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17화 (18/137)

17화

‘나 말고도 여러 놈이 있군.’

하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무림인들 대부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싸움 구경이었고, 다음으로 좋아하는 게 싸우는 것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왜 구봉흔이라는 이름이 생각이 안 나지? 매뢰에서 수위를 차지할 정도면 분명 매화검수가 되었을 터인데, 얼굴도 기억에 없단 말이야.’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경공을 펼치더니 곧장 달리기 시작했는데, 벌써 이각이 넘게 달리는 중이었다.

‘결국 산으로 가는군.’

논밭을 지나 이름 모를 산으로 접어든 여진욱과 구봉흔 두 사람이 십 장 정도 되는 평지에 마주 보고 섰다.

‘남은 건 둘인가?’

그들의 대결을 보려고 쫓은 이들 중에서 무공이 못 미치는 이들은 모두 떨어져 나갔고, 정호기를 포함해 세 명만이 주위에 몸을 숨긴 채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만일 오늘 나에게 진다면 두 번 다시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맹세해 주시오.”

“당신이 진다면? 당신도 그녀에게서 떠날 것인가?”

“맹세하오.”

구봉흔이 떠난다고 해도 방은진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보장이 없었지만, 여진욱은 그것으로 좋다고 여겼다.

“나 또한 맹세한다!”

챙!

동시에 검을 뽑아 든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검을 쓰면서도 힘을 중시하는 진욱이니 환과 쾌에 중점을 둔 화산의 검에 고전하는구나.’

정호기가 보는 것처럼, 빠르게 몰아치는 구봉흔의 검에 여진욱이 뒤로 밀리면서 자신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채 뻗지 못한 검에 힘을 실을 수 없었기에 계속 뒤로 밀렸던 것이다.

‘구가 놈이 검을 뻗을 기회를 주지 않으니 막는 것이 전부일 수밖에.’

계속 여진욱이 수세에 몰리며 끝날 것 같던 대결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래! 바로 그거야!’

구봉흔의 검이 호선을 그리며 찔러 올 때, 검의 힘에 몸을 맡긴 여진욱이 뒤로 튕겨 나가더니 땅을 박차고 몇 배 더 빠른 속도로 구봉흔을 향해 짓쳐 들었다.

쩡!

검과 검이 만났을 때 쇳소리가 공기를 찢었고, 그때부터 뒤로 밀리는 것은 구봉흔이었다.

한 번, 한 번의 공격이 우직스러울 만큼 단조로운 직선이었지만, 구봉흔이 반격을 하지 못할 정도로 힘과 속도가 있었다.

‘이 상태라면 진욱이가 이길 것 같구나.’

하지만 정호기의 예상은 빗나갔으니, 계속 뒤로 밀리던 구봉흔의 검에서 옅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서부터였다.

‘검기? 허…….’

지켜보던 정호기가 탄성을 뱉을 만큼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구봉흔이 검기를 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검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높기에 벌써 검기를 쓴단 말인가?’

구봉흔에 대해 알면 알수록 정호기는 어째서 자신이 그를 모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튼 대결은 점입가경으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내공과 힘으로 구봉흔을 압박하던 여진욱은 상대가 검기를 구사하자 더 이상 그를 핍박할 수 없었고, 이내 공세와 수세가 무색해졌다.

서로가 마주 선 채 우위를 점하기 위해 검을 내지르고는 있지만, 누구도 쉽게 상대를 제압하지 못했다.

‘쯧쯧, 그럼 그렇지. 허검기(虛劍氣)였군.’

조금씩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봉흔의 몸에서 김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는데, 그것은 그가 무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억지로 내공을 쥐어짜 허검기까지 일으켜서 반전을 노렸지만, 저 상태가 조금만 더 지속된다면 분명 진욱이의 승리다.’

그때 갑자기 구봉흔이 검을 찔렀다.

여진욱의 검이 내려오는 상황이라서 자칫하면 몸이 잘릴 수도 있었다.

동귀어진(同歸於盡).

아니, 이미 먼저 공격을 한 것이 여진욱이었기에 구봉흔의 패배로 끝날 확률이 더 높았다.

“큭!”

신음 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선 것은 여진욱이었다.

급하게 구봉흔의 검을 막느라 가슴 어림이 피로 물들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패배를 인정하시오.”

여진욱의 목에 검을 들이댄 구봉흔이 나직이 말할 때, 정호기를 제외한 구경하던 이들이 모두 자리를 떠났다.

이미 승패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떠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호기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시선을 다시 구봉흔과 여진욱에게로 돌렸다.

“치졸한 수법이다!”

“사매를 생각하는 마음의 차이일 뿐이오.”

구봉흔은 자신의 목숨을 걸었지만, 여진욱은 최후의 순간에 죽음을 거부했다.

오히려 여진욱이 목숨을 걸었다면 지금 서 있는 것은 그 혼자였으리라.

쨍그랑.

손을 벗어난 검이 땅에 떨어질 때, 여진욱의 몸도 같이 무너져 내렸다.

“추억은 기억하는 자의 몫이오. 그것이 아름답게 남아 있든, 추한 일그러짐으로 앙금을 남기든. 다만 추억은 추억일 뿐 현실이 될 수 없소.”

말을 마친 구봉흔이 검을 갈무리하고 뒤돌아섰을 때, 갑자기 여진욱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옆에 떨어져 있는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자신이 패배한 것보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정된 것 같아 참을 수 없었다.

