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아닙니다. 호기가 잘한 것이지 제가 한 것은 없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기에 누가 들어도 당연한 말 같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 진 사부님 덕분입니다.”
환골탈태.
마냥 철부지에 어리광만 피울 줄 알았던 정호기의 늠름한 모습은 정운룡의 심금을 울리게 했다.
“처음에 도를 들고 나와 깜짝 놀랐는데, 척혼검법이 전부가 아닌 모양입니다.”
백영호의 질문을 받은 진청운이 슬쩍 정호기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척혼검법이 직(直)의 형태라면 호기가 방금 펼친 추혼도법은 환(幻)에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가 상반되어 가문에서 같이 익히는 것을 금하였고, 또 물려줄 이가 없어 지금까지 보여 줄 기회가 없었습니다.”
절영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고, 초식 중에도 추혼이라는 이름이 있었기에 추혼도법이라 이름 지었다.
또한 이제부터 익힐 초식들은 연무실에서만 익히기엔 공간이 협소했기에 대응방주 앞에서 시연을 한다는 핑계로 드러낸 것이었다.
“허… 검과 도, 직과 환이라. 감숙 진가의 위명이 곧 천하를 울리겠군요.”
“과찬이십니다.”
대답을 한 진청운이 백난영에게 양 볼을 잡힌 채 울상을 짓고 있는 정호기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도가 아니라 마치 봉을 휘두르는 느낌이었다. 유연하고 끊임이 없으며 힘까지 갖춘. 도신은 분명하건만 그 뒤를 이어 그림자처럼 따르는 잔영들. 특히 마지막에 잔영들이 합쳐지는 순간 느껴진 예기는 나를 관통하는 것 같았다. 만약 거기에 내공이 더해진다면?’
진청운의 등줄기를 서늘한 기운이 훑고 지나갔는데, 자신의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환상을 봤기 때문이다.
‘누군가? 도대체 누가 있어 저 아이에게 저런 도법을, 그것도 저런 경지에 이르도록 가르쳤단 말인가?’
이제 겨우 열 살.
아무리 무재라고 하여도 열 살이면 검의 날카로움과 도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일 것이었다.
그러나 정호기는 이미 도의 길을 파악한 것 같았다.
그 길을 파악하고 정진하는 것이 진정한 무인으로 태어나는 입문이었으니, 정호기는 이미 한 사람의 당당한 무인이라 할 수 있었다.
두근거림.
정호기가 대단할수록 그 뒤에 숨은 사부라는 사람의 존재가 크게 다가오며 진청운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설렘을 느꼈는데, 인지하지 못한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갈망이 그러한 두근거림을 만들어 냈고, 정호기를 중심으로 부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럴수록 진청운은 정호기에게 얽매이게 될 것이지만.
***
첫 만남이 사람의 인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의 하나라면, 정호기와 백수련의 첫 만남은 서로에게 실패였다고 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백부님.”
“오, 그래. 호기야, 잘 있었느냐? 이쪽은 내 딸인 수련이란다.”
백수련은 머리를 양 갈래로 길게 딴 귀여운 용모의 소녀였는데, 흠이라면 얼굴에 자리 잡은 흉터들이었다.
큰 흉터들은 아니었지만 깊게 파인 서너 개의 흉터로 인해서 마치 개구쟁이 남자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호기입니다.”
“백수련이에요.”
겨우 열 살인 어린아이들의 만남이건만, 두 사람의 인사는 무미건조했다.
“허허허! 무슨 존댓말이냐. 호기 넌 내게 있어 아들과 같으니 편하게 지내거라. 그럼 우린 볼일이 있으니 호기야, 수련이에게 네 별원을 구경시켜 주지 않겠느냐?”
“예, 백부님.”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면서부터 정호기는 빠르게 말투와 행동을 고쳐 나갔는데, 정운룡은 그런 그를 이제야 철이 든 것이라고 여겼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백난영에게 찾아왔는데, 정호기의 동생을 임신한 것이었다.
‘동생이라…….’
아직도 정호기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무슨 생각해?”
편하게 하란다고 바로 말을 놓는 것을 보면 생긴 것만큼 성격도 괄괄한 것 같았다.
“응?”
별원을 향해 가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 정호기를 보며 백수련이 물었다.
“아, 미안.”
“미안은 무슨.”
두 사람이 별원의 문으로 들어 설 때, 그곳을 나서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진청운이었다.
“사부님, 어디 가십니까?”
능청스럽게 물어 오는 정호기의 질문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진청운이 뭐라 한마디 하려다 옆에 있는 백수련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대응방의 백수련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간단히 인사만 주고받은 진청운이 정호기를 한 번 째려보더니 서둘러 뛰어갔다.
“바쁘신 모양이네?”
“응. 총당주직을 수락하셔서 오전엔 나를 가르치시고, 오후에 집무를 보시는 만큼 일이 많거든.”
[내가 왜 총당주직을 수락해야 하지?]
[미처 보여 드리지 못한 사부님의 전서가 있습니다.]
[흑룡문? 이것이 사실이냐?]
