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21화 (22/137)
  • 21화

    “아, 어디 가십니까?”

    강당주가 진청운을 보더니 물었다.

    “사가장에 가 보려고 합니다.”

    “그러시군요. 초대된 무인들 외에 따로 참가 신청을 받는 것은 어제부터 시작했으니, 지금 가신다면 그리 붐비지는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진청운이 답례를 하고 그렇게 스쳐 지나가려는 찰나, 강 당주가 안내하던 다섯 무인 중에서 잘생긴 이십 대 초반의 남자가 정호기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얼굴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커다란 몸집과 거대한 도를 보고는 힘만 내세우는 무인이라고 생각해 얕잡아 보는 모양이었다.

    사실 이것은 커다란 무례로 결투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정호기는 그것을 보고도 모른 체하며 지나갔다.

    ‘아직 호된 꼴을 맛보지 못한 놈이로구나.’

    분명 과거 자신처럼 몸집이 큰 상대를 박살 낸 경험도 있을 것이라 여겼다.

    ‘얼굴이 반쪽이 되어 봐야 눈을 깔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깨닫게 되겠지.’

    여기서 반쪽이 된다는 것은 굶거나 병이 들어 살이 빠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음식을 못 먹을 정도로 망가져서 살이 빠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예전 정호기는 저런 놈들의 얼굴을 묵사발을 만든 적도 많았고, 그들 중에는 죽을 때까지 죽만 먹은 이들도 있었다.

    ‘그때 굶어 죽은 놈도 있었던 것 같은데…….’

    듣긴 한 것 같은데 진위 여부는 알아보지 않았었다.

    이미 망가뜨려 버린 놈들까지 신경 쓰고 살기엔 너무 바빴으니까.

    “참아.”

    옆에서 같이 걷던 백수련이 정호기의 옷소매를 잡았고, 반대편에선 수수가 다른 손을 붙잡았다.

    “오빠, 참는 게 이기는 거야.”

    아마도 이들은 정호기가 발끈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알았으니까 이거 놔.”

    “응.”

    옷소매를 놓으면서 백수련이 정호기의 등을 토닥였는데, 마치 엄마가 아들에게 ‘참 잘했어요!’라고 칭찬하는 것 같았다.

    “헤헤, 오빠 손은 따뜻해서 좋아.”

    진수수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사가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많은 무인들을 만날 것이고 그들과 혹시라도 정호기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땀띠 나겠다.”

    더운 여름이었기에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는 상황인데, 손이 따뜻하다고 좋을 이유는 없었다.

    ‘날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정호기는 진수수의 마음을 대충 짐작하였기에 이런 생각을 했지만, 진수수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예전 자신과 같이 시장 구경을 나갔을 때 했던 싸움이 떠올라서였다.

    그날을 생각하자 진수수의 몸이 흠칫하면서 떨렸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었어.’

    정호기가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잔인함까지 갖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었다.

    그날이 있기 전까지는…….

    [그놈 참 더럽게 크군.]

    여기까지는 그냥 들어줄 만한 말이었다.

    정호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크큭! 어떤 년인 줄은 몰라도 저놈 낳다가 밑구멍 찢어진 거 아니야?]

    그 사람의 말에 같이 걷던 동행들이 맞장구를 치면서 음담패설을 지껄이고 낄낄거린 행동이 끓는 기름에 불을 던졌다.

    불길은 활활 타올라 순식간에 주위를 황폐하게 만들었으며,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재가 된 세 명의 누더기뿐이었다.

    누더기.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될 정도로 세 명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고, 정호기는 붉은색으로 물든 옷을 입고 불의 화신처럼 그들을 내려다보았었다.

    ‘절대 놓지 말아야지!’

    굳게 다짐하는 진수수가 벗어나려는 정호기의 손을 꼭 붙들었다.

    ***

    “크네요.”

    사가장은 진수수의 말처럼 정말 컸다.

    과장되게 말해서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긴 담과 마차 서너 대는 한꺼번에 통과할 정도로 큰 정문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가 질리게 만들었다.

    그 커다란 정문에서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자, 들어가자꾸나.”

    진청운을 선두로 일행이 찾아간 곳은 담벼락만큼이나 긴 줄이 늘어선 곳이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구나. 강 당주가 잘 몰랐던 모양이다.”

    산화표국의 강 당주가 잘못 안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생각이 틀린 것이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줄은 더욱 길어져만 갈 테니까.

    “사부님도 나가시겠습니까?”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다른 이들의 무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그럼 어디 그늘에라도 가셔서 쉬고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등록을 마치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진청운 등을 보낸 정호기는 생각에 잠겼다.

    ‘내가 가문을 이어받는다면 시간을 뺏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그러하지 않는다면?’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

    정가장을 잇지 않는다면 소소한 일들을 알 필요도 없으니까.

    ‘어차피 흑룡문과 싸우다 보면 장에 돌아가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할 테니 그리하면 되겠군.’

