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15화 (16/137)

15화

“같이 가거라.”

“아버지…….”

“이 기회에 그 아이들도 견문을 넓히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정운룡의 말에 정호기가 그의 뒤에 서 있는 진청운을 바라보았다.

‘저놈이 부추긴 것이겠지?’

조해를 데리러 간다고 말할 수 없기에 사가장에서 열리는 무림대회를 구경하고 싶다 말하러 온 정호기에게 정운룡이 혹을 붙여 주고 있었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네가 같이 가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열호아 정호기가 말이다.”

“강호에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그곳은 무림대회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올지 알 수 없는 곳인데, 그런 곳에 수수와 수련이를 데리고 가라니요?”

“그것이 걱정이더냐? 알았다. 총당주님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진청운과 만족한 미소를 짓는 정운룡을 보면서 정호기는 자신이 당했다는 생각을 했다.

‘젠장! 이거였군.’

진청운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떨거지가 떨어져 나갔으니 위험은 없다지만, 그래도 저놈이 자리를 비우는 것은 내키지 않는데…….’

하후명이 실종되고 곽현이 죽은 후에, 그들에게 가담했던 이들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모두 장을 떠났다.

하후명과 곽현의 일을 경고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사부님께서 같이 가 주신다면 걱정할 것이 없겠지요.”

***

마차에 필요한 물건들을 싣는 것을 보면서 정호기가 진청운에게 물었다.

“어째서 같이 가시려는 겁니까?”

“자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노야께 여쭤 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으니, 다른 이들의 비무라도 보면서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요 근래 무공에 진척이 없고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진청운이었기에 그간 정호기에게 있지도 않은 사부를 만나게 해달라고 재촉한 것이었다.

“설마 참가까지 하시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싱긋 미소 짓는 진청운을 보면서 무림대회에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정호기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을 사부로 하지 말 걸 그랬나?’

좀 더 여유를 갖고 부려 먹을 수 있는 관계에서 출발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잠시 호태(虎態)에게 다녀오겠습니다.”

“알았다.”

정호태는 올해 일곱 살인 정호기의 동생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감정적으로 독립한 정호기를 대신해 부모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정호기가 자랑스러운 아들이라면 정호태는 사랑스러운 아들인 셈이었다.

“왔니?”

의자에 앉아 정호태가 수련하는 것을 보고 있던 백난영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정호기를 반겼다.

“잘 견디네요.”

땡볕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기마자세를 취하고 있는 정호태는 정호기가 모습을 보이자 살짝 움찔했는데, 그에게 있어서는 무서운 형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정호기가 동생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대하는 태도에 이유가 있었다.

당연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이었지만 약하게 키울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해 어려서부터 무공을 가르친 영향이었다.

“당연히 잘 견디지. 누구 동생인데.”

한 손에는 목검을 들고 한 손에는 부채를 든 백난영이 정호태의 감시인이었다.

정호기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의 가치관은 많이 변해 있었다.

예전의 그녀가 귀여운 아들을 원했었다면, 이제는 든든한 아들을 원한다고나 할까?

그 탓에 죽어나는 것은 정호태였지만.

“팔이 내려왔다.”

“어, 엄마…….”

“어서!”

백난영의 호통에 슬그머니 내려오던 팔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출발하는 거니?”

“예.”

“그래, 몸조심하고, 많은 것을 얻고 돌아오너라.”

작년 마적 토벌에 참가한다고 했을 때 정호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물을 흘리며 배웅하던 그녀를 생각하면 많이 변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그만큼 믿음이 커진 덕분이었다.

백난영을 향해 고개를 숙인 정호기가 기마자세를 하고 있는 정호태에게 다가가더니,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니를 부탁한다.”

일곱 살 어린아이가 무슨 힘이 있어 엄마를 지키겠는가?

빈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정호태의 얼굴에 진지한 빛이 흘렀다.

“응!”

“그러자면 열심히 무공을 익혀야겠지?”

“응!”

동생의 머리에 얹은 손에 내공을 끌어 모은 정호기가 그것을 동생의 몸에 휘돌리며 지금까지 쌓인 탁기를 씻어 주었다.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 듯 정호기가 내공을 운용하는 동안 정호태는 입을 다문 채 내공이 흘러가는 길을 숙지하려 노력했고 그동안 정호기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갔다.

“후우…….”

긴 한숨과 함께 내공을 갈무리한 정호기가 정호태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백난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그래.”

멀어지는 정호기의 뒷모습을 보면서 백난영은 뿌듯함과 함께 애틋함을 느꼈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진수수를 치료한 연후에 진청운이 찾아와 등천공과 추혼도법을 정호기에게 완전히 넘겨주었다고 말을 하였다.

그것을 정호기가 어떻게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다.

한마디로 소유권을 포기한 것이다.

백난영과 정운룡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진청운을 만류했다.

구지초를 사서 진수수를 구한 것 때문에 진청운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 여긴 것이다.

