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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20화 (21/137)

20화

위소명의 뒤를 따라 별원으로 향하는 와중에 정호기의 눈에 관원 둘이 보였다.

‘역시나 그냥 돌아가는군.’

사람이 죽었음에도 무인들 간의 싸움이고, 거기다 화산과 종남이 함께 일을 벌인 것이니 그들이 나서지 않는 것은 당연하리라.

‘관과 군, 그리고 무림… 참으로 묘한 관계야.’

혈신으로 활동했던 시절, 정호기도 관과 많은 마찰을 빚었지만 군까지 끌어들일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관은 무림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공생한다고까지 할 수 있었다.

물론 거의 혜택을 보는 것은 무림이었고, 심지어 어떤 무림인은 관을 우습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관리들을 상하게 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자칫하다가는 군이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놈을 잡느라고 얼마나 뛰어다녔던지…….’

어느 문파나 문제아는 있었고, 하지 말라는 짓은 골라 가며 하는 놈이 있기 마련이었다.

관원과 시비를 벌이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것은 흑룡문이라고 다르지 않았는데, 시비가 아니라 아예 죽여 버린 놈이 있었다.

포쾌만 되어도 어떻게 무마해 보련만 놈이 죽인 것은 현의 실무를 담당하는 정구품의 주부(主簿)였다.

막대한 금화가 지현과 도지휘사에게 흘러들어 갔고 그놈을 잡아다 바친다는 약조까지 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파든 사파든 자신들의 본거지가 있는 성의 책임자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는 있지만 관리의 죽음까지 용납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려면 흔적이나 남기지 말든가. 미련한 놈.’

흔적 없이 관리를 죽인다고 하여도 그로 인한 문파의 위축은 피할 수 없었다.

관리가 무림인에게 죽은 경우 군이 투입되고, 심하면 황성에서까지 사람을 파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노리고 적대 문파가 있는 곳의 관리를 죽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극히 드물었다.

그 문파가 멸문을 한 뒤에도 조사는 계속 이루어졌고, 못 밝혀내는 사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 실체를 드러내고 말았으니까.

‘하여간 귀신같은 놈들이라니까.’

이런 생각을 하던 정호기가 왼쪽을 바라보았다.

“뭐해?”

“상처를 싸매 둬야지.”

백수련이 손수건으로 왼손을 묶으려고 하자 정호기가 손을 피했다.

“놔둬. 어차피 피는 멎었고, 이건 내 나태함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니까.”

조금은 쌀쌀맞은 태도였지만, 백수련은 서운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태?’

아마도 수련이 부족해 손에 상처를 입었다 여기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나태하다면 나는,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 모두가 게으름뱅이겠다.’

정호기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가 수련하는 것을 팔 년간 봐 온 백수련은 결코 나태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손바닥이 까진 것은 셀 수도 없고, 하루 종일 도를 휘두르다 지쳐 쓰러지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었다.

특히 겨울이 되면 그것을 더 잘 알 수 있었는데, 정호기가 있는 별원의 연무장은 눈을 쓸지 않아도 눈이 쌓이는 일이 없었다.

그가 수련을 쉬지 않았기에 쌓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백수련이 팽팽히 당겨진 활줄도 쉬는 시간을 줘야지 안 그러면 끊어진다는 말을 했을 때 정호기는 코웃음을 쳤었다.

[절대 끊어지지 않을 만큼 강하게 만들면 돼. 쉬지 않는 활줄은 끊어진다고? 흥! 핑계가 필요한 놈들이 만들어 낸 헛소리일 뿐이야.]

그런 정호기가 여행을 떠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처음엔 자신을 놀리는 줄 알았었다.

‘왜 그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니? 왜?’

불구대천의 원수와 생사결을 앞둔 사람처럼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정호기가 위태로워 보이고 안쓰러웠으며,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장하연 등에게 작별을 고하고 멀어질 때, 위소명은 정호기가 탄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

위소명은 아직 사람을 죽인 적이 없었다.

시체를 대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제 겨우 열여덟 살이라고 하던데…….’

벌써 스물다섯이지만 위소명은 아직 명을 이루지 못했다.

사냥을 통한 생의 단계는 벌써 끝마쳤지만 사람을 죽인 경험은 없는 것이다.

“무엇을 생각하느냐?”

“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끄러미 위소명을 바라보던 장하연이 그를 별원에 딸려 있는 작은 헛간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는 흉수의 시체가 있는 곳이 아닌가?’

마음속에서 솟는 불안감이 위소명을 감쌌고, 그것을 억누르며 위소명이 묵묵히 장하연을 뒤따라 움직였다.

끼이익.

관 하나만 덩그러니 들어 있는 헛간은 어쩐지 을씨년스러웠다.

“뚜껑을 열거라.”

관 뚜껑에 못질을 한 상태였지만 그것을 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으음…….’

역한 냄새가 올라왔으나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찌를 수 있겠느냐?”

불안감과 함께 아련히 피어오르던 기대감은 바로 이것을 예상하고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시체를 대하니 그것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구 사질의 원수다.”

원수가 차라리 살아 있었거나, 자신이 방은진과 같은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면 서슴없이 찌를 수 있었을 것이다.

