 어찌나 예리하게 보이는지 바람도 찢어발길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동물들을 해체했지만, 결국엔 그것에 질리게 됐지. 발버둥을 치고 소리를 지르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았거든. 살아 있는 표정을 원하게 됐고, 목청이 터질 것 같은 비명 소리보다는 숨을 죽이는 것 같은 신음이 더 좋았어.”

면도로 탁자 위에 놓인 정호기의 손등을 살짝 스쳤는데, 매미 날개 같은 투명한 막이 떨어져 나왔다.

“어때? 멋있지? 조금 후에는 약간 따끔거릴 거야. 오, 핏방울도 송골송골 솟는군. 이 아름다움이란…….”

조해의 눈이 마치 뭔가에 홀린 듯 붉은 핏방울을 바라보았다.

“피를 좋아하는군.”

정호기의 말에 조해가 솟은 핏방울을 혀로 핥더니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너무 좋아하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내가 왜 피를 보면 피하는 줄 알아? 남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 그것을 탐하게 될까 봐서, 무너지게 될까 두려워서 그런 거야. 그 유혹을 견디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고, 지금도 네 몸을 살과 뼈로 분리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중이거든.”

조해의 말을 들은 정호기는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참는 것은 좋지 않지. 나도 참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쓰레기와 대화하는 거야.”

기대한 반응이 아니었기에 조해가 슬쩍 등에 대고 있는 손을 이용해 점혈을 확인하려는 순간, 정호기가 움직였다.

“컥!”

정호기가 한 손으로 면도를 들고 있는 조해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복부를 후려쳤는데, 큰 주먹이 거의 반이나 파묻힐 만큼 강한 일격이었다.

충격에 허리를 굽히고 쓰러지는 조해를 보며 정호기가 비웃었다.

“등을 이렇게 쉽게 내주면 되나.”

조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으며 발을 들어 찍었다.

사지를 부들부들 떠는 것으로 보아 마혈이 찍힌 것 같지는 않았지만 쉽게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따위 것으로 나를 협박해?”

마혈을 비롯해 팔과 다리, 아혈까지 찍은 정호기가 떨어져 있는 옥병을 주웠다.

“원앙고? 흥! 네놈 따위가 만독궁의 원앙고를 가지고 있다고? 나조차도 겨우 한 쌍만 얻을 수 있었던 것을?”

혈신이라 불린 시절, 만독궁이 자랑하는 원앙고를 얻고자 했을 때 만독궁주가 특별히 인심을 쓴다고 내준 것이 한 쌍이었다.

“생사고(生死蠱)겠지.”

원앙고를 만들다 실패한 것이 생사고였고, 생사고는 수놈을 가지고 있는 숙주까지도 죽일 확률이 높았기에 만독궁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가끔 중원에 원앙고라는 이름으로 들어오는 것은 그것들을 몰래 빼돌려 파는 것인데, 백에 구십구는 시전자도 같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 양도 많지 않았기에 싼값에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가짜일 가능성이 컸다.

벼룩이나 이를 집어넣고 만독궁의 이름을 도용해 파는 것이다.

“너 같은 놈까지 원앙고를 얻을 수 있었으면 만독궁이 벌써 중원을 쓸어버리고도 남았을 거다. 멍청한 놈.”

엎어진 조해를 깔고 앉은 정호기는 옥병을 들고 생각에 잠겼다.

‘진청운의 생각이 옳았군.’

* * *

진청운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길을 헤맨 것이 원인이었는데, 만일 그가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했다면 일은 많이 어긋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정호기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끼어들지 말 것을 부탁했고, 그들이 조해의 원수라는 것도 말을 했다고는 하지만, 조해가 단순히 죽이는 것이 아니라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으니 진청운이 끼어들었을 수도 있었다.

조해가 시체를 던져 넣은 후 건물에 불을 지르고 그곳을 떠난 뒤, 진청운은 불 속에서 시체를 꺼내 그것들을 자세히 살폈다.