    가문을 동생인 정호태에게 넘기기로 했다.

    ‘간단한 것을 괜히 걱정했잖아?’

    근심거리가 하나 깨끗하게 해결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근 반 시진의 시간이 흘러서야 드디어 정호기의 차례가 돌아왔다.

    “열호아 정호기 소협?”

    정호기가 적은 것을 본 문사 차림의 인물이 되물었다.

    굳이 별호가 알려지지 않은 이라고 해도 자신의 별호를 적는 것은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다른 별호를 지을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무림대회에서는 두각을 나타낸 이는 별호를 얻을 수도 있었는데, 만일 지금 밝히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외침 하나로 기존에 있던 별호는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다.

    이런 곳에선 분위기가 사람을 움직였고, 새로 만들어진 별호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될 테니까.

    “예.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니외다. 이것을 가지고 저기 칠(七) 자가 쓰인 곳으로 가시오. 그가 합격 여부를 결정할 것이오.”

    문사가 정해 준 곳을 바라보니 한 사람이 비무를 하고 있었는데, 두 곳이나 빈 곳이 있었음에도 그를 그곳으로 보낸 것이다.

    ‘별호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인가?’

    고개를 갸웃한 정호기였지만 주최 측에서 하는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었기에 그 자리로 가서 대기했다.

    ***

    “한풍대 이 조장 감철민입니다.”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이었다.

    “정호기입니다.”

    “시작하시지요.”

    감철민이 기수식을 취한 채 정호기가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

    ‘지켜본 바로는 굳이 이기지 않아도 합격은 되는 것 같지만, 기준이 어디까지일까?’

    앞선 사람은 제법 잘 싸운 것 같았는데도 불합격을 당했고, 줄 서서 지켜볼 때 다른 곳에서 싸웠던 이는 조금 모자란 감이 느껴지는데도 합격을 했었다.

    ‘이놈만 지켜본 것이 아니라 기준을 세우기가 어렵구나.’

    등에서 호아를 꺼낸 정호기가 허공에 한 번 도를 긋고는 땅을 박찼다.

    채채채채챙!

    ‘응?’

    분명 시험관들은 반격을 하지 않고 지원자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수준에서 대련을 마쳤었다.

    그런데 감철민은 달랐다.

    처음 도를 쳐 낸 것은 방어라고 볼 수 있었지만, 나머지 부딪침은 정호기가 감철민의 검을 쳐 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충분히 반격을 하고 공격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이봐, 여기! 여기!”

    대련을 대기하던 이들과 줄을 서서 기다리던 이들의 시선이 쏠렸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두 번째지?”

    “응, 어제 한 명 있었잖아.”

    “누구야?”

    “글쎄, 모르겠는데? 어이, 자네는 아나?”

    “나도 모르겠네.”

    “이번에는 이기려나?”

    주위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어 보면 이 상황은 조금 특별한 상황일 뿐이고, 자신이 처음도 아닌 모양이었다.

    거기다 이길 것을 기대하는 것을 보니, 공격을 해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그럼 반격을 해도 된다는 것이겠지?’

    결심을 한 정호기가 정확하게 머리와 사지를 노리며 쏘아져 오는 공격의 중심으로 도를 밀어 넣었다.

    아무리 환검을 펼친다고 해도 지금처럼 정직하게 들어오는 공격은 그 뿌리를 쳐 버리면 가지는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법이었고, 검에 비해 한 자는 더 긴 도였기에 이대로 가다간 감철민의 손이 도에 절단 날 것이었다.

    쨍!

    다섯 개의 검이 순식간에 하나로 모이며 정호기의 도첨을 정확하게 찔렀다.

    ‘제법이군.’

    정호기가 감탄한 부분은 그런 검술도 있었지만, 기습적인 공격에도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가 더 큰 이유였다.

    ‘이 정도의 공격으로는 동요를 하지 않는단 말이지? 그럼 어디…….’

    정호기의 공격을 막은 후 다시 공격을 하려던 감철민의 미간이 좁혀졌는데, 정호기의 도가 자신의 검을 따라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쨍!

    힘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내지른 검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도는 여전히 검을 쫓았기에, 오히려 감철민이 검에 힘을 실을 수 없었다.

    높이 뛰려면 다리를 구부려야 하고 주먹을 내지르려면 팔을 오므려야 했는데, 지금 정호기의 도는 그럴 여지를 주지 않고 있었다.

    마치 삼 년 굶은 거지가 닭다리를 쫓듯, 정호기의 도는 감철민의 검을 쫓았다.

    “어이, 이상한데?”

    “그렇지?”

    무기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두 사람은 마치 춤을 추듯 작은 대련장을 누비고 다녔기에 보는 이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하지만 고수와 하수의 눈은 보는 것이 다른 법.

    둘의 움직임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존재했다.

    “헉, 헉…….”

    감철민이 거친 숨을 내쉬며 멀찍이 물러선 정호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고 검을 든 손은 잔경련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고수다!’

    감철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