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28화 (29/137)
  • 28화

    “할 말이 있으신가요?”

    자신을 바라보는 정호기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유옥접이 물었다.

    “근무 시간이 다 되지 않았습니까?”

    유옥접은 현재 정가장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동안은 손님의 자격으로 장에 머물고 있다가 진청운이 돌아오자 그에게 부탁하여 경비 무사로 들어앉은 것이다.

    “근무 시간에 늦는 것을 사부님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뵙고 왔어요. 제가 무공을 수련하는 데 지장이 있다고 부탁드렸더니, 야간조에 배속되었어요.”

    “그럼 쉬셔야지요.”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유옥접의 말에 정호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도를 들고 일어섰다.

    ‘윤회곡이라… 이름 참. 운명인 건가, 아니면 하늘의 장난인 건가? 어쨌거나 인연이 파도처럼 밀려드는구나.’

    유옥접이 소속된 곳은 윤회곡이 아니었으니 그녀가 지어낸 것일 테지만, 그 이름이 우연히도 자신과 그녀의 관계를 빗대어 지은 것 같았다.

    유옥접을 보내지 않은 것은 관심이 있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에 그런 것일 뿐이었다.

    [날 죽여! 아니면 후회하게 될 테니까!]

    죽여줬다.

    사랑도 아니었고, 문제가 생기는 것은 원치 않았으니.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전 이제부터 수련을 해야 하니.”

    축객령은 유옥접에게만 내려진 것이 아니라 백수련과 진수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

    “유 소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요?”

    “네? 속셈이라니요?”

    “이미 호기하고 나는 혼례를 약속한 사이라고 말씀드린 것으로 아는데요.”

    “그래요? 근데 전 왜 그런 소문을 듣지 못했을까요?”

    “일부러 떠들 필요 없으니까요. 궁금하면 호기에게 직접 물어보시라고 했잖아요.”

    “네, 그렇게 하지요.”

    “아까는 왜 안 물어보셨어요?”

    “언제 물어본다고 말씀드린 기억은 없는데요?”

    보다 못한 진수수가 나섰다.

    “유 언니, 오빠는 절대 장을 떠나실 분이 아니에요. 다른 분을 찾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요.”

    “내가 여기서 살면 되지.”

    “네?”

    유옥접의 말에 백수련과 진수수가 동시에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전에 했던 말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윤회곡은 데릴사위만 인정한다면서요? 언니가 여기서 살아도 돼요?”

    “곡에 돌아가지 않으면 그만 아니겠어?”

    “돌아가지 않으셔도 돼요? 기다리시는 분이 계실 것 아니에요.”

    진수수의 말에 유옥접이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없어.”

    “없어요?”

    “응.”

    어쩐지 슬퍼 보이는 얼굴이었기에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 묻지 못하고 슬며시 말을 돌렸다.

    “오빠가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남자답잖아.”

    “그것뿐이에요?”

    “그거면 충분한 것 같은데?”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코끝을 만졌는데, 그곳엔 붉은 흉터가 자리해 마치 코가 반으로 갈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 이것도 있었지. 설마 여자 얼굴에 이런 상처를 입히고 모른 체하는 것은 말이 안 되잖니? 아아, 피곤하다. 난 그만 쉬러 갈게. 백 소저, 먼저 갈게요.”

    말을 마친 유옥접이 백수련과 진수수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집에 돌아갈 수는 없어. 절대로!’

    입술을 꼭 깨물며 다짐하는 유옥접의 얼굴엔 결연한 빛이 서려 있었다.

    ***

    정호기는 자신의 방에서 어둠을 스치며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덧 가을이 지나고 겨울에 들어선 것이다.

    똑똑.

    “소장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누구? 설마 이 시간에 비무를 하자고 찾아온 것은 아니겠지?”

    사가장에서 열린 무림대회에서 우승한 덕분에 정호기의 이름이 섬서에 널리 알려졌고, 그로 인해 그와 비무를 하고자 하는 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중이었다.

    “비무가 아니라 만남을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남 천추산에서 오셨고, 성함은 조반생이라고 하시더군요.”

    “천추산, 조반생?”

    “모르시는 분이십니까? 분명 아신다고 하셨는데. 돌려보낼까요?”

    “아, 아니다. 지금 어디 있지?”

    “정문에 있습니다.”

    “모시도록 해라. 아, 삼아.”

    “예?”

    “되도록 천천히 모시고 오너라. 그리고 이 일은 보고하지 말도록 하고. 알겠지?”

    “알겠습니다.”

    * * *

    문이 열리며 들어선 것은 말끔한 얼굴의 중년인이었는데,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고 머리는 뒤에서 묶어 등으로 길게 늘어뜨려 단정한 느낌을 주었다.

