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하아…….”
한숨을 내쉬는 정호기의 모습을 보던 진수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빠, 한 번쯤은 져 줘도 되잖아?”
“이 녀석 성질 알면서 그러니? 만일 그랬다가는 진짜 날 죽이려고 할지도 몰라.”
“지금도 충분히 죽이려는 것 같은데?”
긴 머리는 풀어진 상태로 등으로 늘어져있고, 눈망울은 한 마리 사슴과 같은 열두 살의 소녀가 된 진수수는, 칠음절맥을 완전히 고친 상태이며 나날이 그 미모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부탁한다.”
“응.”
백수련의 몸이 작은 것도 있었지만 무공을 배우고 있는 진수수였기에 백수련을 옮기는 것은 언제나 진수수의 몫이었다.
쓰러진 백수련을 한 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멀어지는 정호기의 몸은 건장했다.
육 척을 훌쩍 넘는 키에 울퉁불퉁한 근육들, 거기에 어울리는 거대한 도를 어깨에 걸친 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거대한 철벽을 떠올리게 했다.
거기다 작년에 있었던 마적들과의 싸움에서는 별호도 얻었다.
열호아(颲虎牙).
사나운 바람과 같이 몰아치는 공격과 호랑이의 이빨과 같이 적을 쓸어버리는 도의 움직임을 보고 백영호가 지어 준 것이었다.
지금 정호기의 어깨에 걸쳐진 거무튀튀한 도에는 호아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도 역시 백영호가 현철을 섞어서 만들어 준 것이었다.
***
“언니, 오빠를 좋아하긴 하는 거야?”
진수수의 물음에 백수련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속 시원히 얘기 좀 해 봐. 왜 자꾸 오빠에게 미움 받을 일만 하는데? 어차피 언니 실력으로는 오빠를 이길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그렇게 싫어하는데 왜 자꾸 덤비는 거야?”
“처, 윽! 처, 처음엔 이기고 싶었어. 단지 그뿐이었지.”
부어오른 볼의 입 안쪽이 터졌는지 말하는 것을 힘들어했지만, 이내 아픔을 참고 담담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 대라도 때리고 싶었어. 이대로 패배자로 남기는 싫었으니까.”
“한 대 때린다고 이기는 것은 아니잖아?”
“아니, 나한테는 그게 이기는 거야.”
억지라는 것을 진수수도 알았고, 말을 하고 있는 백수련도 알고 있었다.
한 대 때리더라도 백수련은 비무를 멈추지 않을 것이고, 계속해서 상처를 받을 것이다.
몸과 함께 마음도.
“언니…….”
“나 좀 쉴게.”
돌아눕는 백수련을 바라보던 진수수가 깊게 한숨을 쉬더니 방을 나섰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백수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흑…….”
기어이 터져 나오는 울음.
‘비무가 아니면… 비무가 아니면 그 녀석과 나를 이어 주는 것이 없어.’
정호기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알 수 없는 적개심은 관심으로 변했고, 그 관심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정호기가 자신을 여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한동안 눈물만 흘리던 백수련의 눈에 독기가 솟아올랐는데, 그것은 정호기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년! 그년!’
백수련으로 하여금 이렇게 독기를 뿜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만금장주의 여식인 홍초희였다.
만금장은 섬서에서 알아주는 부자로, 화산파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대대로 만금장의 자식들은 그곳의 속가제자였다.
‘그년이 뭐가 좋다고…….’
작년 가을 마적들을 토벌하는 자리에 홍초희, 홍성한 남매도 참가했는데, 그때 정호기의 행동을 본 후부터 비무가 더욱 거칠어졌다.
처음 홍초희가 나타났을 때 정호기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만금장의 여식이고 화산파의 속가제자란 소리를 듣더니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백수련은 애가 탔지만 내색할 수 없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흥! 시시덕거리는 꼴이라니.’
홍초희의 곁에는 많은 남자들이 있었기에 정호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정호기가 마적단의 두목이었던 염라도 장거이의 목을 친 다음에는 그녀가 오히려 먼저 접근을 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둘이 말머리를 마주하고 담소를 나눴었는데, 그 광경이 아직도 잊히지 않고 있었다.
‘그래, 난 키도 작고 가슴도 작고 가문도 형편없다! 무공도 그년보다 못하고! 그래서 그러는 거냐? 그래서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거야?’
자격지심이 더욱 그녀를 괴롭게 했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제 그만 혼례를 올리는 것이 어떠냐는 물음을 던지는 무심한 백영호는 그녀의 상처를 후벼 팠다.
‘두고 봐. 내가, 내가…….’
결론이 없는 다짐.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하는지 몰랐기에 그녀의 다짐은 그렇게 끝을 맺지 못하고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
“소장주님, 드디어 소식이 왔습니다!”
“그래? 어서 줘 봐.”
왕삼이 내민 전서를 받아서 읽는 정호기의 얼굴에 흥분이 가득했는데, 팔 년이나 기다려 온 소식이었기에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단 말인가?’
꼭 거두고 싶었던 세 사람 중의 하나인 조해의 위치가 파악되었다.
정호기가 있는 섬서에 머물고 있었다.
진청운이 곧은 심성과 무공 때문에 장을 책임지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면, 조해는 앞으로 있을 계획에서 자신을 도와 적을 치는 역할을 할 사람이었다.
‘산양에서 열리는 무림대회에 참가한다고?’
