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객점에 들른 정호기 일행은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 덥구나.”
진청운의 말마따나 무척이나 더운 칠월이었다.
“올해는 유난히 더운 것 같아요. 이러다 삼 년 전 그때처럼 가뭄이 들기라도 하면 큰일인데요.”
진수수의 말을 들으며 진청운은 고소를 지었다.
대견스러우면서도 철이 너무 일찍 든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교차했기 때문이었다.
‘칠음절맥의 영향으로 오성이 뛰어나다지만 아직은 어린아이인 것을…….’
여기까지 생각한 진청운이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은 도대체 얼마나 똑똑한 걸까?’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부터 얼마 전 자신의 검을 튕겨 내던 것까지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놈이지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이중성이지.’
가족을 대하는 태도와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를 대하는 태도도.’
진청운이 보기에 정호기는 노야의 존재를 가족에게 말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노야로부터 배운 무공도 자신을 통해 소개할 정도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거늘, 할아버님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신뢰할 수 있는 걸까?’
정호기는 마치 진청운은 절대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진청운도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무조건적인 신뢰가 때로는 부담이 되기도 했다.
‘그나저나 뭘 저렇게 보고 있는 거지?’
옆에서 백수련이 고리눈을 뜨고 쳐다보고 있었지만, 정호기는 신경도 쓰지 않고 한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허… 아름답구나.’
정호기뿐만이 아니라 객점에 있는 모든 남자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허리 어름에 수십 개의 주름이 들어간 화려한 옷을 입었는데, 연한 하늘색이 천당에서 내려온 선녀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빠?”
“응?”
“정말 아름답네요.”
“그렇구나. 저 옷소매에 그려진 매화 문양으로 보아 화산의 인물 같은데, 소문으로만 듣던 화산일미 방 소저 같구나.”
“아!”
진청운의 설명을 들은 정호기가 뭔가 떠오른 듯 탄성을 발했다.
그 소리가 조금 컸기에 객점에 있는 몇몇의 시선이 쏠렸지만 정호기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고, 화산일미를 바라보던 시선도 돌려 버렸다.
‘어쩐지 눈에 익더라니, 그때 그년이었군.’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한쪽 팔을 잃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도망가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저주했던 여인.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는 못 알아봤었지.’
[케케케케케, 날 기억하느냐?]
목소리는 쇠가 갈라지는 것처럼 변했고, 몰골은 마치 지옥에서 갓 솟은 아귀와 같은 그녀의 모습은 단 이 년만의 변화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빌어먹을 년! 그따위 함정을 파서 날 죽이려 들다니!’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배신.
믿고 있던 부하가 자신을 배신한 아픔을 준 사건이었고, 반대로 부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건이기도 했다.
‘이백 명이 넘게 죽었었어.’
무너지는 협곡에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 죽어 간 부하들의 숫자였다.
떨어지는 바윗덩이와 쏟아지는 화살을 몸으로 막고, 화탄을 온몸으로 감싸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준 부하들.
갈가리 찢겨 흩어지는 수하들의 살점을 보면서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앞으로 달리는 것뿐이었다.
‘정파와 싸우는 동안 위기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때처럼 죽음을 눈앞에 둔 적도 없었지.’
생각이 떠오르자 일순 분노가 치솟았지만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 젠장! 그놈들을 내 손으로 죽일 수 있을까?’
흑룡문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십이 년.
그 안에 조금씩 흑룡문의 힘을 빼놓고 정파에서 힘을 쓸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그러자면 희생물이 필요했고, 그 대상으로는 사파, 그것도 흑룡문이 적격이었다.
“흠, 흠.”
진청운이 헛기침으로 시선을 모으고는 화산문도들이 있는 곳을 슬쩍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삼절을 쫓고 있다더니, 아마도 공훈에 이름을 올리려고 나온 모양이다.”
무인들이 중원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은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하나는 직접 나서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지금 객점에 있는 방은진 일행과 같이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살짝 젓가락만 올리는 것이었다.
어차피 지금 삼절은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형국이었고, 그들을 쫓는 이들은 충분히 삼절을 감당할 수 있는 고수들이었다.
사실 방은진 등이 나선다면 오히려 인명 피해만 늘리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 추격대에 이름만 올리고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도와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호호호호, 사형도 참. 그래서요?”
객점에는 화산일미 방은진의 목소리만이 낭랑하게 퍼지는 중이었고, 모든 남정네의 귀는 그녀를 향해 열려 있었다.
‘사형? 매화검수인가? 아니, 아직은 매뢰(槑蕾)겠군.’
매뢰는 매화나무의 꽃봉오리란 뜻으로, 매화검수가 될 자질이 있는 이들을 뜻하는 말이었으며, 그들 중에서 실력이 좋은 이들이 매화검수가 되었다.
화산파를 대표하는 매화검수는 이전부터 스물네 명으로 구성되었고, 새로운 매화검수가 탄생하면 이전에 있던 매화검수들은 그 이름을 버리고 원로가 되어 생활했는데, 그들이 진정한 화산파의 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매화검수들의 목을 손수 베어 나무에 꽂아 화산파를 장식했던 정호기였다.