그러나 추혼도법과 등천공은 자신이 익히고 있는 척혼검법, 천의심공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무공이고, 또한 본래 가문에 내려오던 것이 아니라 조부가 우연히 발견한 무공이니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오히려 잠자던 훌륭한 무공이 정호기라는 주인을 만나 날개를 펴는 것을 보니 마음이 홀가분하다며 설득하는 진청운의 말에 허락을 했다.

등천공은 잠룡승천공의 다른 이름이었고, 추혼도법은 절영도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이제 그것들은 정가장의 독문무공으로 완전히 다시 태어난 것이다.

정호기는 백난영과 정운룡에게도 그것들을 배우길 권했지만, 그들은 사양했다.

‘호기야, 많은 것을 배워 오렴. 그것들은 모두 네가 성장하는 밑거름이 될 테니까.’

***

“예? 저와 수련이가 같이 타고 가라고요?”

“그래. 난 수수와 오붓하게 여행을 즐기고 싶구나.”

마차는 두 대.

정호기는 당연히 진청운과 같이 타고 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사부…….”

정호기가 뭐라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진청운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아 버렸기에 할 수 없었다.

‘이건 또 왜 이래?’

어쩔 수 없이 다른 마차에 오른 정호기는 황당함을 느꼈다.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는 백수련 때문이었는데, 화려한 색의 꽃과 학이 수놓아진 옷을 입고 있고 얼굴에는 연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평소 무복만 고집하던 그녀의 치마를 입은 모습이 낯선 것은 분명했지만, 문제는 정호기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음, 음… 오, 오셨어요.”

잘 익은 고추가 바로 저런 색이리라.

백수련의 볼뿐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잠깐 멈칫한 채 그녀를 바라보던 정호기가 고개를 살래살래 젓더니 자리에 앉았다.

퍽!

“윽! 무슨 짓이야!”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공간이 협소하기도 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이고 살기도 없었기에 백수련의 주먹을 막을 수 없었다.

턱주가리를 제대로 얻어맞은 정호기가 백수련을 노려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저 눈물만 흘리면 다 되는 줄 알지.’

이미 숱하게 겪었던 일이었다.

세 명의 부인이 모두 마지막에는 눈물을 무기로 들이댔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녀들에게 돌아간 것은 차가운 경멸뿐이었다.

오로지 강함만을 추구했던 정호기에게 있어 눈물은 약함의 상징이고, 스스로를 낮추는 비겁함이라 여겼기에.

지금은 그래도 가치관이 많이 변했지만, 그렇다고 여자의 눈물에 어떻게 될 그가 아니었다.

차가운 눈길로 백수련을 바라보던 정호기가 눈을 감았다.

덜그럭.

마침 그때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싫어?”

그동안 묻고 싶어도 묻지 못했던 질문이 드디어 백수련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아니.”

“근데 왜 그래?”

“뭐가?”

“왜 그렇게 차가워?”

정호기와 백수련이 만난 기간이 백이라면 그중 구십은 비무에 할애되었고, 나머지 십은 스쳐 지나가거나 밥을 먹은 것이었다.

대화는 비무 중에 나눈 것이 전부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정호기는 백수련의 이런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백영호에게 뭔가 말을 들었다고 해도 그것은 정략의 성격이 다분하고, 나와 지낸 시간 동안 한 것이라고는 비무밖에 없는데 왜 나를 좋아하게 된 거지?’

솔직히 귀찮았다.

부모님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대응방과의 관계를 끝내고 싶었다.

“너도 내 성격 알잖아.”

“알지, 그 더러운 성질.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할 수 없이 친절하지만, 모르는 사람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마음을 열지 않는 지독하게 패쇄적이고 지랄 같은 성질머리.”

“너에게만 차가운 게 아니란 말이야.”

“흥! 그때 그년에게는 실실 웃으면서 잘도 지껄이던데?”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최소한 너에게는 거짓된 모습을 보이진 않았어.”

“흥!”

코웃음을 친 백수련이 눈을 감았는데, 마지막에 정호기가 한 말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는지 그런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언니, 이번이 기회야. 홍 소저의 초대를 거절한 것은, 아직은 오빠의 마음이 그녀에게 없다는 뜻이니까. 그러니 무조건 이번 여행에서 오빠의 마음을 사로잡으란 말이야. 알았지? 나랑 아빠가 도와줄 테니까 꼭, 꼭 성공해야 돼!]

진수수의 말을 떠올리던 백수련이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좋아, 기필코! 그나저나 내가 먼저 고백한 것이 된 건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

정호기 등이 정가정을 떠나는 그 시각, 섬서 남부에선 조용한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위치가 잡히지 않았던, 삼절(三絶)로 불리며 중원을 시끄럽게 했던 이들의 행적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각각의 절기(絶技)를 가지고 색절, 독절, 악절로 불리며 평소엔 뭉쳐 다니다가 정파의 추격이 시작되면 따로 떨어져 흔적을 숨겼기에 잡기가 어려웠는데, 그들이 모인 순간을 덮친 것이다.

섬서이니만큼 종남과 화산이 주도가 되어 그들을 토끼 몰듯이 몰아 소탕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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