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물러서!”
비명 소리와 함께 검으로 벽을 부순 진청운의 눈에 보인 것은 진수수를 발로 밟고 백수련의 목에 도를 겨눈 채 문을 등지고 있는 흑색 단삼을 입은, 사십 대로 보이는 중후한 얼굴의 중년인이었다.
“맹철심! 그만 포기해라!”
색절 맹철심.
푸근하고 너그러워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색절이라는 별호를 지닐 만큼 많은 여인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색마였으며, 삼절의 우두머리였다.
“꺼져! 꺼지지 않는다면 이년들의 목숨은 없다!”
부서진 창문을 통해서 들리는 소리에 맹철심이 고함을 지르면서 진청운을 노려보았다.
“검을 버려라!”
맹철심의 말에 진청운이 미련 없이 검을 놓았다.
땅!
검과 마루가 만나 청명한 소리가 울린 그때, 맹철심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어리려는 그 순간, 맹철심이 기대고 있는 문이 부서지며 커다란 손이 빠져나왔다.
“헉! 뭐…….”
맹철심이 경악하며 시선이 움직일 찰나 빠져나온 손이 도신을 움켜쥐었고, 진청운은 떨어진 검의 손잡이를 발로 찼다.
“큭!”
진청운이 날린 검이 진수수를 밟고 있는 맹철심의 종아리를 관통해 문에 박혔다.
콰직!
다시 문이 뚫리며 삐져나온 손이 맹철심의 머리를 잡아 뒤로 당겼는데, 그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그의 목이 뒤로 꺾이며 문을 부수고 밖으로 삐져나왔고, 그런 맹철심의 눈에 보인 것은 무표정한 정호기의 얼굴이었다.
우둑!
“커헉!”
정호기가 팔에 힘을 주자 근육이 불끈 솟아오르며 맹철심의 목을 부러뜨려 버렸다.
“아빠!”
아무리 똑똑하고 철이 든 것처럼 보여도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인지, 진수수는 진청운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가슴에 핏자국이 있었지만 다친 것은 아니었다.
진청운이 날린 검에 맹철심의 종아리가 관통당할 때 떨어진 피가 묻은 것일 뿐이었다.
끼익.
정호기가 문을 열자 문에 목을 걸친 채 축 늘어진 맹철심의 시신이 바닥을 쓸며 문을 따라 움직였고, 그 자리엔 풀썩 주저앉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백수련의 모습이 보였다.
놀랐는지 벌린 입을 다물 생각도 못하고 고개만 돌려 정호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모양이군.’
이런 장면에 익숙한 정호기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멍한 눈동자를 보며 그가 했던 행동이라고는 검을 놀려 목을 날려 버린 것뿐이었다.
정호기의 기억 속에서는 충격을 준 대상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쉽게 해결할 수 있었는데, 아쉽군.’
순간적으로 맹철심이 백수련을 죽여 버렸다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호, 호기야…….”
팔을 벌리진 않았지만, 직접적으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파르르 떨리는 작은 어깨와 눈물이 흐르는 커다란 눈망울은 정호기에게 보듬어 줄 것을, 보호받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무엇을 봤는지 갑자기 놀란 얼굴이 되더니 벌떡 일어나 정호기에게로 다가갔다.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죽음의 공포마저 잊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정호기의 손끝을 타고 떨어지는 핏방울이었다.
하긴 맨손으로 도신을 잡았으니 금강불괴가 아닌 다음에야 상처를 입는 것은 당연하리라.
“호들갑은.”
“피가 나잖아!”
“다쳤느냐?”
그제야 진수수를 안정시킨 진청운이 정호기의 손을 바라보았다.
“스친 정도입니다.”
‘미숙해. 겨우 이 정도로 상처를 입다니.’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생활을 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이 뒤따랐다.
***
“맹철심! 도망갈 곳은 없다!”
아직 안의 상황을 모르는지 밖에서 다시 맹철심의 투항을 종용하는 소리가 들렸다.
“맹철심은 죽었소!”
진청운이 소리쳤지만 그 말을 믿지 않았는지 몇몇 사람들이 뛰어올라 부서진 창문을 통해 안을 확인하더니, 이내 중년인이 그곳을 향해 안으로 들어왔다.
슬쩍 안을 훑어보고는 문에 머리를 박고 늘어져 있는 맹철심의 시신을 확인한 다음에야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종남의 삼 대 제자 이도준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수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진청운입니다.”
그들이 인사를 하는 사이 세 명의 인물이 더 창을 통해 들어왔고, 두 사람이 객점의 입구로 모습을 드러냈다.
진수수나 백수련이 낯선 곳이라 옷을 입고 잠자리에 들었기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큰 망신을 당했을 뻔했다.
“진 대협께서 맹철심을 처치하신 것입니까?”
“여기, 내 제자인 호기가 그를 죽였습니다.”
“정호기라고 합니다.”
백수련이 행낭에서 붕대를 찾아 다친 손을 감는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을 말린 정호기가 이도준을 향해 인사를 했다.
“정 소협이셨군요. 큰일을 하셨습니다.”
그때 객점의 입구를 들어서는 인물이 있었으니, 장하연과 위소명이었다.
