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27화 (28/137)

27화

천수신의의 말을 요약하면 처음부터 정운룡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고, 그가 태력문에서 도망치듯 떠났다는 것 때문에 패배자란 느낌이 들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백난영과 사랑에 빠지자 더욱 못마땅해 했고.

결국 천수신의가 허락해 주지 않자 그곳에서도 도망쳤기에 정운룡에 대한 미움은 그 농도가 더욱 짙어진 것이다.

이 정도의 내용은 정호기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지만 마지막 말은 그를 놀라게 했다.

“인형설삼이요?”

“그래, 대략 천 년은 넘은 놈이었지. 그걸 캐고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넌 모를 게다. 그런데 그날 바로 그것을 들고 도망쳐 버렸으니 어찌 배신감이 들지 않겠느냐?”

백난영에게 화가 난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너를 보니 허투루 쓴 것 같지는 않구나.”

“제가 그걸 먹었다고요?”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느냐?”

“예.”

“뭐, 가서 물어보면 되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천수신의는 확신하는 것 같았다.

***

‘내가 그런 영물을 먹었다고?’

자리에 누운 정호기는 인형설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하긴, 이상하긴 했지. 난 분명 잔병치레를 하지 않았지만 강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마중마 계획에서 두각을 나타냈거든?’

무공을 배우면서 몸속에 자리하고 있던 인형설삼의 기운이 녹아들어 그런 작용을 했을 것이다.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인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던 정호기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영물 덕이었다니. 조금은 허탈한 기분이었다.

‘현재 내가 가진 내공이 내공심법과 이미 알고 있는 깨달음만으로 얻은 것이라 여겼는데, 그것이 아니라 인형설삼의 기운이 흡수되면서 강해진 것이구나.’

이미 심법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에 받아들이는 속도가 빨라져 내공의 급격한 증가를 가져왔을 것이었다.

[이 바보 같은 녀석들! 영물에 의존하지 않으면 고수가 될 수 없다 여겼느냐! 네놈들의 노력이 부족한 것이란 생각은 왜 하지 못하는 것이냐!]

정호기는 자식들이 눈에 차지 않았고, 내공을 키우려 영물을 찾아다니는 꼴도 보기 싫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최고가 되었다 믿고 있던 그였기에 더욱 한심해 보였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렇게 떠들던 자신도 결국엔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정호기 자신이 한 노력과 타고난 신체적 도움도 무시할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인형설삼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노력이 부족하다라…….’

수련을 하다 찢어지고 쓰러지고 무너진 자식들의 모습을 몇 번이고 봤지만 모두 위선 같았다.

그만큼 노력을 해도 자신이 원하는 기준에는 항상 모자랐으니까.

원치 않던 혼례였고, 그런 부인들과의 사이에서 난 자식들이었기에 더욱 못마땅했는지도 몰랐다.

‘녀석들…….’

스스로의 반성과 자책이 따르자 자식들의 못난 모습보다는 아기였던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거부해도 그것을 모르고 아장아장 걸어오던 모습이…….

***

“자, 장인어른!”

정호기의 우승 소식을 듣고 잔치 준비를 하고 기다리던 정운룡은, 마차에서 내리는 천수신의를 보고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버지!”

놀라긴 백난영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을 차린 정운룡이 천수신의의 발치에 넙죽 엎드렸고, 그 옆에 백난영도 무릎을 꿇었다.

“들어가서 얘기하자.”

백난영의 손을 잡고 일으킨 천수신의가 뚜벅뚜벅 걸어서 멀어지자, 엎드려 있던 정운룡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 뒤를 따랐다.

“도망치는 것만큼이나 장사에도 소질이 있는 모양이구나.”

무공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둘러말한 것이고 태력문에서 도망친 것을 탓하는 의미도 있었는데, 그런 천수신의를 정호기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흠흠! 뭐, 어차피 지나간 과거이고 더 이상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으니 그만하마.”

천수신의의 손을 꼭 잡은 백난영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죄송해요.”

“죄송한 줄 알기는 아는 거냐? 내가 그만큼 이 녀서… 흠, 흠! 알면 됐다. 아까도 말했지만 과거지사가 뭐 그리 중요하겠느냐?”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정호기의 눈길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외조부님, 과거를 묻어 두겠다는 약속은 꼭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저와 호태를 위해서도요. 저는 몰라도 아직 호태는 어리니, 혹시라도 그 일로 너무 부모님을 추궁하면 외조부님께 반감을 가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족이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 딸 하나만 바라보고 키운 천수신의였기에 그 애정이 남달랐다.

이제 늘그막에 딸과 외손자들과 함께 지내려는 계획을 세운 지금, 초장부터 어긋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알고 계셨어요?”

“알다마다! 아무렴 내가 딸자식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지낼 것이라 생각했느냐? 그리고 장이 처음부터 너무 쉽게 자리를 잡는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고?”

