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23화 (24/137)

23화

“오빠, 너무한 거 아니야?”

저녁을 먹으면서 진수수가 물었다.

“뭐가?”

“도로 후려칠 것까지는 없었잖아.”

“내가 친 게 아니라 그놈이 와서 맞은 거지. 봤잖아? 그리고 참관인도 그것을 인정했기에 내가 이긴 것을 인정했고.”

정호기의 도에 얼굴을 얻어맞은, 아니 도에 얼굴을 들이받은 청년은 현재 자신의 방에서 끙끙 앓고 있었는데, 때문에 객청의 분위기가 조금 살벌해졌다.

“하긴 이상했어. 왜 오빠가 반대로 휘두른 곳으로 얼굴을 디밀었을까? 그러니까 그분들이 투로(鬪路)를 알고 있었던 것 아니냐고 물어보지.”

“처음 만난 사람들의 투로를 내가 어떻게 알아? 게다가 뭐라고 했지? 행운유수권(行雲流水拳)? 그런 권법이 있다는 소리도 처음 들었다.”

“하긴, 나도 못 들어 본 것 같아. 그래도 마지막에 힘을 뺄 수는 있었지?”

백수련의 은근한 물음에 정호기가 침묵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그나저나 큰일이구나. 같은 전각에 머물면서 얼굴을 붉히게 됐으니…….”

정호기를 비웃던 청년, 이한과 일행은 아직까지도 산화표국의 객청에 머물고 있었다.

‘그놈이 그따위 헛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다치게는 하지 않았을 텐데. 아니, 그것도 있지만 내가 좀 변한 것이 문제겠지.’

정호기는 자신의 성격이 조금씩 변해 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젊었을 때의 기분을 찾아간다고 할까?

나이가 들면서 나아지기는 했지만 젊었을 때는 무모할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수틀리면 같은 소속이라고 해도 봐주지 않을 정도로.

때문에 혈신이라는 별호를 얻기 전까지 그는 야차로 통했다.

[태력문의 애송이보다는 좀 하는구나.]

이한이라는 하룻강아지가 이죽거리며 외친 말이었다.

‘태력문의 누구를 이긴 거지?’

궁금하긴 했다.

자신이 겪어 본 태력문의 무사들은 결코 그 애송이에게 질 정도로 녹록하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가?”

식사를 마치고 도를 들고 일어서는 정호기에게 진수수가 따라붙었다.

“바람 좀 쐬려고.”

“나도 같이 가도 돼?”

“안 돼.”

새치름한 진수수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온 정호기의 눈에 달을 보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이한의 사부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모른 척 지나치려는 정호기에게 노인이 말을 걸었다.

“우리는 내일 이곳을 떠날 걸세.”

“제자분의 일은 유감입니다.”

“그 녀석의 실력이 부족한 것을 어찌하겠나? 한 번쯤 패배의 쓴맛도 경험할 때가 되었다 생각했네만, 그것이 이렇게 독할 줄은 몰랐네.”

“더 높이 올라가시리라 믿습니다.”

말을 마친 정호기가 걸음을 재촉하려 했지만 노인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순양현의 정가장이라고 들었네. 혹시 다음에 다시 찾아도 되겠는가?”

이한의 몸이 낫고 실력이 좋아지면 재 대련을 하자는 말인데, 노인의 말을 듣는 순간 정호기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걸 간과하다니… 오히려 멍청해졌다는 말인가?’

단지 비무에 졌다고 다시 찾는데, 자신들의 일을 망치면 어떨까?

거기다 그곳이 사파를 대표하는 흑룡문이라면?

스스로를 자책하느라 대답을 하지 못하자 노인이 다시 물었다.

“물론 시간이 좀 걸릴 걸세. 그 녀석이 이번 일을 얼마나 빨리 극복하느냐에 달렸지만 말이네.”

“예? 아, 예, 알겠습니다.”

“고맙네.”

노인이 감사의 인사를 하며 전각으로 돌아갔지만, 정호기는 감사의 인사 따위는 생각도 않고 있었다.

‘음… 어떻게 한다?’

지난 팔 년간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가문의 안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가족들의 안위였다.

지금이야 아무런 걱정이 없지만 만일 흑룡문과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면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

‘그게 내가 한 일이었는데, 그걸 잊고 있었다니…….’

아무리 마중마 연성 계획에 의해 수련을 했다고 해도 일거에 산을 가르는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처음 그들이 맡은 임무는 적의 본거지를 흔들어 놓는 일이었다.

정파의 힘이 뭉치면 뭉칠수록 흑룡문에 불리하게 될 것이니, 그들의 가족이나 터전이 있는 곳을 공격해 모든 힘이 집중되지 못하게 방해를 한 것이다.

‘거기다 흑룡문이 있는 중경과는 가까우니 분명 내가 정파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장을 치겠지? 공손 놈이 있는 한 변하지 않을 거야.’

만악복(萬惡畐) 공손우.

만 가지 악으로 가득하다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공손우는 마중마와 천이 계획을 추진한 인물로, 앞으로 있을 정파와의 대결에서 가장 위험한 자라고 할 수 있었다.

‘멍청한 놈!’

아마도 정호기가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혈신으로 살면서 본거지, 즉 흑룡문에 대한 걱정을 해 본 적이 없어서일 것이다.

멍하니 서서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던 정호기가 고개를 흔들더니 생각을 접었다.

‘차차 생각해 보자.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뎅~

멀리서 술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

산양현에 위치한 객점 안에 두 사람이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말해 주시오.”

