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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26화 (27/137)

26화

“철저하게 놀림감이 되고 있군요.”

자식의 비무를 보던 사도민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사비연을 향해 말했다.

“그렇구나. 환에는 강, 속에는 환, 강에는 속으로. 아주 골고루 보여 주는구나. 그것도 특정한 초식이 아닌 단지 기본만으로.”

“그만 말릴까요?”

“놔둬라. 당할 때 확실하게 당하는 것이 낫지. 어중간한 마음에 복수심이라도 가지게 된다면 결코 좋을 꼴을 보지 못할 것 같으니까.”

“네.”

대답은 했지만 사도민은 지금이라도 비무를 중지시키고 싶었다.

아니, 아들인 사준우가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길 바라고 있었다.

“쯧쯧, 그렇게 감정을 지우라고 했건만. 천둥벌거숭이가 따로 없구나.”

사준우의 검은 훨씬 빨라졌고 화려하며 힘이 넘쳤다.

덕분에 정호기가 뒤로 밀리는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사비연은 그것을 보고 책망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사도민의 말에 사비연이 맞장구를 쳤다.

“알긴 아는구나.”

한심하다는 듯이 사도민을 바라보던 사비연의 고개가 천수신의에게로 향했다.

“제 풀에 지쳐 쓰러질 것이니 신의께서 수고하실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괜한 부탁으로 귀찮게 해 드린 것은 아닌지…….”

사준우가 비무대회에 나가게 되면서, 천수신의가 근처에 있다는 말에 급히 섭외한 것이었다.

“아닙니다. 장주님이 보내 주신 약재가 큰 도움이 되었는데, 저야말로 할 일이 없으니 민망할 따름입니다.”

둘이 대화를 나눌 때, 사도민이 끼어들었다.

“아, 아버님.”

“왜 그러느냐?”

“저, 저기 좀 보십시오.”

사도민의 외침에 두 사람이 동시에 비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약재값을 할 것 같습니다.”

천수신의의 말처럼 정신없이 밀리고 있는 사준우는 곧 봉변을 당할 것 같았다.

***

쩡!

사준우의 몸이 힘의 방향을 따라 빙글 돌았다.

쩡!

다시 반대로 빙글 돌면서 사준우는 끊어질 것 같은 팔에서 벗어나려는 검을 힘껏 쥐었다.

‘미치겠군! 차라리 그때 패배를 인정할 것을……!’

정호기는 분명 자신에게 기회를 주었다.

뒤로 슬쩍 물러나며 패배를 자인하고 멋지게 물러날 기회를.

하지만 그것을 걷어찬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괴물 같은 놈이구나!’

검과 도가 부딪치며 몸을 돌리는 순간 말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때 느껴지는 살기는 가벼이 넘길 것이 못 되었다.

뒤통수를 따끔따끔 찌르는 살기는 어서 돌지 않는다면 부숴 버리겠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죽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그놈 정도는 되겠지?’

이한이 얼굴을 맞고 어떻게 꼴사납게 실려 나갔는지 봤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졌다라고 외치고 싶었다.

‘이 빌어먹을 살기만 아니라면!’

뒤통수를 찌르는 살기로 인해 말할 틈도 없이 서둘러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쩡!

‘지금이라도 외칠까?’

솔직히 말할 틈도 없다는 것은 변명이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이대로 끝내기 싫다는 고집이 그것을 억누르고 있을 뿐.

슬쩍 바라보니 비무대의 끝까지 밀려났다.

이대로 두어 바퀴만 더 돈다면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좋아. 졌다, 졌어. 하지만 다음에는…….’

“기궈…….”

말을 하려던 찰나 정호기가 휘두르는 도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면서 사준우의 검이 위로 솟구쳤고, 여전히 검을 따라 힘을 이동시키고 있던 사준우였기에 검과 같이 허공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퍽!

옆구리를 도면으로 강타당한 사준우의 몸이 활처럼 휘었으며, 그 모습 그대로 비무대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열호아 정호기 소협이 우승하셨습니다!”

참관인의 말과 함께 함성이 울려 퍼질 때, 사준우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고, 그 주위로 사비연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괜찮으냐?”

“예, 윽!”

말을 하던 사준우가 옆구리를 부여잡고 푹 쓰러졌다.

“제가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천수신의가 사준우를 보는 사이, 정호기 등도 그곳에 도착했다.

“괜찮습니까?”

정호기가 다가가려 하자 사비연이 그를 막아섰다.

“패자에게 어울리는 것은 동정이 아닌 무관심이네. 자네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라 바로 저 위네. 가서 승자의 여유를 즐기도록 하게나.”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비꼬거나 에둘러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 구경꾼들은 열호아를 연호하면서 정호기를 부르고 있었기에, 백수련도 비무대 위로 올라가라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와아~!

정호기가 비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의 환호는 더욱 커졌고,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

참석한 사람들과 구경꾼들을 위한 연회가 벌어졌고, 정호기는 따로 사비연 등과 함께 자리를 가졌다.

“허허허, 축하하네. 그래, 검은 마음에 드는가?”

손자가 박살이 났는데도 사비연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마음에 듭니다. 다만 제가 도를 사용하니,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줄 수밖에 없겠군요.”

“현철을 섞어 천 번의 담금질을 한 것이니 누구에게 준다고 해도 마음에 들어 할 것이네.”

은근히 상품으로 내걸린 검을 자랑하는 사비연의 속내는 웃고 있는 얼굴과 같이 마냥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무재라고 해도 지금 나이로 이 정도의 무력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깨달음이고, 가늠할 수 없는 깊이다.’

