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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18화 (19/137)
  • 18화

    진청운과 정호기가 나란히 앉았고, 맞은편에 위소명이 앉았다.

    나머지 화산문도 두 명은 위소명의 뒤에 시립하듯 서 있었는데, 그들의 눈은 정호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시신을 이곳에 두었나?’

    마방에 마련된 별원의 접견실이었고, 옆방에서는 흐느낌이 들려왔다.

    아마도 방은진이 구봉흔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리라.

    “정 소협께서 보신 것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위소명의 말에 정호기가 담담하게 구봉흔과 여진욱의 대결을 설명했다.

    마지막에 여진욱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구봉흔을 기습했다는 대목에서 살기가 치솟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었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기습을 당하시고도 최후의 기력을 모아 반격을 하시어 동귀어진하셨습니다. 제가 도우려 했지만 기습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이미 그때는 너무 늦은 상태였지요.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이것이 전부이니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호기가 일어서려 하자 위소명이 그를 만류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 소협의 말씀을 못 믿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귀 파의 인재인 구 대협이 유명을 달리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저희는 내일 또 길을 떠나야 합니다. 남아 있는 일행의 안전도 있고 하니 이곳에서 마냥 시간을 보낼 수 없습니다.”

    “잠시면 됩니다. 곧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위소명의 말에 정호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보내 준다 하셨습니까?”

    정호기의 추궁에 위소명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뱉은 말이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귀하들이 나를 보내 준다 못한다 하는 것이오!”

    “그런 것이 아니라…….”

    “내 할 도리인 것 같아 구 대협의 마지막을 전해 주려던 것이었거늘, 무슨 연유로 나를 핍박하는 것이오!”

    “핍박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제가 실언을 한 것이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경황이 없어 말이 헛나왔습니다.”

    “필요 없소! 정 확인할 일이 있거든 그대들이 찾아오도록 하시오!”

    정호기가 발끈하면서 일어설 때, 옆방과 연결된 문이 열리며 방은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가의… 가가의 마지막 모습을 보셨다고요? 정말인가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비바람에 시달린 한 떨기 꽃처럼 애처로웠고, 목소리는 그 자체만으로 세상에 어둠을 내리는 듯했다.

    ‘화무십일홍이라…….’

    방은진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도 쇳소리를 내며 자신을 저주하던 모습이 떠올라, 정호기는 내심 고소를 지었다.

    “예, 그렇습니다.”

    “어떠셨나요? 고통스럽진 않으셨나요?”

    매달리기라도 할 듯이 다가오며 물어보는 방은진을 위소명이 붙잡았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정호기가 진청운을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이 지겹기는 했지만 잠깐의 수고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컸기에, 정호기는 두 사람의 대결을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를, 저를, 그렇게…….”

    구봉흔이 여진욱을 제압할 때 목숨을 걸었다는 대목이 나오자 방은진이 오열했기에 정호기가 얘기를 잠시 멈춘 사이, 밖으로 연결된 문이 열리며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은은한 연두색이 감도는 장포를 걸친 노인이었는데, 얼굴에는 침통한 표정이 역력했다.

    “사백, 어서 오십시오.”

    위소명이 벌떡 일어나며 그를 맞았고, 나머지 두 명도 허리를 숙였지만 방은진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손으로 사질들의 인사를 받은 노인이 진청운과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장하연이라고 합니다.”

    “진청운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제자인 정호기라고 합니다.”

    청향검 장하연.

    전대 매화검수로 지금은 화산파의 원로였는데, 삼절을 쫓는 추격대에 참여했다가 구봉흔의 일을 듣고 달려온 것이었다.

    “진 대협이셨군요. 반갑습니다. 혹, 감숙에 뿌리를 두고 계시진 않은지?”

    “맞습니다.”

    “아, 그렇군요. 척혼의 이름으로 가문의 위명이 천하를 울리길 바랍니다. 그럼 이분이 열호아 정 소협이십니까?”

    “예.”

    대답을 하면서 진청운은 자신의 정체가 이미 구파 모두에 알려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정 소협께서 수고를 하신 것 같지만, 한 번 더 이 늙은이를 위해 수고해 주실 수 있겠는지요?”

    “알겠습니다.”

    정호기의 말을 끝까지 들은 장하연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위소명을 바라보았다.

    “난 이분들과 마저 할 얘기가 있으니 너희는 봉흔의 곁을 지키도록 하여라.”

    “예.”

    대답을 마친 위소명이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정 소협, 아까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위소명 등이 방은진을 부축하고 방을 나서자 장하연이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정 소협, 전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장하연의 말에 진청운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호기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추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의미는 정 소협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장하연의 눈길을 받은 정호기가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말씀드리지요.”

    이후 여진욱을 죽인 것이 구봉흔이 아니라 정호기 본인이라는 말을 들은 장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소협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구봉흔이 여진욱과 동귀어진을 한 것과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것은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차이를 가져오기 마련이었고, 장하연은 정호기가 일부러 그것을 숨긴 것을 좋게 해석한 것이었다.

    “귀 파의 일을 제가 빼앗은 것은 아닌지…….”

    “아닙니다. 흉수를 처단해 주신 은혜를 베푸신 것이니 그렇게 생각지 마십시오. 아이들에게는 제가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장하연이 진청운에게로 눈을 돌렸다.

    “진 대협, 조부께 일어난 일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이미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지만 진상은 구파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 사건에 일조한 화산파의 한 사람으로 뒤늦게나마 사죄를 드립니다. 혹시라도 그때의 일을 들먹이는 누군가가 있다면 화산을 찾아주십시오.”