    “하하하, 잘 지냈는가? 넉 달 만이군. 흉터는 운 좋게 나았다네.”

    오른쪽 볼을 가리키며 웃는 사내는 정호기의 짐작대로 조해였다.

    “그래? 그거 축하하네.”

    “고맙군. 그나저나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난 술상이라도 봐 놓느라고 오래 걸린 것이라 생각했네만.”

    “운공 중이었네. 자네가 온 줄 알았으면 중도에 멈출 것을 그랬네. 어쨌거나 술이라면 걱정 말게나. 삼아, 가서 술과 안주를 가져오너라.”

    “예.”

    “되도록 술을 많이 가져오고, 오늘은 이분과 밤새 술을 마실 것이니 술을 가져온 후에 너는 그만 들어가도록 하여라.”

    “예.”

    얼마 지나지 않아 왕삼이 술상을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두어 번 더 술병을 가지고 온 후에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왕삼을 보내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처음 만난 날과 마찬가지로 말도 없이 술을 마셨다.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 두 사람이 얼근하게 술이 오른 그때, 정호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게 본얼굴인가?”

    “물론 아니라네. 그동안 역용을 하고 다니던 것이 버릇이 되었는지, 민얼굴로 나서려니 어쩐지 허전해서.”

    “그곳엔 다녀왔나?”

    “응.”

    “시일이 걸린 것을 보니 바로 간 것은 아닌 모양이군.”

    “마음을 정해야 했네.”

    “죽였나?”

    “못 죽였다고 해야겠지.”

    조해의 대답을 들은 정호기의 얼굴이 굳었다.

    “자, 한 잔 받게.”

    술을 따라 준 정호기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더니 벌컥 들이켰다.

    “그러게 내가 같이 가 준다 하지 않았나! 그런 천인공노할 것들을 살려 주면 어찌한단 말인가?”

    “어쩌면 갈 때부터 죽일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르네. 어쨌거나 동생이니.”

    “야차상은?”

    “받았네.”

    “그것으로 만족하나?”

    “새외로 떠나 다시는 중원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했네. 그리고 이 일로 자네 같은 든든한 친구를 얻었으니 난 그걸로 됐네. 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조해의 손이 정호기의 등을 두드렸는데, 순간 정호기의 몸이 굳었다.

    “세상 살면서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는 일이 쉬운 일인가?”

    말을 하면서 조해의 눈은 쉴 새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기감은 방을 벗어나 전각을 감쌌다.

    ‘아무도 없군.’

    속으로 안도를 하면서도 말을 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오늘 밤새도록 한번 마셔 보세나.”

    술을 들이켠 조해가 다시 정호기의 혈을 몇 군데 더 점했다.

    -등을 내주다니. 너무 쉬우니 긴장한 내가 오히려 민망하군.

    등에는 치명적인 혈이 많았고, 특히 척추 부근에 마혈이 존재했기에 등을 내주는 것은 목숨을 내주는 것과 같았다.

    마혈을 짚는 것에는 요령이 많이 필요했고 특히나 정확성이 요구되었는데, 자칫 잘못 짚으면 척추를 다쳐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어설픈 이들이 마혈을 찍다가 상대를 반병신으로 만드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아혈을 풀 것이니 만일 큰 소리를 냈다가는 척추를 부숴 버리겠다. 알겠느냐? 알았으면 눈꺼풀을 두 번 움직여라. 좋아.

    조해가 한 손은 정호기의 등에 대고, 다른 한 손으로 턱 부근을 어루만졌다.

    “무슨 짓이지?”

    말을 하는 정호기는 긴장한 가운데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무슨 짓? 이게 내 본모습이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년이 그런 것까지 얘기하진 않은 모양이지?”

    “무슨 말이냐?”

    “뭐, 부정할 줄 알았다만,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대화로 풀어 보자고.”

    다시 술을 들이켜는 조해를 향해 정호기가 물었다.

    “모든 게 거짓이었나?”

    “그래.”

    “세상을 철저하게 속였군.”

    “속은 놈들이 바보지.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 멍청한 계집이 있었으니까. 그년이 한 행동들이라고 난 소문은 사실 내가 한 것이었거든. 병신 같은 년이 겨우 개 새끼 한 마리 죽은 것으로 눈물 질질 짤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지만.”

    “그 눈빛도?”

    “이거?”