“아니야!”

“헉!”

살기를 느끼고 몸을 돌린 구봉흔이 검을 꺼냈지만, 이미 온 내력을 실어 내려치는 여진욱의 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쨍!

한 번의 부딪침으로 검이 튕겨졌고, 튕겨진 검이 날아가면서 여진욱의 얼굴을 스쳤다.

“컥!”

구봉흔의 가슴 깊숙이 박힌 검을 따라 피가 흘러내렸고, 입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와 여진욱의 얼굴을 적셨다.

“헉! 무, 무슨…….”

피가 얼굴을 적시자 정신이 들었는지 여진욱이 검에서 손을 뗐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은 후였다.

자책 속에 여진욱이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 구봉흔이 사력을 다해 손을 뻗었다.

퍽!

“크악!”

구봉흔의 손가락이 정확히 여진욱의 왼쪽 눈을 뚫었다.

만일 내공이 실렸다면 머리가 터졌을 것이다.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는 여진욱이 발을 뻗어 구봉흔을 쳐 냈는데, 그의 손가락에 눈알이 매달려 있었다.

저벅.

주저앉아 있는 여진욱을 향해 걸어가는 정호기의 손에는 구봉흔이 놓쳐 버린 검이 들려 있었다.

‘이때 다친 것이군.’

아마도 이 사건을 계기로 흑룡문에 투신했을 것이다.

화산파의 인물을 죽인 만큼 행동에 제약이 있을 것이니까.

비무 중에 일어난 일이라고 우기기에는 아까 떠나간 목격자들이 있기에 그것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발소리에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아 있던 여진욱이 고개를 돌렸다.

“누… 컥!”

“많은 고민을 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옳은 것인지 말이다. 너를 데리고 가서 숨겨 줄 수도 있고, 이대로 네가 흑룡문에 몸을 의탁하게 내버려 둘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부르르 떨던 여진욱의 몸이 천천히 그 움직임을 멈출 때, 정호기가 그의 부릅떠진 한쪽 눈을 감겨 주었다.

“너를 죽이는 것으로 이전에 가졌던 모든 인연을 끊고자 한다. 이제는 망설임 없이 벨 것이고, 돌아보지 않으리라.”

그 자리를 떠나는 정호기의 머릿속에 구봉흔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추억은 기억하는 자의 몫이오. 그것이 아름답게 남아 있든, 추한 일그러짐으로 앙금을 남기든. 다만 추억은 추억일 뿐 현실이 될 수 없소]

‘이럴 줄 알았다면 싸우기 전에 말릴 것을 그랬구나.’

너무 늦은 후회였다.

화산의 인물을 죽이지 않았다면 모르되, 승부가 결정된 것을 목격한 이들도 있는 상황에서는 여진욱을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앞으로 정파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당에 화산과 척을 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 너희는 내 가슴에 묻어 두마. 아름다운 추억으로.’

***

“왜 그러느냐?”

“조금 피곤한 것 같습니다.”

“알았다.”

눈을 감고 운기를 시작하는 정호기를 보면서 맞은편 침상에 앉은 진청운은 그가 두 사람을 따라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정호기의 얼굴이 너무도 어두웠기 때문이다.

정호기가 운공하는 모습을 바라보다 자신도 운기에 들었던 진청운이 운기를 중단했다.

“응? 왜 이리 소란스럽지?”

솔직히 진청운은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옆방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익숙한 뒤통수 두 개가 보였다.

“들어가거라.”

방을 나와 아래층을 바라보던 진수수와 백수련이 진청운의 말에 입술을 삐죽이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알아왔습니다! 거대한 도를 든 덩치 큰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진청운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화산파의 사람들과 객점의 주인이 동시에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기를 말하는 건가?’

그가 그런 생각을 할 때 훌쩍 이 층으로 몸을 날린 이들이 진청운을 포위하듯 둘러쌌다.

“화산파의 위소명이라고 합니다. 잠시 여쭐 것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진 모요. 무슨 일이신지?”

“진 대협의 일행이신 분과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객잔에서 밥을 먹을 때 봤던 이들이었고, 이들도 정호기가 진청운과 함께 있던 것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슬쩍 둘러보니 안 된다고 해도 기어이 일을 성사시킬 것 같았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만큼 일을 벌이지 말라고 했거늘.’

“잠시 기다리시겠소? 내 불러오리다.”

진청운이 몸을 돌려 문을 열려는 그때 그를 둘러싼 위소명 등 세 명은 검의 손잡이를 잡았는데 여차하면 검을 뽑을 기세였기에, 진청운으로서는 정호기가 사고를 쳐도 단단히 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진청운이 문을 완전히 닫고는 침상에서 운공을 하고 있는 정호기에게로 다가갔다.

혹시라도 위소명 등이 내뿜는 기세에 운기를 하고 있던 정호기가 해를 입을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깊게 내쉬는 숨과 함께 눈을 뜬 정호기가 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밖에서 풍기는 예기에 운기를 멈췄던 것이다.

“화산 문인들이 너와 할 얘기가 있다는구나.”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냐? 왜 저들이 너를 찾는 거냐?

-구봉흔이 죽었습니다.

-그가?

전음을 들은 진청운은 일이 생각보다 크다 여겼지만, 몸을 일으키는 정호기의 얼굴에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없는 것을 보고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강호의 일을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

허리춤에 검을 꽂은 진청운이 정호기의 뒤를 따라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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