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24화 (25/137)
  • 24화

    한 잔, 두 잔…….

    비워진 술동이가 쌓여 갈 무렵 조해가 입을 열었다.

    “우리 가문을 알고 있겠지?”

    취기가 오른 것일까?

    조해의 말투가 변했다.

    “안휘 조가라고 하면 모두가 알아주는 무가로, 특이하게 검과 도를 함께 가르치는 곳이었지.”

    “크큭, 그래. 선조께서는 검과 도의 장점을 결합해 하나의 무공을 만드셨는데, 그것이 바로 천검지도(天劍地刀)였네. 문도들은 천검과 지도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을 배웠고, 두 개를 동시에 사용하는 천지합일은 대대로 문주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이었어. 동생은 그게 불만이었네. 왜 자신은 안 되냐면서.”

    “겨우 그따위 이유로 부모님을 죽인 건가?”

    “그것도 이유 중의 하나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 때문이었을 거야. 못난 나 때문에…….”

    잠시 말을 멈추고 술잔을 바라보던 조해가 말을 이었다.

    “우리 가문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동물을 기르게 한다네. 그것이 개가 되었든 고양이가 되었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왜 그런지 아는가?”

    “…….”

    “생(生)을 거치기 위함이지. 아기 때부터 같이 뒹굴고 자고 먹이를 주고, 어찌 보면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내게 한 뒤에 죽이게 하는 걸세.”

    잔인하게 생각되지만 사실 드러내 놓고 말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이런 방법을 쓰는 곳은 더러 있었다.

    “동생은 그때 뭔가를 함께 잃어버린 모양이었네. 그 뒤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했으니까.”

    “어떤?”

    “겨우 일곱 살의 여아가 강아지를 해체하는 것을 정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것도 웃으면서.”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것들은 많지만 그것은 잃어버릴 것도 많다는 것을 뜻했고, 그중에서 어떤 것들은 인간을 괴물로 만들거나 겁쟁이로 만들 수도 있었다.

    “자네는? 자네는 뭘 길렀지?”

    “나? 크큭…….”

    정호기의 질문에 조해가 쓴웃음을 흘렸다.

    “난 동물이 싫었네.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그럼?”

    “어머니를 대신해 젖을 주고 나를 길러 주던 유모를 따랐지. 어머니와 같이 잔 기억은 없지만 유모의 품에서 잠든 적은 많았네. 아마 그것도 아버지의 의도였겠지.”

    말을 마친 조해가 고개를 들어 정호기를 바라보았는데, 사십이 넘은 나이에도 조해의 눈은 마치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았다.

    “죽였나?”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네. 조금씩 내려오는 눈꺼풀 속에서 나를 바라보던 그 눈동자가, 내 손을 붉게 물들이던 따뜻한 느낌이. 지금도 눈을 감으면 바로 어제처럼 떠오르고 꿈속에서는 그날의 일이 반복되지.”

    조해는 처량하게 말했지만 듣는 정호기는 속으로 한심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겨우 그 정도에 무너졌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결국 고치지 못했나?”

    “그래. 별짓을 다 했지. 피 구덩이에서 사흘을 보내거나 굶주린 늑대들 사이에 던져진 적도 있었네. 그러나 피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 더욱 커질 뿐이었어. 늑대들이 내 살을 씹어 먹는 모습을 보면서도 난 그것들을 죽일 수 없었지.”

    말을 하면서 슬쩍 옷을 들췄는데, 옆구리에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엉덩이에도 있다네.”

    여차하면 보여 줄 기세였지만 정호기는 절대 보고 싶지 않았기에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야차상은?”

    “어머님의 선물이네. 여린 나에게 강한 마음을 가지라는 격려였지. 내가 지금까지도 무림대회를 전전하는 것은 그것을 이루기 위한 도전이네.”

    ‘단지 어머님의 선물이라는 이유로 찾으려는 거란 말인가?’

    뭔가 좀 더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긴 정호기였기에 조해의 대답에 실망스러웠다.

    ‘한때는 내 상징과도 같았는데…….’

    강철과도 같은 강도를 자랑한다는 만년홍옥으로 만들어 잘 깨지지 않고 사시사철 따뜻한 기운을 내뿜던 야차상은, 정호기가 사용하던 검의 손잡이에 붙어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었다.

    ‘멋들어지긴 했지.’

    야차상으로 인해 흐트러질 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동안 자신을 지켰던 분신과도 같은 검을 버리고 새로 만들어야 했지만, 후회한 적은 없었다.

    “자네는 야차상에 대해서 어떻게 알게 되었나? 그들과 얘기라도 한 것인가?”

    “그건 자네가 돌아오면 말해 주겠네.”

    정호기는 대답을 피했다.

    “같이 가 줄까? 혼자 가 봤자 제대로 하지도 못할 것 같은데 말이야.”

    “아니, 이건 나 혼자 해결할 문제야. 만일 그곳에서 내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다면 그땐 자네에게 내 영혼을 주겠네.”

    ‘아마도 야차상을 찾으면 변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에 매달리는 모양이군. 그걸까? 그게 이놈을 변화시킨 걸까?’

    그 뒤로 몇 잔의 술을 더 나눈 후에 조해에게 둘의 위치를 가르쳐 준 정호기가 방을 나섰다.

    ‘기다리겠다. 네가 진정한 야차가 되어 돌아오기를.’

    흑룡문의 문도들을 거침없이 주살하던 조해는 배신자인 친구와 여동생을 죽이고 성격이 변했었다.