조해의 말에 정호기가 술잔을 들었다.

“일단 한 잔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먼저 말해 주신다면 한 잔이 아니라 천 잔이라도 드리겠소.”

말을 하면서 앞에 앉은 조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호기는 속으로 약간 흥분한 상태였다.

삼척동자 조해로 불리며 패배자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인물.

얼굴 반쪽에 화상의 흔적이 흉측하게 자리하고 있지만, 그것이 진짜인지는 조해 자신만이 알 것이다.

‘과연 승낙할까?’

올해 마흔두 살로 역용의 달인이자 뛰어난 무공을 소유한 조해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했다.

그만큼 갖고 싶었지만 원하는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밑에 두고 부릴 수는 있을 것이라고 정호기는 생각했다.

“천 잔의 술로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소?”

“…….”

입을 다문 조해가 처분만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거두고 싶소. 아니, 갖고 싶소. 당신의 영혼까지.”

대담한 말이었고, 어찌 들으면 황당하기까지 한 요구였다.

정호기의 말에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조해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말이 만약 사실이라면 가질 수 있을 거요. 내 영혼까지도…….”

십 년 전, 조해는 누구보다 행복한 남자였지만 하루 만에 가장 불행한 남자가 되었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가족을 비롯해 모든 것을 잃은 남자.

그 배신의 뒤에 자신의 여동생이 있다는 것도 그를 절망하게 만든 이유 중의 하나였다.

독에 중독된 상태로 절벽에서 떨어졌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찾아간 집에서 보게 된 인륜과 천륜을 저버린 현장.

불타는 전각들을 바라보던 그가 자신을 배신한 친구를 찾아가 복수를 하려 했지만 끝내 그는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을 용서해서가 아니었다.

검을, 도를 휘두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죽일 수 있겠소?”

“…….”

영혼이 파괴당한 자, 하지만 조각조각 나뉜 영혼으로 갈구하는 자.

그것이 조해였다.

정호기가 죽여줄 수 있었다.

아니, 다른 누구를 시켜 그 일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조각난 영혼은 구제받지 못할 것이고, 정호기가 원하는 조해를 얻을 수 없으리라.

[크하하하하하!]

광소와 함께 흑룡문도들을 주살하던 조해를.

‘내가 필요한 건 그런 모습의 너야. 지금처럼 쓸모없는 존재가 아닌.’

품에서 소도를 꺼낸 정호기가 느닷없이 팔에 상처를 냈다.

방울방울 솟아오르는 피를 보고 흠칫 놀란 조해는 마치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기라도 하려는 듯이 몸을 뒤로 뺐고, 그 모습을 본 정호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극도의 분노로도 극복하지 못한 명(命)의 저주.

그것은 죽음보다 깊고 잔인했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겪었기에 피까지 두려워하는 신세가 된 것이지?’

절벽에서 기어올라 원수를 찾아간 조해는 모든 것을 때려 부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다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스친 사람도 없었다.

건물에 깔려 죽은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배신자인 친구와 천륜을 저버린 여동생을 앞에 두고도 검을, 도를 휘두르지 못했고, 그렇게 조해가 떠나 버린 후 두 사람은 자취를 감춰 버렸다.

이것이 널리 알려진 조해의 사정이었다.

“왜 찾아다니는 것이오? 당시에도 죽이지 못했고 보아하니 지금도 죽이지 못할 것 같은데, 도대체 찾아다니는 이유가 무엇이오?”

“되찾아야 할 것이 있소.”

조해의 말을 듣자마자 정호기의 뇌리에 그의 최후가 떠올랐다.

마지막 순간 몸이 반 토막이 난 상태로도 잡으려 애쓰던 그것.

“야차상?”

정호기의 말을 들은 조해의 눈이 빛을 뿜었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얼굴에 긴장한 빛이 넘쳤다.

“그것을 어떻게 아셨소?”

그것은 조해만의 비밀이었고, 설사 그의 여동생이나 친구와 대화를 나눴다고 해도 쉽게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의심 가득한 눈으로 정호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맞군.’

무심코 나온 말에 조해가 의문을 표하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들이 보냈소?”

이제는 경계까지 한다.

조해를 찾는 것은 쉬웠다.

본선에 오른 이들 모두에게 전음으로 배신자와 여동생의 이름을 알려 주고 반응을 보면 간단했으니까.

그리고 그를 끌어들이는 것도 쉽다 여겼는데, 한마디의 말이 일을 그르치게 만들게 생긴 것이다.

“그들이 보냈다면 내가 지금 얌전히 있겠소?”

그러나 조해의 몸은 움츠러들고 손은 허리로 향했으며, 다리는 굳게 바닥을 밟아 언제라도 뛰쳐나갈 태세를 갖추었다.

“당신을 제압하고자 했다면 언제라도 가능했소. 지금처럼.”

팔에 힘을 불끈 쥐자 아까 소도로 상처를 냈던 곳에서 피가 용솟음쳤고, 그것을 조해에게 뿌린 후에 정호기가 신형을 날렸다.

“헛!”

피가 주는 두려움에 조해가 움찔한 순간, 그 찰나지간이 승패를 갈랐다.

“아셨소?”

머리 위 한 치의 틈을 남겨 두고 도를 멈춘 정호기가 조해의 눈을 바라보았다.

불안한 듯 쉴 새 없이 조해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은, 머리 위에 있는 도 때문이 아니라 도를 쥔 손에서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는 피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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