그 결과 고문한 것을 알게 되었고, 잔인한 조해의 심성을 눈치 챘던 것이다.

부모를 죽인 원수이니 그럴 수 있다 생각될 수 있지만, 이전까지 그가 보여 주었던 모습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런 이중성을 경고한 것이다.

* * *

‘내 기억은 어떻게 되는 거지?’

정호기의 기억은 앞으로 십이 년이 더 지난 후부터 온전하다 할 수 있었다.

그 전에는 마중마 연성 계획에 의해 폐쇄된 공간에서 생활했고, 중원에 대한 정보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 이후 오 년간도 상부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것이 전부였기에 단편적인 지식들뿐이었다.

‘난 이놈의 겉만 본 것뿐이었어. 거기다 앞으로는 시간차까지 고려를 해야 되겠지. 진청운이 내가 생각했던 대로의 놈이라는 사실에 너무 방심했구나.’

진청운이 만일 자신이 짐작했던 대로 바르고 곧은 놈이 아니라, 조해처럼 음흉한 놈이었으면 어쩔 뻔했을지 생각해 보니 뒷골이 당겼다.

그리고 젊은 시절과 나이를 먹은 후의 인간은 뭐가 달라도 다른 법이니 그것도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였다.

젊어서 망나니라도 나이 들어 철이 들 수도 있고, 젊어 철이 들어도 나이 들어 욕심 많은 인간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정호기는 자신이 방심했다고 했지만, 완전히 방심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 증거로 진청운을 시켜 조해를 따르게 했으니까.

조해를 완전히 믿었다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다.

‘찜찜한 기분이 들어 진청운을 딸려 보내길 잘했어.’

정호기를 찜찜하게 한 이유는 조해를 피해 숨어 버린 사람들 때문이었다.

만일 조해와 그들이 소문대로의 사람들이었다면 조해를 죽여 버리는 편이 더 쉬웠을 테니까.

아니, 설사 조해가 무서웠다고 해도 그리 오랜 시간 동안 삼척동자 조해란 소문이 돌았다면 한 번쯤은 죽이기 위해 노력이라도 해 봤으리라.

그렇기에 진청운을 그곳으로 보낸 것인데, 그것이 목숨을 구한 것이다.

‘제발 진청운은 변하지 않길 바라야 하나.’

하지만 시간이란 요물은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진청운도 자신으로 인해서 변화를 맞았기에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는 정호기도 예측할 수 없었다.

‘이혈대법을 해 두길 잘했군. 그리고 이것도.’

입에서 뭔가를 꺼냈는데, 작은 하얀 구슬이었다.

‘독은 사용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진청운의 얘기를 들은 그날, 조해가 바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천수신의를 찾아가 빼앗다시피 얻은 피독주였다.

만일을 생각해 입안에 숨겼었는데, 색깔이 변하지 않은 것을 보니 다른 수작을 부리진 않은 것 같았다.

‘그나저나 작심하고 조사를 한다고 해도 이놈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숨긴다면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정호기는 대충 자신이 이용할 인물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어떻게 할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까 발로 등을 찍은 것이 뭔가 잘못된 모양인지 땀으로 흠뻑 젖은 조해의 얼굴이 보였다.

“네놈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궁금하지 않아? 친절을 베푸는 마음으로 가르쳐 주지. 일단 네놈이 하려고 했던 일을 해 줄 생각이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날카로운 날을 가진 면도를 주워 든 정호기가 조해의 팔을 살짝 스치자, 아까 조해가 했던 것과 같이 얇은 살가죽이 떨어져 나왔다.

“네놈 피부를 모조리 벗긴 후에 힘줄을 끊어 버리고 혀를 뽑아서 저잣거리에 던져 놓을 생각이다. 물론 추운 날씨에 정신을 잃지 않도록 소금은 골고루 뿌려 주마.”

