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하, 합격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등을 돌리고 돌아서는 정호기를 보던 감철민이 접수대에 있는 문사를 바라보며 검을 머리 위로 곧추세웠고, 그 모습을 본 문사가 품에서 은패를 꺼냈다.
“열호아 정호기 소협, 합격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오 일 뒤에 오시면 됩니다. 그때 대진표가 작성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합격을 한 이들은 모두 철패를 받았는데, 처음으로 은패를 획득한 이가 나온 것이다.
“열호아 정호기? 자네는 들어 봤나?”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그 왜, 작년에 구례에서 마적단을 토벌했다고 했잖아? 그때 비슷한 이름을 들은 것 같지 않아?”
“아, 염라도를 죽였다는?”
“그래! 어쩐지 어디서 들어 봤다 했지! 그나저나 덩치는 산만 한데 움직이는 것은 삼월이 허리보다 더 부드럽구먼.”
“이놈은 꼭 비교를 해도… 삼월이 허리가 뭐냐, 삼월이 허리가.”
자신을 두고 쑥덕이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정호기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아마 마방에서 만났던 이도준인가 하는 놈이 전갈을 넣은 것일 수도 있겠군. 어쨌거나 이제 무림대회에서 우승만 하면 내가 노린 것의 반은 이룬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화산에 이어 종남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으니, 화룡점정처럼 무림대회에서 우승을 한다면 열호아 정호기의 이름은 최소한 섬서에는 널리 퍼질 것이었다.
* * *
“은패를 받다니, 장하구나.”
“대단한 일입니까?”
객점에서 술을 마시며 정호기가 물었다.
“사가장에서 초대한 인물들은 모두 금패를 받는단다. 자신도 영광이고 금전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것이지. 은패는 금패를 받을 자격이 있음에도 받지 못했다 여기는 이들에게 주는 것인데, 만일 비무에서 금패를 받은 이를 한 명이라도 이기면 다음 무림대회에는 금패와 함께 초대장을 받을 수 있단다.”
“금패라… 돈이 많이 들겠군요.”
철패, 은패의 크기가 손가락 하나 정도만 했으니 금패도 그와 비슷할 것이다.
“사가장과 만금장에서 열리는 무림대회는 서로의 재력을 과시하고 친분을 도모하는 자리이니만큼 조금 무리를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만한 대가를 얻기도 하니까 손해 보는 것은 아니란다.”
“제가 생각하기론 그다지 쓸모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어떤 이는 지루한 소모전이라고 말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무림에서 지명도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에도 중요하단다. 그것이 곧 신용이 될 수도 있으니까. 뭐, 그것이 아니라고 하여도 이번 무림대회로 인해 산양현에는 많은 이들이 몰려들면서 그들이 돈을 쓰는 만큼, 상인들은 사가장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낄 테니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이점도 있고.”
“만금장과 사가장은 이미 가질 만큼 가진 이들이 아니겠습니까? 어째서 서로를 견제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싸움이 더 치열할 때도 있단다. 저잣거리를 보거라. 흥하고 망하는 점포가 하나둘이더냐? 만금장과 사가장을 좀 더 큰 점포라 생각하면 된다.”
‘역시 가문은 호태에게 넘겨야겠다.’
진청운의 말을 들으면서 정호기는 자신에게 상도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일 자신이 사가장이나 만금장의 입장이라면 벌써 상대를 박살냈을 테니 말이다.
그때, 진청운의 전음이 들렸다.
-조 대협은 언제 찾을 생각이냐?
이곳에 온 목적이 조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진청운은 정호기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 혹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물은 것이었다.
-충분히 시험을 통과했을 것이니 비무가 시작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를 어떻게 알아보겠다는 것이냐? 내가 듣기로 조 대협은 역용술이 뛰어나다 했는데.
사실 이걸 물어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조해를 찾는다 해도 그를 어떻게 끌어들이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부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이 있습니다.
-알았다.
‘노야께서 그를 설득할 방법도 가르쳐 준 것일까?’
묻고 싶었지만 굳이 꼬치꼬치 캐묻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오빠, 아까 사가장 사람들이 뭐라고 한 거야?”
“응? 그거? 사가장에 거처를 마련해 줄 수 있다고 했는데 거절했다.”
“왜?”
“산화표국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아아…….”
은패를 받은 무인이 머문다는 소문이 퍼지면 산화표국에 대한 이름이 올라가기 마련이다.
물론 그 정도로 얼마나 효과가 있겠냐마는, 그렇다 해도 조금 인지도가 생겼다고 해서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산화표국을 버리고 사가장으로 들어간다면 산화표국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이럴 때 보면 속이 깊은 놈 같고…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단 말이야.’
진청운은 정호기를 알면 알수록 더욱 빠져드는 깊은 수렁과 같다고 생각했다.
“자, 그러면 이만 들어가도록 하자꾸나.”
비무도 중요하지만 시험을 치르는 이들을 관찰하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가르치며 배운다.
이는 고수가 하수를 가르치면 상대의 부족한 점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인데, 하수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들의 단점을 파악해 혹시라도 내가 그것들을 간과하지는 않았는지 되새겨 보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고수들의 싸움에서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 여기지만, 그것은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고수들은 이미 체계를 확립해 오히려 발전이 없었고, 그들은 수를 늘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수를 줄이려 했기 때문이다.
그들 간의 대결에서 뭔가를 얻으려면 생사결을 펼치는 것을 보지 않는 한 힘들었다.
진청운이 하려는 것이 바로 하수들의 움직임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인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
“어찌 보느냐?”