    장하연의 말을 들은 진청운의 눈가가 붉어졌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살펴 가십시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정호기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뿐이었다.

    어쨌거나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일이 진행되었기에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화산에 은혜를 입혔으니, 나중에 이들이 나를 모른 척하지는 않겠지.’

    여진욱을 죽인 것이 자신이라는 것은 밝혀질 것이라 예상했었다.

    비록 구봉흔의 검으로 찔렀다지만 고수의 예리한 눈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아까 큰 소리를 지른 것은 혹시나 밝혀지지 않을 것에 대비한 포석이었다.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고 그들에게 어디까지나 구봉흔의 마지막을 전한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장하연이라… 이놈이 주위에 있는 줄은 몰랐군.’

    어린 문도들만 세상에 덩그러니 던져 놓을 화산이 아니었고, 그것은 다른 대문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암중에서 호위할 누군가가 따라붙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러나 장하연은 삼절을 쫓고 있었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실상 방은진 등을 보호하는 역할은 구봉흔의 몫이었는데, 어이없게도 그가 죽어 버린 상황이었다.

    ‘무슨 볼일이 있었나?’

    구봉흔과 여진욱의 뒤를 따를 때 장하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비무를 관전하던 다른 두 명의 인물 중에서 누군가가 어린 화산문도들을 보호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승패가 갈리자마자 자리를 떠나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한 이유였다.

    만일 장하연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쩌면 구봉흔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도 없었기에 결심을 하기는 편했지.’

    여진욱은 어차피 화산의 문도를 죽였기에 그를 거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흑룡문에 들어가는 것도 좌시할 수 없었다.

    ***

    “호기야, 고맙구나.”

    “예?”

    방에 돌아온 진청운이 탁자에 앉아 한참을 가만히 있다 꺼낸 첫마디가 고맙다는 말이었기에, 정호기가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혹, 장하연 그놈이 한 말과 무슨 관계가 있나?’

    “조부님이 청성의 무진자와 비무를 한 연후에 마검으로 몰렸던 것은 얘기를 했었지?”

    “예.”

    “사실 그것에는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숨어 있단다. 지금 구파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한 것이 무당의 자허 진인이라면 그때 구파를 이끌다시피 한 것은 청성의 청우자였다. 바로 무진자의 사부되는 사람이었지. 그날, 조부께서 무진자와 비무를 하던 날…….”

    진우현의 검에 상처를 입고 검을 떨어뜨린 무진자는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여진욱과 마찬가지로 검을 거둔 진우현에게 달려들었는데, 오히려 역공을 당해서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의 힘줄이 잘리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것을 목도한 청우자가 척혼검법을 마검으로 날조한 것이었다.

    “실상 척혼검을 마검으로 몰아붙인 것은 청우자라고 할 수 있지. 무진자는 피해자의 이름으로 방관한 것이고.”

    “단지 검법이 잔인하다는 이유로 마검이라 칭할 수 있습니까?”

    “풍조(風潮)라는 것이 있단다. 당시는 흑룡문, 파천궁, 그리고 지금은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고 멸문한 혈련을 포함한 삼대 사파가 남만의 만독궁과 합세하여 중원을 유린한 혈전이 막 시작된 시점이었기에, 검에 실린 기세가 강하다는 이유만으로도 마검이라 불리던 시절이었다. 오랜 평화의 여파로 유(柔)를 탐하던 시기였기에 그런 풍조가 생긴 것이지. 하지만 구파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강한 것은 척혼검이 유일했다.”

    은근한 자부심과 함께 애잔함이 묻어 있었다.

    “이후 정사대전의 여파인지 중원의 무공이 유를 버리고 강(强)을 선택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었지만, 정사대전이 시작할 당시만 해도 비무에서 상대에게 피를 흘리게 하는 것만으로 패배가 인정되던 시기였단다. 비무라는 것을 그런 것으로 생각하던 정파인들이었기에 청우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가문의 무공을 마검이라 인정한 것이겠지.”

    한 사람과 중원 무림을 대표하는 문파들과의 싸움은 애초부터 승패가 정해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진우현은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고 은거를 택했었다.

    “세월이 흐르며 그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는 있지만 인정하지 않았단다. 그런데 오늘 너로 인해 화산의 사과를 들었구나.”

    당사자도 아니고 화산파의 장문도 아니었지만, 장하연의 사과는 진청운을 울컥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복받치는 감정에 눈시울이 붉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들을 원망하지 않으십니까?”

    “조부님도 자신의 출도가 성급했다는 것을 인정하셨다. 경지를 이룬 것에 도취되어 비무를 하면서 사람을 많이 상하게 하셨다고. 그렇기에 무공을 바꾸려고 노력하신 것이다.”

    “도대체 어떤 무공이었습니까?”

    “허허허, 궁금하냐?”

    “예.”

    “그럼 보여 주마.”

    자리에서 일어선 진청운이 검을 들고 벽을 바라보다 순간 적으로 검을 뽑아 찌르자, 무수히 많은 자국들이 벽을 수놓았다.

    “이것의 문제점은 한번 초식을 발동하면 멈출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렇기에 조부님과 비무를 한 사람들이 모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란다. 죽은 자들도 있었는데, 수많은 바늘로 찌른 듯한 상처를 입었다고 하더구나.”

    만일 사람이 저 앞에 서 있었다면 끔찍한 몰골이 되었으리라.

    “지금의 척혼검법은 횟수를 줄이는 대신 정확도를 높이고 힘의 제어와 변화에 초점을 맞췄… 응?”

    말을 하던 진청운의 시선이 창문으로 향했고, 정호기도 마찬가지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콰직!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진수수와 백수련이 묵고 있는 방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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