서둘러 위로 올라온 그들이 맹철심의 시체와 이도준 등을 훑고는 진청운의 앞에 섰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장하연의 행동에 이도준의 눈이 빛났는데, 그가 제일 먼저 알은척을 한 것이 자신이 아니라 진청운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지?’
삼절을 쫓다 갑자기 날아온 전서를 받고 이탈한 장하연이 이곳에 온 것은 그렇다고 할 수 있었지만, 같은 구파의 사람을 내버려 두고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이에게 먼저 안부를 물었기에 궁금한 것은 당연했다.
‘말투나 연배로 보아 인척은 아닐 것인데,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인가?’
그렇게 따지면 또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 장하연이 족히 두 배는 더 살았다고 보이는 둘의 외모였다.
안면이 있는 이라면 저렇듯 공손하게 묻지 않았을 것이다.
‘배분이 높은가?’
저런 외모를 가진 사제(師弟)들의 배분이 높았다면 자신이 사문에서 주의를 듣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흠…….’
구파에게 있어 정보는 무척 중요했고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는 사이였기에 상대보다 많은 것을 안다는 것은 문파 자체에도 이득이었지만, 자신들을 후원해 주는 속가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에도 상당히 많은 역할을 했다.
타 지역에서 일어나는 홍수, 가뭄, 싸움, 흑도의 발호 등은 물류의 값에 영향을 줄 만큼 중요한 정보였고, 그에 못지않은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사파의 인물이건 정파의 인물이건 새롭게 등장하는 실력자는 항상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행보는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게 마련이었다.
특히나 이미 알려져 있는 대문파 출신이 아닌 야인들 중에서 나온 고수는 한 지방의 세력까지 바꿔 놓을 정도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같은 섬서에 문파를 둔 화산은 알고 자신은 모르는 인물이라면?
그것도 장하연과 같은 인물이 알고 있는 이를 종남의 제자인 자신이 모른다면?
‘잠영각주님게 알려야겠구나.’
이도준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장하연과 진청운이 얘기를 끝마쳤고, 장하연이 묵고 있는 별원에 진청운 등이 신세를 지기로 하였다.
진청운 등이 위소명과 함께 떠난 뒤 장하연이 이도준에게 말을 걸었다.
“혼자 떠나서 미안하이.”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구 사질이 죽었네.”
“예? 구 사제가 말씀입니까? 어찌하다가요?”
삼절을 쫓는 것도 급한 일이었지만, 구봉흔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그것을 뒤로 물리게 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자세한 것은 다음에 알려 주겠네.”
장하연이 말하지 않아도 며칠이면 그 일에 대한 얘기로 섬서가 시끄러울 것이었다.
“허… 어찌 구사제가…….”
“지금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정신이 없구먼. 삼절의 추적에는 더 이상 참가하기 어려울 것 같네.”
“알겠습니다. 이미 독절과 색절이 죽고 악절만 남은 상태이니 사백께서는 일을 보십시오.”
이도준의 사부보다 나이가 많고 배분이 같았기에 다른 문파임에도 장하연을 사백이라 칭한 것인데, 이것은 사실 사이가 좋을 때만 가능한 일이지, 같은 구파라고 하여도 소원한 사이거나 적대시하는 경우라면 막말까지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동과 청성이었다.
두 문파는 같은 구파에 속하면서도 서로를 소 닭 보듯 하였고 심하면 검을 맞대기도 했다.
“독절도 죽였는가?”
“예. 그놈 때문에 다섯이나 중독되었지만 다행히 천수신의께서 동행해 주셨기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군. 신의께선?”
“현재 중독된 이들과 같이 계십니다. 저, 그런데 아까 그분들은 어떻게 아시는 분들이십니까?”
“구 사질의 일로 신세를 진 분들이라네. 아, 이번에 사가장에서 열리는 무림대회를 구경하러 가신다고 하더군.”
“그렇습니까?”
“아마 참가할지도 모르겠네. 그나저나 맹가는 누가 죽인 것인가?”
“정 소협이 손을 쓴 것 같습니다.”
“흐음, 정 소협이? 바람이 부는 것인가?”
장하연의 혼잣말을 들으며 이도준은 사가장에도 진청운과 정호기에 대해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림인으로 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을 벌일 것 같지만, 솔직히 정사대전과 같은 전쟁이나 낭인으로 살지 않는 한 일생동안 스무여 번을 싸우면 많이 싸운 것이라 할 수 있었고, 그 스무여 번의 싸움을 무사히 마치고 죽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 않으면 고수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물론 뒷골목에서 노는 흑도의 패거리와 같은 무리가 아닌 무공이 일정 수준을 넘는다는 가정 하에서.
그런데 정호기는 하루 만에 두 번의 싸움을, 그것도 구파가 개입된 일에 말려들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운명일 수도 있지.’
무인들 중에서 유독 분쟁과 싸움에 휘말리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이들을 속칭 ‘바람’이라고 칭했고, 그들 중에서 무공이 뛰어난 이들은 영웅이 되거나 희대의 살성이 되곤 했다.
물론 그 전에 죽어 버리면 이름도 못 남기고 잊히는 것은 당연했고.
정호기가 미풍이 될 것인지, 중원을 휩쓰는 용권풍이 될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파악해 둬서 나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정호기.’
이도준의 뇌리에 정호기란 이름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