진청운의 물음에 정호기가 시험관의 움직임을 살피다 대답했다.
“강의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종남은 환(幻)에서 시작해 강(剛)을 지나 속(速)으로 바뀌는 검술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속을 터득한 연후에는 속과 환을 결합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마지막에 강을 융합하였는데, 그것이 종남파 최고의 검법인 천하삼십육검이었다.
“쯧쯧, 강은 무슨 강. 내가 보기엔 아직 환도 제대로 못 벗어났구먼.”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정호기 등의 시선이 쏠렸다.
수수한 마의를 입은 호호백발의 노인이었고, 마른 몸에 지팡이까지 짚고 있는 것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촌부의 모습이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진청운의 물음에 노인이 멀뚱한 얼굴로 되물었다.
“나? 그저 할 일 없는 노인네지. 그러는 자네는 누군가?”
“순양현 정가장의 총당주를 맡고 있는 진청운입니다.”
“감숙 진가가 아니고?”
“절 알고 계시는군요.”
진청운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자네를 어찌 알겠는가? 자네의 조부라면 알고 있지만.”
진우현을 안다는 말에 진청운의 안색이 어두워졌는데, 그런 이들 중에서 좋은 관계를 가진 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숙 진가의 청운입니다.”
“그래야지. 자네 조부님과 아버님께서 비무를 하셨었지. 아주 인정사정없더구먼.”
보지 않았어도 어떠했을지 짐작이 갔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지금 그런 일이 있었다면 환호하는 이들로 넘쳐 날 걸세. 아버님도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셨고. 그나저나 이 청년이 자네 제자인가?”
“정호기입니다.”
“허허허, 듣던 대로 덩치가 좋구먼. 그런데 이 녀석은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게야?”
노인은 정호기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누군가를 찾는 듯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어느새 노인의 뒤에 왔는지 잘생긴 청년 하나가 노인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이 녀석아, 할아비 아직 귀 안 먹었다.”
“당장 오지 않으면 집을 나가시겠다니. 그게 하실 말씀이세요?”
청년이 그렇게 노인에게 따지고 있을 때, 아이를 안은 젊은 부부가 다가왔다.
“어르신, 안녕하셨습니까?”
“할아버지, 아직도 그런 되지도 않는 협박으로 우 오라버니를 못살게 구시는 거예요?”
부부가 뭐라고 했지만 그들의 인사는 받지도 않고 노인은 여인의 품에서 아기를 받아들더니 아기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오! 그 녀석, 여전히 똘똘하게 생겼구나.”
노인이 외증손자와 놀고 있을 때, 여인에게 우 오라버니라 불린 청년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사준우라고 합니다.”
“종남의 송하민입니다.”
처음 사준우라는 청년의 인사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던 정호기가 송하민이란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서로 인사를 나눈 후에 그에게 물었다.
“혹시 아드님입니까?”
“예, 기영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기영이란 이름을 들은 정호기가 마치 뭔가에 홀린 듯 아이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갸아… 아우…….”
노인의 손가락이 볼을 찌를 때마다 마치 그 손길이 싫은 듯 옹알거리는 아기의 모습을 보던 정호기가 노인을 따라 하듯 볼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아우… 규이…….”
“허…….”
처음엔 허탈한 듯한 미소가, 두 번째 손가락으로 찔렀을 때는 어이없다는 표정이, 그리고 세 번째 손가락 장난을 끝낸 후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으… 응애! 응애!”
갑작스러운 커다란 웃음소리에 아기가 놀랐는지 울음을 토해 냈지만 정호기의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이놈이 그 송기영이라고?’
“크큭, 크… 크하하하하하!”
무엇이 그리 웃긴 것인지 주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젖히고는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하늘을 대신해 너를 벌하겠다!]
전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핏속에서 청춘을 불살랐으며, 종남제일검이란 이름으로 정파의 일각을 이끌던 송기영.
그가 자신의 손가락 장난에 옹알거리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웃겼던 것이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었고, 다만 백수련만이 그런 정호기의 모습을 보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기를 좋아하는구나.’
동생인 정호태가 태어났을 때도 정호기는 안절부절 못하며 마치 만지면 깨지기라도 하는 도자기처럼 다뤘었다.
그 모습을 기억하는 백수련이었기에 정호기의 행동을 보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
“예?”
간신히 정호기가 진정된 후에 노인이 선전포고를 했다.
“손자 놈이 이번 대회에 참가할 것이라고 하였네.”
“할아버지?”
“다시 소개를 하지. 사가장의 태상 장주직을 맡고 있는 사비연이라고 하네. 인사드려라. 감숙 진가의 분이시다.”
사비연의 갑작스레 대회에 나가란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준우의 표정이 진지함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이 건장한 청년이 바로 이분의 제자이자 너와 겨루게 될 소협이다. 은패를 받을 정도이니 방심하면 호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
사준우와 정호기의 눈이 마주치며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그것은 사준우의 분위기가 너무도 진중하여 그렇게 느껴진 것이었는데, 아마도 그의 증조부와 진우현과의 비무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재미있군.’
뜻하지 않은 송기영을 본 것도 정호기에겐 즐거운 일이었는데, 자신을 향해 도전 의식을 불태우는 이를 보자 그것 또한 즐거웠다.
그리고 그의 즐거움은 비무 상대를 추첨하는 날 절정에 이르렀다.
같은 번호를 뽑고 자신을 바라보는 이는 분명 산화표국에 도착한 날 자신을 비웃던 놈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