“살아 있었다면 찌를 수 있겠느냐?”

마치 속을 들여다본 듯이 장하연이 물었다.

‘그냥 검을 들고 내리찍으면 되는 것을…….’

왜 이리 힘이 드는지 위소명은 알 수 없었다.

“그게 정 소협이 대단한 이유이고, 앞으로 지켜봐야 할 이유이다.”

무림인은 인명을 우습게 여기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침없이 무기를 휘둘러 사람을 죽인다고 아는 이들이 많은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무림인 중에서도 사람을 향해 망설임 없이 살수를 전개하는 것은 살수처럼 특별하게 훈련을 받은 이들이거나 인명을 천시하는 악인, 그리고 명을 이룬 무인들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생명의 무게는 무인이라고 하여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명을 이룸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두려움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피에 대한 두려움, 생명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죄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저 삼척동자 조해와 같이 검이 있어도 찌르지 못하고, 도가 있어도 자르지 못하며, 힘이 있어도 원한을 갚지 못할 것이다.”

조해의 이름을 들은 위소명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에서 보내고 싶습니다.”

죽은 사형의 곁이 아닌 원수의 시체를 지키는 역할을 자처하는 위소명을 담담히 바라보던 장하연이 헛간을 나섰다.

쿵!

위소명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마치 자신을 세상이라는 낭떠러지에서 밀어내는 손길과 같다고 느꼈다.

***

“사람이 많구나.”

산양현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모습도 많아졌다.

대부분이 무기를 소지한 무인들이었지만, 그들 틈으로 커다란 보따리를 매거나 마차에 한가득 짐을 싣고 가는 이들도 보였다.

“묵을 곳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진청운과 정호기가 한 마차를 타고 진수수와 백수련이 같은 마차를 타고 있었다.

“장주께서는 허술한 분이 아니시다.”

“예?”

“이미 그곳에 자리를 마련하셨을 것이란 얘기다.”

말을 하면서 진청운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빈틈이 없는 것 같아도 이런 면에서는 부족하단 말이야.’

큰 그림은 잘 그리면서 그 속에 자리한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께서? 하긴 그렇겠군. 그럼 사람을 미리 보내셨나?’

정호기가 중원을 여행할 때는 어디로 가서 어디를 파괴시키고 누구를 죽이란 말을 들었을 때뿐이었고, 혈신이란 별호를 얻었을 때는 그저 가서 쓸어버리면 그만이었다.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고, 황실에서조차 사람을 보내 그와 독대를 하고 갔었다.

‘이제는 사소한 부분들을 알아야겠어.’

경험이 많고 나이가 많고 지식이 있어도, 그것은 무공을 익히고 사람을 죽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모든 것을 차지했으며 적을 섬멸했다.

“어디로 가는 거지요?”

창밖을 바라보니, 사람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이고 집들도 점점 화려해지고 있었다.

“이보게, 어디로 가는가?”

진청운이 묻자 마부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산화표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마방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혹시 모르셨습니까? 저는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아, 그런가? 알겠네.”

“산화표국이요?”

묻는 정호기의 얼굴을 보면서 진청운이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장과 거래를 하는 표국이 아니더냐? 설마 모르고 있었던 것이냐?”

“예.”

“쯧쯧, 난 그래도 거래처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여겼거늘. 이번에 돌아가면 장주께 말씀드려야겠구나.”

정호기는 장차 정가장을 이어받을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장의 실무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생각하니 한심했던 것이다.

‘장에 무심한 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지금은 아직 장에 신경 쓸 때가 아닌데…….’

진청운이 말을 하면 정운룡도 동의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어떻게 한다?’

오히려 무공에 쏟을 시간을 늘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정호기였기에 혹시나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빼앗기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어차피 수장이란 것은 큰 결정만 내리고 소소한 것들은 머리 좋은 놈들이 알아서 하는 것인데, 내가 꼭 세세한 부분까지 알 필요는 없잖아?’

흑룡문을 다스릴 당시 정호기가 했던 방법이었고, 큰 무리 없이 잘 흘러갔었다.

어떻게 아버지를 설득할까 하고 정호기가 고민하는 사이, 마차는 산화표국이라고 적힌 현판을 지나치고 있었다.

***

“어서 오십시오.”

“잘 지내셨습니까?”

진청운과 인사를 나누는 중년인은 산화표국의 표국주로, 정호기와도 안면이 있었다.

‘그때 그놈이군. 마차에서 알은척을 했었다면 성가신 일이 없었을 것을.’

정운룡이 소개시켜 주어 만난 일은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단 한 번의 만남이었고, 그것도 스치듯 만난 것이 고작이었다.

“객청에 자리를 마련했으니 그곳에 머무시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몇 번의 인사치레가 더 오간 후에 객청으로 향한 진청운 일행이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사가장에 한번 가 보는 것이 어떠하냐?”

“등록도 해야 하니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짐을 정리 한 후 진청운 등이 전각을 나설 때, 일단의 무리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이남 삼녀로 구성된 일행이었는데, 오십 대로 보이는 노인을 제외하곤 모두 젊은 사람들이었다.

“자, 이쪽입니다.”

그들을 앞에서 안내하는 이는 진청운 일행을 안내했던 강 당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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