화산일미가 그토록 원한에 사무쳤던 것은 같은 사문의 문도들을 죽인 것과 팔을 잘라 버린 것도 있었지만, 그녀의 가문인 천화산장을 궤멸시킨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렇다고 제 딸을 시켜 유만걸 그놈을 유혹하다니.’
방은진의 딸도 그녀를 닮아 무척이나 아름다웠는데, 육체를 무기로 정호기의 수하였던 유만걸을 유혹해 거짓 정보를 전하게 했던 것이다.
완전한 거짓 정보라 판단할 수 없었던 것은, 정호기를 유인하기 위해 방은진을 비롯해 흑룡문이 쫓고 있던 정파의 수뇌 다수와 삼백에 이르는 인원이 정보대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화산장도 쓸 만한 곳이긴 하지.’
정호기가 다시 방은진을 힐끗 쳐다보았다.
화산파의 속가 중에서 사가장이 가장 부유하다면 무력으로 가장 뛰어난 곳이 바로 천화산장이었다.
“왜?”
정호기가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돌리자 옆구리를 꼬집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내린 백수련이 고갯짓으로 탁자를 가리켰다.
“음식 나왔다고.”
“말로 하면 되지.”
조공이 주 무기인 백수련의 꼬집기가 아프지 않을 리 없었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시퍼렇게 멍이 들리라.
하지만 정호기는 그런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호기야.”
“예, 사부님.”
“너도 한번 나가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시험만 통과하면 자격을 준다고 하니 말이다.”
진청운의 말을 듣고 나니 그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르긴 하지만 지금부터 이름을 알려 두는 것도 괜찮겠지.’
조해를 찾는 것은 그곳에 도착하면 바로 알아볼 수 있으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정호기가 대답을 했을 때, 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왜 술을 거절한단 말이오? 내가 술에 독이라도 탔다 여기는 것이오?”
미인이 있는 곳에 사건이 있다는 말이 있지만, 화산파라는 배경을 등에 업은 이들이 검까지 차고 있는데 시비를 걸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으리라.
하지만 언제나 예외가 있으니, 오늘 그 예외를 보게 되었다.
“응?”
방은진에게 수작을 부리고 있는 인물을 본 정호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저놈이 여긴 어떻게?’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려던 것을 간신히 참았다.
철면피 여진욱.
젊은 시절의 그였지만, 두 눈이 멀쩡하고 얼굴에 흉터도 없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하하하! 대장님, 여자란 자고로 예뻐야 하고, 미인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은 범죄입니다. 물론 넘어오면 품어 주는 것은 예의지요.]
방은진이 파 놓은 함정에 걸렸을 때, 자신을 노리고 떨어지던 벽력탄을 향해 몸을 날리며 미소를 짓던 것이 정호기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싫다고 하지 않소. 이미 정중하게 거절을 했는데도 계속 강요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하오만.”
방은진의 일행 중의 하나가 나서서 그를 말려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마치 그는 없다는 듯이 방은진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케 저들에게 저런 시비를 걸고도 목숨을 부지했네?’
만일 여기서 여진욱이 목숨을 잃었다면 정호기와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저년을 놓칠 때 저놈이 크게 다친 것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혹시 무슨 관계가 있었나?’
방은진이 달아날 때 여진욱이 그녀의 검에 가슴을 찔려 쓰러졌고, 그것 때문에 포위망에 구멍이 뚫려 달아날 수 있었다.
‘그때 놈의 실력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계속되는 전투 때문에 피로가 쌓여 그랬거니 하고 넘어갔었지.’
정호기가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때, 사태는 점점 험악하게 변하는 중이었다.
“그만두지 못하겠소!”
“당신은 뭔데 자꾸 내게 하라 마라 하는 것이오?”
“난 그녀의 사형으로 충분히 권리가 있소이다.”
“아무리 사형제라고 하여도 남녀 간의 애정 문제는 당사자의 문제가 아니겠소?”
“그녀는 나와 혼인을 약속한 사이오. 그러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시오.”
“혼인을 약속했다? 화산일미가 누구와 혼약을 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당신이 들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소, 여 소협?”
“매뢰에서 가장 뛰어나다 일컬어지는 구봉흔 대협이 소인을 알고 계실 줄은 몰랐군요.”
눈싸움을 하듯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었지만, 정호기는 그들의 입술이 살짝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전음? 역시 뭔가 있어.’
그때까지도 방은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불안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여진욱과 구봉흔이 밖으로 나서려 하자 의자에서 일어났다.
“사형…….”
“사매, 여기서 기다려라. 너희도.”
구봉흔이 따라나서려는 방은진과 사제들을 만류하고는 여진욱과 객점을 나섰다.
-사부님,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혹시 저들의 일에 끼어들려는 것은 아니겠지? 무림인의 일에 함부로 나서는 것이 아니다.
-그저 구경만 하려는 것이니 심려 마십시오.
전음을 마친 정호기가 진청운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객점을 빠져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