아들인 사도민이나 손자인 사준우와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것 같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끊임없는 의혹이 새록새록 솟아나고 있었다.

젊은 시절 두각을 나타내다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긴 했지만, 지금까지 정호기가 보인 무력은 그 정도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천고의 기재를 찾아 문파의 사활을 걸고 모든 역량을 쏟아 붓는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물론 실패하면 쪽박인 셈이고.’

구대문파에서 이런 모험을 해서 성공을 한다면 정호기보다 더 뛰어난 무인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천하제일인을.

물론 성공한다면.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진청운과 정가장의 능력으로는 이렇게까지 키우는 것도 힘들 것이라 생각되는데…….’

또한 그런 노력에도 실패할 가능성이 너무 크기에 감히 함부로 시도하기도 힘들었다.

‘진청운… 그자는 정파에 좋지 않은 생각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인물이야.’

생각이 정호기에게서 진청운에게로 옮겨 갔다.

‘혹, 불순한 세력과 손이라도?’

현재 무림은 육십여 년 전에 있었던 삼대 사파, 만독궁과 벌였던 정사대전이 끝난 이후로 평온한 상태였지만 아직도 흑룡문과 파천궁은 건재하였고, 만독궁도 남만으로 쫓겨 갔을 뿐 혈련처럼 멸문한 것이 아니었기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태였다.

거기다 요즘 중원에 일고 있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과 너무 긴 평화에, 정파 내부에서도 위기감을 가져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는 중이었다.

‘경계할 필요가 있겠어.’

너무 비약적인 것일지도 모르지만, 사비연의 생각은 점점 그 가지를 넓혀 가고 있었다.

그때, 사준우를 보살피던 천수신의가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뼈가 두어 개 부러졌지만, 내장을 다치지는 않았으니 안정을 취하면 곧 회복될 겁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인사드리게. 이분은 천수신의라 불릴 정도로 손이 빠르고 의술이 뛰어나신 백 대협이시네.”

사비연이 소개를 하자 정호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넙죽 엎드려 대례를 올렸다.

그 모습에 연회장에 있던 모든 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천수신의의 얼굴에는 만족한 미소가 가득했다.

“외조부님을 뵙습니다.”

“어미가 말하더냐?”

‘역시 알고 계셨어.’

“예.”

“흐흠…….”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을 보니 백난영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밝혔다는 것이 꽤나 기쁜 것 같았다.

“어르신을 뵈어요.”

제일 먼저 인사를 올린 것은 백수련이었고, 뒤이어 진수수와 유옥접이 그녀를 따라 인사를 했다.

“일어들 나려무나.”

천수신의가 정호기 등을 일으킨 후에 사비연을 바라보았다.

“미리 말씀 못 드린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이거야말로 병 주고 약 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손자는 두들겨 패고 그것을 외조부가 고친 격이니.

“아닙니다. 그나저나 정 소협이 신의님의 외손자라니……. 생각지도 못했군요.”

‘과연 그런 것인가?’

정호기의 급작스러운 등장에 의구심을 품었던 사비연이었지만, 천수신의가 외조부라는 사실에 그것이 조금은 퇴색되었다.

자고로 신의라고 불린 이들 중에서 영약 하나 꼬불쳐 두지 않은 이들이 없었고, 또한 천수신의는 침술에 있어서 최고봉의 자리에 올라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손자를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것이다.

‘진청운과 천수신의라…….’

진청운 혼자라면 모르되 오래전부터 정파에서 이름을 알린 천수신의까지 싸잡아 엮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용이 여의주를 얻고 구름을 탔구나.’

최고의 무인과 뛰어난 무공, 그리고 그것을 높여 줄 의술까지.

조금은 무리가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고, 정호기가 천수신의란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세간의 의혹을 흐릴 수 있는 역할.

‘하지만 더 올라갈 수 있을까?’

사비연의 이 생각은 우려 같았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것은 인간 본연의 감정이었다.

질시(嫉視).

그렇다.

지금까지 사비연이 정호기를 평가한 것에는, 정파 무림의 원로라는 위치도 있었지만 사준우의 조부라는 점도 작용을 했었다.

뛰어난 무인의 탄생을 축하하기보다는, 어떻게든 흠을 잡고 싶은 감정과 손자를 밟고 올라선 자에 대한 질투가 섞여 버무려졌던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비연도 인간이었고, 손자를 사랑하는 할아버지였으니까.

***

“같이 가시지요.”

백수련 등이 옆에서 수발을 든다고 부산을 떨다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간 후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싫다.”

“어머니께서도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그 말에 천수신의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정말이냐?”

“예. 하지만 너무 죄스러워 찾아뵙지 못할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흥! 죄송한 줄은 아는 모양이구나.”

“그러니 이번에 같이 가시죠.”

술잔을 들어 들이켠 천수신의가 정호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는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아느냐?”

“…….”

“정확한 얘기는 해 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지금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이유는 알아야지. 아니면 나만 못된 늙은이가 되지 않겠느냐?”

천수신의는 자신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기에 정호기는 그가 왜 정운룡과 백난영을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궁금해졌다.

“알겠습니다. 대신 장에 돌아가시면 다시 그 일을 꺼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았다. 뭐, 좋은 일이라고 계속 우려먹겠느냐? 나는 다만 네가 궁금할 것 같아 말해 주려는 것뿐이다. 알겠느냐?”

“예.”

“에… 그러니까 네 애비가 거의 반 죽어서 왔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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