산양현에 자리한 사가장에서 여는 무림대회는 매년 이맘때 열리는 것으로, 사가장의 위세를 자랑하는 대회라고 할 수 있었다.
‘흠… 어쩐다?’
사가장은 종남을 등에 업은 곳으로 만금장과는 번번이 충돌하는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가문이 위치한 산양현과 상주현은 이웃해 있어 상권이 거의 겹쳤기 때문이다.
‘만금장에서도 사람을 보내 관찰할 것이 분명한데…….’
사가장이 무림대회를 여는 날 만금장에서도 무림대회를 열었는데, 서로가 그곳에 누가 참가하는지, 누가 구경을 왔는지 궁금해 할 것은 분명했다.
‘그래도 가야겠지?’
홍초희가 초대장을 보낸다고 했기에 망설임은 있었지만 조해를 놓칠 수는 없었다.
“저… 소장주님.”
“응? 왜?”
“이것 좀 가르쳐 주십시오.”
왕삼이 내미는 것은 정호기가 적어 준 무서였다.
예전에 배웠던 것 중에서 알려지지 않은 백수권(百獸拳)이라는 무공이었다.
“어디? 팔방을 점하고 삼재(三才)를 가둬라. 이게 뭐?”
“손은 두 개고 발도 두 개인데 어찌 팔방을 동시에 점할 수 있고, 거기다 삼재를 어떻게 가둘 수 있습니까?”
“쯧쯧, 여기 어디에 공격을 하라 적혀 있느냐? 눈은 십 리도 보지 못하지만 마음은 천 리를 노닐 수 있느니. 팔방을 점하고 삼재를 가둔다는 것은 마음을 그곳에 두라는 말이다. 마음이 가는 곳에 손이 가고 마음이 머무는 곳에 발이 받치니, 뚫지 못할 것이 없고 천근의 무게도 나를 누를 수 없음이다.”
“예? 음… 그러니까 미리미리 공격할 곳과 피할 곳, 방어할 곳을 염두에 두라는 말이지요? 먼저 한 수 앞을 내다보면서요.”
“그래.”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왕삼을 보면서 정호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놈은 똑똑한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구나.’
그런 정호기에게 왕삼이 서너 가지를 더 물어봤다.
“이제 이해가 되네요. 아참, 총당주님이 뵙자고 하셨는데…….”
“사부님이? 언제?”
“에…….”
왕삼이 대답을 하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부른 지가 언제인데 내가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냐!”
“소인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잽싸게 문을 나서는 왕삼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정호기가 몸을 일으키며 진청운을 맞았다.
“죄송합니다.”
“됐다. 그나저나 전갈은 왔느냐?”
“사부님께서는 만날 수 없다 하셨습니다.”
“노야께서?”
진청운은 진수수가 열 살이 되어 칠음절맥의 증상이 나타나자 정호기가 말한 사부라는 인물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꺼지지 않던 불신의 불씨가 마침내 꺼진 것이다.
극도로 정신을 집중해서 관찰하지 않으면 알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혈도의 변화였지만 그것을 염두에 두고 살폈기에 간신히 발견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의원들은 그것을 알아내지 못했고 병명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정호기의 사부는 병이 발병하기도 전에 이미 그것을 알았으니 어찌 기인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때부터 진청운은 정호기의 사부를 만나기 위해 정호기를 닦달하고 있는 중이었다.
“예.”
“허…….”
실망감이 가득한 진청운의 표정을 보며 정호기는 속으로 고소를 지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것 때문에 찾으셨습니까?”
“응? 아, 아니다. 만금장에서 사람이 왔기에 너를 찾은 것이다.”
‘진짜 보냈군.’
홍초희가 약속을 지킨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때가 맞지 않았다.
“정말 갈 것이냐?”
“예?”
“수련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생각하고 행동하느냐는 말이다.”
어차피 정략혼인을 하려면 더욱 세력이 큰 곳과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홍초희에게 관심을 보인 정호기였다.
지난 팔 년간 대응방과 정가장이 힘을 합쳐 세력을 키웠지만 만금장에 비하면 부족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만금장의 여식이 눈에 들어왔기에 슬쩍 찔러 본 것인데, 반응이 생각보다 좋았다.
“수련이는 동생일 뿐입니다.”
나이는 같아도 생일이 늦은 백수련을 동생이라 칭한 것이었다.
“정말이냐?”
“예.”
정호기의 대답을 들은 진청운이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그 아이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없다가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낸 것은 만금장주의 여식인 홍 소저 때문이냐?”
“수련이를 여자로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럼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것이냐?”
“물어보지 않으셔서 대답을 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수련이도 알고 있느냐?”
“…….”
“후우… 알았다. 하지만 네 태도를 분명하게 해 주면 고맙겠구나. 수련이를 위해서라도.”
“알겠습니다.”
“만금장에는 갈 것이냐?”
“아닙니다.”
“뭐?”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삼척동자 조해입니다.”
정호기의 말을 들은 진청운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를 만나기 위해 만금장의 초대를 거절한다는 말이냐?”
“예.”
삼척동자 조해.
삼척동자도 알 만큼 유명하다는 뜻이 아니라, 삼척동자도 검만 들면 이길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호였다.
“허… 알았다. 그럼 갈 수 없다고 전하마.”
방문을 나서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 진청운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호기의 입가엔 미소가 어렸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는 내 계획에 꼭 필요한 인물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