    말을 하면서 정호기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은 너무도 맑고 처량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난 어려서부터 세상을 속여야 했다. 가문을 이어받아야 할 내가 그런 소문에 휩싸이면 안 되니까. 원하는 만큼 죽이고 그년을 불러다 칼을 쥐여 주기만 하면 끝이었지. 그걸 하인들에게 보여 주는 거야. 간단하지? 물론 그 옆에서 눈물짓는 연기는 필수였고. 때문에 이따위는 쉽게 할 수 있게 되었지.”

    “유모를 죽였다는 그 말도 거짓이었나?”

    “아니, 그건 사실이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나지. 미칠 듯한 흥분과 함께.”

    말을 하며 눈을 감는 조해의 모습은 처음 그 말을 꺼낼 때의 그가 아니었다.

    전율하듯 바르르 떠는 그는 희열에 취해 있었다.

    “아무리 많은 놈들을 죽여도 그때의 느낌을 찾을 수가 없더라고.”

    철저한 위선자였으며 태어날 때부터 감정의 한구석을 잃어버린 인간, 그것이 바로 조해였다.

    “부모님을 죽인 것도 너냐?”

    “아니, 그건 그년이 죽인 것이 맞아. 뭐라더라? 괴물? 크흐흐흐, 그년이 나와 부모님을 부르던 말이었다. 그날 나만 간신히 미약에 중독된 채로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결국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았지. 하지만 난 죽지 않았어.”

    “그 소문들도 모두 날조된 것이군.”

    “세상은 말이야, 보지 않은 것은 듣는 것만으로도 믿게 되어 있어. 누군가가 작심을 하고 거짓을 퍼뜨리면.”

    “놀랍군. 개방에서도 네놈의 진정한 정체를 몰랐다니.”

    “가족만의 철저한 비밀이었다. 그런데 그년이 그만 그놈에게 누설을 하더니 우리를 죽이려고 한 것이지. 절벽에서 기어 올라와 그 연놈들을 죽이러 갔는데 놓치고 말았다. 뭐, 화풀이나 할 겸 전각들을 부쉈지만 오히려 그것이 나를 삼척동자 조해로 만들어 준 계기가 되었지. 몇 가지는 내가 첨가한 것도 있지만.”

    “이제는 숨길 필요가 없단 건가?”

    “그것도 있고.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기분도 있고.”

    “내가 처음인가?”

    “아니, 몇 번 있었지. 물론 그놈들은 모두 죽었지.”

    “나도 죽일 건가?”

    “말만 잘 들으면 살려 줄 수도 있어. 물론 내 개가 되어서 내가 하는 말에 복종해야겠지만.”

    말을 하며 조해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작은 옥병 두 개였다.

    “이게 뭔 줄 알아? 바로 만독궁이 자랑하는 원앙고(鴛鴦蠱)라는 놈들이야. 암놈을 네놈에게 집어넣으면 내가 수놈을 죽이는 즉시 암놈도 독을 뿜으며 숙주를 죽이지. 문제는 수놈을 내 몸속에 기생시켜야 하는데 혹시라도 잘못해서 내가 네놈을 죽이고 싶어질까 봐 아직 넣지 않은 것뿐이니, 이놈을 넣기 전에 물어보는 것에 사실대로 말해 주면 좋겠다.”

    “무얼 말이냐?”

    “야차상의 비밀. 그것을 듣기 전에 그년이 일을 벌이는 바람에 아직 내 무공이 완성되지 않았거든. 뭔가 들은 것이 있겠지? 응? 그년의 사주를 받고 나를 찾아온 거야, 그렇지? 그 연놈들은 지독해서 아무리 고문을 해도 불지 않더군. 눈앞에서 자식들을 찢어 죽였는데도 말이야.”

    말을 하는 조해의 눈이 광기로 물들어 번들거렸다.

    “그 비밀을 풀려다 늦었군.”

    “그래,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더라고. 자, 그러니 네가 말해 주는 거야. 그러면 네놈은 살려 주지. 물론 내 말에 복종하는 충실한 개가 되기는 하겠지만 목숨은 부지하는 거야. 어때, 괜찮은 조건이지? 그곳에서 야차상의 비밀을 풀며 혹시나 네놈과 그것들이 연락을 취하는지 기다렸지만 전서구나 사람은 오지 않더군. 그리 깊은 사이는 아닌 모양이지? 그럼 의리를 지킬 필요 없잖아?”

    “깊은 사이가 아닌데 야차상의 비밀을 말해 줬다고 생각하나?”

    “그럴 수도 있지만, 뭔가를 맡길 수는 있겠지. 예를 들면 책자 같은 것 말이야.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것이 없다면, 네 목숨도 없는 거야.”

    순박한 미소를 얼굴 가득 짓는 조해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호기가 입을 열었다.

    “그들이 맡긴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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