    그렇기에 정호기는 조해가 그들을 찾는 목적이 죽이려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예상은 틀렸다고 해도 조해가 그들을 만나면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니, 이제 정호기는 자신이 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객점을 나서던 정호기가 남겨진 조해가 있는 방을 한 번 바라보고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사람이 부족해…….’

    ***

    쨍!

    도와 륜이 만나 불꽃이 튀었고, 서로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지금 정호기와 비무를 하는 것은 이십 대 중반의 여인이었는데, 톱니와 같은 날을 가진 한 쌍의 륜을 양손에 나눠 쥐고 정호기를 압박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법인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인은 각진 얼굴에 눈매가 날카롭고 몸은 호리호리하다기보다 단단한 강철을 보는 것 같았는데, 공격을 할 때마다 드러나는 팔은 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쫙쫙 갈라진 잔 근육들이 요동을 쳤다.

    화산일미 방은진이 봄바람에 몸을 떠는 한 떨기 매화라면, 이 여인은 비바람에 시달리며 절벽에 핀 이름 모를 꽃이라고나 할까? 그런 분위기였다.

    “흥!”

    여인, 유옥접이 코웃음을 쳤지만 그것은 분한 감정을 표출한 것이었다.

    륜은 속도가 관건었는데, 무기가 서로 부딪치는 순간 정호기가 살짝살짝 힘을 실어 원활한 공격을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이 능구렁이가!’

    저릿한 손을 느끼며 유옥접이 정호기를 째려보았다.

    ‘좋아! 힘으로 하자, 이거지?’

    “하압!”

    쩡!

    두 개의 륜과 도가 맞붙어 서로의 숨결까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되었을 때, 유옥접의 무릎이 정호기의 배를 노리고 솟아올랐다.

    퍽!

    “으윽!”

    허벅지를 감싸 쥔 유옥접이 뒤로 물러나며 신음을 흘렸는데, 그녀의 시선은 도를 쥐고 있는 손에 머물러 있었다.

    ‘겨우 한 손으로?’

    유옥접의 두 손을 한 손으로 감당한 것이다.

    ‘내공이 높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보법의 속도를 올려 무기를 부딪치지 않으려는 시도도 했지만, 번번이 마치 자신이 어디로 공격할지 안다는 듯 커다란 도로 투로를 막았기에 그것도 실패했었다.

    ‘역시… 어제 이한이란 놈의 얼굴을 뭉개 버린 것도 우연이 아니었어.’

    ***

    “고놈, 여간내기가 아니구나.”

    정호기의 비무를 보면서 사비연이 옆에 앉은 사준우에게 말을 걸었다.

    “확실히 뛰어나네요. 정보대로라면 겨우 팔 년인데 말입니다. 진 대협의 내공심법이 그렇게 뛰어난 것이었습니까?”

    “글쎄다. 내공심법에 대해선 들어 본 바가 없으니 뭐라 말하기 힘들구나. 하지만 심법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것을 익히는 이가 부실하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법. 아마도 제대로 된 놈인 모양이다.”

    흔히들 무공서와 심법만 최고를 얻으면 무조건 최강의 무인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물론 뛰어난 것이 있다면 좋은 일이지만 분명 한계가 존재했다.

    현재 중원을 대표하는 문파들이 가진 무공이나 내공심법을 비교하자면 비슷하다 할 수 있었다.

    검법은 무당, 내공은 소림이라고 하지만 미세한 차이일 뿐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오래전에 두 문파에 의해 중원은 평화를 맞았을 테니까.

    역대 고금 최강자들 중 무당과 소림에서 나온 이들이 많기는 했지만 전부가 아니었고, 가장 가까운 예로 청성의 무진자가 전대 천하제일인이었다는 것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었는데, 결국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익히는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삼재검법과 토납법을 절세기재가 평생을 수련한다고 고수가 될 수는 없는 것처럼, 무공과 사람이 어느 정도는 균형을 이루어야 고수가 되었다.

    “검법이 아니라 내심 아쉬웠는데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어제도 그랬지만 마치 투로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투로를 아는 게 아니다. 공격이 들어올 방향을 선점하는 것이지.”

    “예? 그게 그거잖아요.”

    “투로를 안다는 것은 상대의 초식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공격이 들어올 방향을 선점한다는 것은 상대를 안다는 것이다.”

    친절한 설명에도 사준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사비연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빡!

    “아악!”

    느닷없는 일격에 사준우가 원망스러운 눈동자로 바라보자, 사비연이 미소를 지었다.

    “넌 나한테 맞고도 반격을 못하고, 난 그것을 알고 있으니 이렇게 마음 놓고 때릴 수 있는 것이다. 알겠느냐? 삼척동자 조해가 사람을 해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대라면, 방어를 무시하고 공격만 하면 되는 것처럼.”

    “그게 가능한 얘기예요? 저렇듯 짧은 순간에?”

    비무라고 해 봤자 겨우 일각의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기에, 사준우는 그 안에 상대의 성향을 파악해 대응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쯧쯧, 고수끼리의 싸움에서는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도 서로를 알게 되는 것이다. 무인의 싸움은 내공이나 무공의 고하를 떠나서 적을 얼마나 빨리 파악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늘. 도대체 장주는 무엇을 가르친 것인지…….”

    사비연의 책망을 들으며 사준우는 앞날에 먹구름이 끼는 것을 느꼈다.

    분명 사비연은 부친인 사도민에게 한 소리 할 것이고, 그것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를 덮칠 것이니까.

    “이번에 좋은 경험을 한다고 생각해라.”

    이미 사비연은 사준우가 진다는 쪽으로 생각을 굳힌 것 같았다.

    ‘내가 진다고?’

    사준우의 마음속에서 호승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