정호기의 말을 들은 조해의 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실제 그럴 생각은 없었기에, 육체를 손상시킬 수 없으니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자는 의도에서였다.

‘영초린 그놈은 어떨까?’

이내 조해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정호기가 여전히 그를 깔고 앉은 채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어떻든 영초린을 이제 슬슬 만나 볼 필요가 있고, 이놈이 이 지경이니 결국 나상진 그놈을 끌어들여야 하나?’

믿고 있던 조해가 믿음을 배신했으니 다른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나상진이었다.

‘하지만 그놈은 너무 고지식하단 말이야.’

진청운이 곧은 성격의 소유자이면서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상진은 벽창호라고 할 수 있었다.

‘뭐, 아직 어리니 좀 뜯어고치면 되겠지. 그리고 미리미리 손을 좀 써 놔야겠어.’

앞으로의 일을 구상하는 정호기에게 깔린 조해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중이었다.

정호기가 한 말이 심적 부담이 된 것도 있었지만, 등을 찍히면서 어긋난 척추를 무거운 정호기의 몸이 누르고 있었기에 그 고통은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해. 진청운과 같은 불안한 믿음이 아니라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자신이 생각한 일을 진행하려면 후면에서 받쳐 줄 누군가가, 완전하게 자신을 믿고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고민을 거듭하며 밤을 꼬박 샌 정호기가 밑에 깔려 있는 조해를 봤을 때, 그는 거의 반은 죽어 있는 몰골이었다.

“혹시나 멍청하게 야차상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니겠지?”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조해를 뒤지던 정호기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멍청한 거냐?”

없을 줄 알았던 야차상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고문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걱정했더니, 네 멍청함이 나를 도와주는구나.”

정호기는 고문을 할 수 없다고 했지만, 이미 조해는 충분히 고문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조해의 혈도를 다시 꼼꼼하게 점한 뒤 미리 준비했던 밧줄로 꽁꽁 묶어 연무실로 데리고 갔다.

“밤새 깔려 있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제 그 희망을 없애 주마.”

단전에 손을 올린 정호기가 내력을 쏟아 냈고, 반각의 시간이 흐른 후 조해가 신음과 함께 피를 토했다.

단전을 완전히 파괴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기에 시간이 걸린 것이다.

“컥!”

고통과 독기가 서렸던 조해의 눈에 절망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호기의 얼굴은 타인을 대할 때면 언제나 굳은 얼굴이었지만 가족에게는 예외였다.

항상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정호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굳어 있었기에, 정운룡은 무슨 일인지 의아했다.

‘혹시 련아 때문인가?’

백수련은 현재 장에 머물지도 찾아오지도 않았는데, 그것은 백영호가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운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었고, 그 일로 정운룡이 얼마 전에 정호기에게 말을 했었다.

“아버지, 일단 제 말을 모두 들은 후에 말씀을 하시면 고맙겠습니다. 중간에 서운한 감정이 들더라도 말입니다.”

“오냐, 알았다.”

‘이 녀석, 결국 련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구나.’

정운룡이 앞선 추측을 할 때, 정호기가 입을 열었다.

“진 사부님을 제 사부님으로 알고 계시지만, 사실 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저를 가르쳐 주신 사부님이 따로 계십니다.”

“뭐?”

황당한 말에 정운룡이 반문을 했다가 진지한 정호기의 눈길을 받고는 입을 다물었다.

“진 사부님을 제게 추천해 주신 분이 바로 사부님이시고, 그분의 명을 받들어 삼이를 시켜 모셔 오게 한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익히고 있는 무공도 진 사부님의 것이 아니라 사부님의 것입니다. 사부님의 함자는 양 조 자, 휘 자 되시고, 현재 행방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동안 흑룡문의 동태를 감시하고 계셨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남긴 유지를 따라 흑룡문과의 싸움에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정호기가 가만히 바라보자 그제야 정운룡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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