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12화 (13/137)

12화

용정의 향기 속에 숨어 코끝을 자극하는 찌릿한 느낌과 혀끝에 맴도는 비릿한 맛.

독인지 미약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분명 좋지 않은 것이 들어 있었다.

사실 곽현과 같은 실력의 무인들을 독이나 미약에 중독 시키기란 쉽지 않았는데, 몸을 휘도는 내공이 해로운 기운에 반응을 하는 탓이었다. 그렇기에 사천당문에서 사용하는 무색, 무미, 무취의 독이 보물 소리를 듣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런 독은 너무도 고가이거나 구입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고수에게 독이나 미약을 사용하려면 극소량을 사용하여 눈치 못 채게 하는 것이다.

물론 효과도 미미할 터이지만, 어쨌거나 독과 미약이었기에 틈을 만드는 것은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용정에 들어 있는 것은 그 양이 너무 많았다.

마치 여기에 독 들어 있다고 자랑이라도 하듯이.

찻잔을 내려놓은 곽현이 방긋 웃고 있는 정호기와 무표정한 얼굴의 진청운을 바라보았다.

‘왜?’

이미 누가 독을 썼느냐 하는 것은 답이 나와 있었다.

멍청한 놈이라고 낙인찍힌 정호기는 제외시켰으니 말이다.

그렇게 곽현이 염두를 굴리고 있을 때, 진청운이 몸을 일으켰다.

“전 이만…….”

쿠당탕!

한 손으로 검을 뽑고 의자를 거칠게 밀어내며 벌떡 일어선 곽현의 모습에 진청운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볼일을 마쳤다며 나간 뒤 일각이 지난 후에 다시 놓고 간 물건이 있는 것처럼 돌아오면 모든 일을 정호기가 준비해 놓겠다고 했는데, 곽현의 이런 격한 반응은 예상외였던 것이다.

“곽 대협, 왜 그러시…….”

“닥쳐!”

곽현의 몸에서 발산된 살기가 자신의 심장 어림을 향하자 마냥 당할 수는 없기에 검에 손을 얹고는 정호기를 바라본 진청운은, 그제야 사태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제 움직였는지 방구석에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떨면서 이쪽을 바라보는 정호기의 모습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그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놈이 뭔가 술수를 부린 모양이구나.’

“네놈은 누구냐?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이지?”

곽현의 질문을 받은 진청운은 어차피 일이 틀어진 김에 정호기가 한 말이 사실인지나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알고 있을 텐데? 설마 무사히 넘어가리라 생각했소? 장주께서 그렇게 허술해 보였소?”

“서, 설마! 그럼 하가 놈이 사라진 것도…….”

말을 하던 곽현이 급하게 입을 다물었는데, 그것은 구석에서 떨고 있는 정호기를 봤기 때문이다.

제 목숨보다 더 아끼는 정호기를 정운룡이 미끼로 쓸 리 없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이 말장난에 놀아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함정이든 아니든 이미 일은 벌어졌고, 뚫린 주둥아리에서 쏟아져 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놈을 데리고 가야겠군.’

정호기만 인질로 잡는다면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진청운과 싸우게 됐을 때 소란이 일어도 걱정 없었다.

“나를 넘어야 할 거요.”

곽현의 의도를 눈치 챘는지 진청운이 정호기의 앞을 가로막았다.

“명(命)은 이뤘느냐?”

무림인들은 혼자 수련을 하든 명문에서 수련을 하든, 언젠가는 중원을 활보하는 날이 오게 된다.

그날을 위해 특별히 행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시(屍), 생(生), 정(情), 명(命)의 사 단계였다.

시란 이미 죽어 있는 동물의 시체를 상대로 공격하는 것이고, 생이란 살아 있는 동물을 죽이는 것이며, 정은 사람의 시체를 훼손하는 단계였다.

실상 정파에서는 정의 단계를 건너뛰는 이들이 많았는데, 사파에서는 이것을 거치고서야 실전에 투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지막 명은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단계로, 이것을 위해 정파의 후기지수는 산적이나 마적, 악인들을 찾아다녔는데, 중원을 떠도는 거대 정파의 후기지수 대부분이 견문을 넓힌다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사실은 명의 단계를 통과하려는 속셈이었다.

중소 문파나 여력이 되지 않는 이들은 사냥을 통해 생의 단계까지만 하거나 몰래 무덤을 도굴해 그 시체로 정의 단계를 마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명의 단계를 거치지 않는다면 실전에서 사람의 급소를 향해 무기를 들이미는 것을 주저하기 마련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 그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궁금하면 오시오.”