[예. 이미 중원 전역에 징후가 나타나고 있으며 사부님은 그것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하고 계십니다. 다만 증거가 없고 정체가 노출되면 저까지 위험해지기에 은밀히 행동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총당주와 하 총관은 흑룡문의 사주를 받은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던 차에 사부님께 걸린 것입니다. 이 마당에 다른 이를 총당주에 앉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믿을 수 있는 분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수수에 대한 얘기가 거짓이 아니길 빈다.]
[육 년 후에는 증세가 나타날 것입니다.]
애써 진수수에 대한 얘기로 마무리를 지었지만, 그의 눈에 깃들어 있는 기대감을 정호기는 놓치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향해 날아가는 불나방. 그것이 무인이겠지?’
정호기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 또한 그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느낌을 느꼈다.
“호기야?”
“응?”
별원에 들어서자 백수련이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빛냈다.
“참 아름다운 곳이네.”
“그렇지? 어머니께서 손수 가꿔 주신 곳이야.”
“그래? 흐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엄마 치마폭에 싸여 있었다면서?”
정확한 소문은 아직도 엄마 젖을 먹고 어리광을 피운다는 것이었다.
“무슨 뜻이야?”
“뭐, 별거 아니야. 그냥 그렇게 들었다는 거지. 그리고 무공이 뛰어나다면서?”
“…….”
왠지 시비조인 백수련의 말에 정호기가 입을 다물었다.
오늘 처음 보거늘 왜 자신에게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침까지 튀기면서 나한테 네 자랑을 하시더라.”
아무래도 그것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사실 외동딸인 백수련은 자신의 부모님이 아들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거기다 불을 지른 것이었다.
아들 타령을 하는 부모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얼굴에 상처가 생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무공을 연습했건만, 아직까지도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백영호가 정호기를 보고 온 다음부터 그의 얘기를 늘어놓더니 세 달 새에 네 번이나 정가장을 찾은 것이다.
“어디, 얼마나 강한지 볼까?”
예고도 없이 그녀의 손이 불쑥 정호기의 가슴을 찔러 왔다.
대응방은 응조공이라는 조공이 대표 무공이었고, 그만큼 그녀의 손가락은 날카로운 예기를 품고 있었다.
“무슨 짓이야!”
백수련은 정호기가 슬쩍 몸을 트는 것만으로 자신의 공격을 쉽게 피하자 눈에 이채를 발했다.
“무공을 배운 지 얼마 안 되었다던데, 그게 아닌가 봐?”
손가락이 정호기의 어깨를 노리고 떨어지는 중이었는데, 정호기는 그것보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공격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년이!’
사타구니를 노리고 솟구치는 백수련의 손가락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는데, 그대로 올라갔다가는 민망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정호기의 눈썹이 꿈틀하는 순간, 백수련의 공격이 변화를 일으켰다.
다리가 땅을 박차고 허리가 뒤틀리더니, 그녀의 몸이 회전하며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수평으로 누운 그녀의 손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빡!
손이 교차되면서 나머지 초식을 풀어내려는 그때, 정호기의 발이 백수련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큭!”
얼굴부터 바닥에 떨어진 백수련이 신음을 흘리는 것을 보고 정호기가 아차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이런, 내가 무슨 짓을…….’
“꽤 하는데? 퉷!”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것은 상관도 없다는 듯이 얼굴에 묻은 흙을 털더니 입 속에 들어간 흙을 뱉고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만하자.”
“누구 마음대로!”
눈에 독기를 품은 백수련이 손가락에 힘을 주고 달려들었다.
예전 혈신이었을 때 둘째 부인이었던 화가영이 화났을 때 보여 주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때처럼 할 수도 없고…….’
화가영에 대한 처리는 간단했다.
기절시켜 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죽어!”
‘답답하구나.’
***
캉!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며 백수련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미 열여덟인 백수련의 손놀림에 실린 힘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했다.
“그만 좀 해!”
“웃기지 마!”
손가락에 낀 검푸른 철조가 날카로운 예기를 뿌리며 정호기의 옆구리를 찔러 왔다.
한쪽 볼이 퉁퉁 부어오른 것이 이미 한 대 맞은 모양인데, 전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맷집만 키웠나?’
분명 저번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한 방이면 기절이었는데, 오늘은 그것을 견뎌 내고 더욱 독기를 품고 달려드는 중이었다.
‘젠장! 혈도만 찍으면 간단한 일인데…….’
혈도를 제압하려면 내공을 써야 했고, 그랬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나마 버틸 수 있었지, 아니었다면 백수련은 크게 다쳤을 것이다.
쾅!
‘또…….’
허물어지는 담벼락을 보면서 정호기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미 별원의 담은 군데군데 색이 달라져있었는데, 완전히 새로 지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백수련의 작품인 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것이었고.
“피하기만 할 거야!”
씩씩거리는 백수련은 오 척이 조금 넘는 키에 처음 만난 날과 같이 양 갈래로 땋은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것은 같았지만, 달려드는 기세는 그때와 비교해서 천양지차였다.
“얼마나 더 해야 만족할 건데?”
“날 죽여!”
쾅!
결국 백수련의 양쪽 볼이 모두 퉁퉁 부은 채 기절하고서야 비무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