천수신의의 말을 들은 정운룡의 얼굴이 굳어졌다.

“흥! 그저 자기가 열심히 해서 이룬 것이라 여긴 모양이구나.”

“…….”

“그럼 아버지께서?”

“그래, 이쪽에 아는 사람이 두엇 있어서 그들에게 부탁을 좀 했다.”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을 죽기보다 더 싫어하던 천수신의였건만 딸을 위해서 허리를 굽힌 것이다.

“아버지……”

백난영은 천수신의의 품에 안겨 오열했고, 정운룡은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백난영이 진정되자 조금씩 이야기도 밝은 쪽으로 흘렀다.

“의원은 어떻게 하고 오신 거예요?”

“어차피 찾아오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환자도 없는데 무슨 걱정이냐? 내가 있는 곳이 바로 의원이지. 거기다 요새는 허리가 쑤시는 것이 아무래도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환자들을 보는 것도 힘이 들더구나.”

천수신의의 말에 백난영이 또다시 눈물을 흘렸지만, 정호기는 속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어지간한 장정들보다 더 기력이 좋으시면서…….’

“아버지, 이제 우리랑 같이 살아요.”

“나이 먹고 너희에게 신세 질 생각 없다.”

정운룡이 벌떡 일어나더니 천수신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신세라니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당치 않습니다! 그동안 못한 도리를 할 기회를 주십시오.”

“흠흠! 그래도 될까?”

“당연합니다.”

“뭐, 그렇게 부탁을 하니 그러도록 하지. 그나저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 인형설삼은 어떻게 한 것이냐?”

“예? 인형설삼이라니요?”

천수신의의 말에 정운룡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는데, 만일 그것이 연기가 아니라면 그는 모르고 있다는 말이었다.

“아버지, 그건 호기에게…….”

백난영의 시선이 정호기에게로 향했고, 그것을 본 천수신의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잘했다. 그러니까 내가 죽을 고생을 해 가며 캔 인형설삼을, 고금을 통틀어도 몇 번 나오지 않은 인형설삼을,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하디귀한 인형설삼을 내 외손자에게 줬다는 말이 아니냐?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천 길 낭떠러지를 기어 오르내려 캐 온 인형설삼을 내 외손자가 먹었다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물론 그때 다친 허리와 팔다리가 좀 쑤시긴 하지만 이렇게 잘 장성한 외손자를 보니 아픈 것도 잊을 만큼 기쁘구나. 손톱이 빠지고 발톱이 부러지며…….”

생색도 이런 생색이 없었다.

‘하아…….’

장장 일각에 걸친 천수신의의 말을 들으면서 정호기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

정호기의 무림대회 우승을 축하하는 떠들썩한 잔치가 끝난 지 보름이 흐른 후, 늦은 저녁에 진청운이 돌아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정호기를 만나러 온 진청운의 안색은 무척 어두웠는데, 그런 그가 인사를 받지도 않고 자리에 앉으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

“그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사부님께서 추천해 주셨을 뿐이죠.”

“노야께서?”

“예.”

정호기의 대답을 들은 진청운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노야께서 신중하시고 능력이 출중하시다는 것은 알겠지만, 아무래도 이번 결정은 성급하셨던 것 같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그는… 위험한 인물이다.”

예상했던 말이었기에 정호기는 그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려 했다.

하지만 진청운의 말이 더 빨랐다.

“만일 네가 그를 이곳에 부른다면 난 가족을 데리고 떠나겠다.”

“사부님, 제 말씀 좀 들…….”

“아니면 내가 그를 죽일 수도 있다. 네게 필요한 인물이라고 해도!”

강경한 진청운의 태도에 정호기는 내심 당혹했다.

이 정도까지 격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마.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 * *

진청운이 돌아간 뒤 정호기는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순간 결정을 내렸는지 그의 눈이 빛났다.

“분명 가지고 있을 거야. 아니면 구해 줄 수라도 있겠지.”

자시가 가까운 시각이었지만 뒤로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천수신의를 찾아간 정호기가 돌아온 것은 축시 말이었다.

“좋아, 준비는 끝났다.”

***

아침을 먹고 기분 좋게 수련에 임하려던 정호기의 계획은 초장부터 어긋났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세 명의 여인이 찾아온 까닭이었다.

“넌 도대체 언제 갈 거야?”

“흥!”

사가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응방으로 쫓으려 했지만 백수련은 끝내 가지 않았고,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정가장에 머물고 있었다.

“왜? 내가 있으면 불편한 점이라도 있어?”

“응.”

“뭐가? 뭐가 그렇게 불편한데?”

“시도 때도 없이 비무하자고 달려드니까 그렇지.”

말을 하면서 정호기가 바라본 곳은 백수련이 아니라 도전적인 눈빛을 뿜어내고 있는 유옥접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도 어찌어찌 따라붙다 보니 이곳까지 왔는데, 정호기가 그녀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백수련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