진청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곽현의 신형이 빠르게 돌진했다.

쉭!

‘허초!’

진청운이 찌른 검은 허공을 갈랐을 뿐이고, 이미 곽현의 신형은 왼쪽으로 움직인 상태였는데, 아마도 공격하는 척하면서 정호기를 노린 모양이었다.

아차 하며 진청운이 곽현을 향해 검을 날렸지만 곽현은 그곳에 없었다.

어느새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횡으로 움직이는 곽현의 눈에 진청운의 옆구리가 보였고, 그곳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진청운은 이미 공격을 한 상태였기에 자신의 검을 막고자 한다면 횡으로 베는 공격을 할 수밖에 없는데, 위력이 떨어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럼 그것을 검에 두르고 있는 바람으로 막은 후 검신을 타고 쇄도하면 그만이었다.

‘이겼다!’

승리를 확신하며 곽현이 휘두른 검은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허공을 베고 말았다.

진청운이 검을 거둬 공격을 막은 것이 아니라 검을 찌른 힘을 이용해 앞으로 이동한 탓이었다.

흩날리는 머리칼, 이것이 곽현이 거둔 성과의 전부였다.

쿵!

강한 진각과 함께 진청운의 몸이 우측으로 꺾이며 앞에 놓인 탁자를 발로 찼다.

“흥!”

코웃음을 치며 날아오는 탁자를 반으로 가른 곽현의 눈에 날카로운 검봉이 쏘아져 오는 것이 보였다.

쨍!

검과 검이 부딪칠 때 검봉이 사라졌기에 곽현은 자신의 방어가 성공했다고 여겼지만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둘?’

하나였던 검봉은 막힘과 동시에 두 개로 불어났고, 그것을 막자 넷으로 늘었다.

여덟, 열여섯, 서른 둘, 예순넷.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진청운의 검은 그 수를 더욱 불렸다.

휭!

“큭!”

결국 곽현의 검이 허공을 가르면서 짧은 공방이 마무리되었다.

한동안 정적이 두 사람을 감쌌다.

“으음… 이렇게 죽는군. 처음인가?”

“그렇소.”

“영광이네.”

곽현의 가슴에 박힌 검이 살짝 떨림을 보이고 있었는데, 첫 살인으로 진청운이 흥분한 탓이었다.

“내, 내 눈을 보게. 내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죽어 가는 이의, 그것도 자신으로 인해 죽는 사람의 눈을 마주 본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죽음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기회이자 명을 이루는 기회이기도 했는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느냐 아니면 무게에 짓눌려 눈을 감고 뒤로 물러서느냐는 오로지 스스로 결정할 일이었다.

이것은 진청운을 성장시킬 것이고, 곽현은 그 밑거름이 되고자 했다.

“가족을 부탁…….”

숨이 멎을 때까지 곽현은 눈을 감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알겠소.”

진청운이 눈을 감기자 그제야 곽현의 시신이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일단의 무사들이 들어왔다.

“소장주님!”

한 무사는 정호기를 향해 뛰어가고, 다른 이들은 모두 검을 꺼내 진청운을 겨눴다.

‘이런…….’

정호기가 있는 곳을 바라보던 진청운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는데, 상황을 설명해야 할 정호기가 옷이 벗겨진 채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 차리십시오! 소장주님! 소장주님!”

아무리 흔들어도 축 늘어져 흔들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곽현은 죽어 있고 정호기는 혼절해 있고 진청운은 피 묻은 검을 들고 있었으니, 정가장 무사들로서는 한 가지 행동밖에 할 것이 없었다.

“무기를 버려라!”

쨍그랑.

이들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진청운은 그들의 말을 따랐다.

***

“사부님, 고생하셨습니다.”

미약에 취했던 정호기가 깨어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고, 그동안 진청운은 정가장 무사들이 겹겹이 에워싼 전각에서 감금을 당했다.

“진 사부님, 고맙습니다.”

백난영과 정운룡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하자 진청운도 그들을 향해 마주 고개를 숙였다.

“제가 다 말씀드렸습니다. 총당주님이 제 옷을 벗기는 도중에 사부님이 들어오셔서 싸움이 났다고요. 조사해 보니 차에 미약을 탔다고 하셨는데, 그것 때문에 아침까지 잠을 잤습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좀 더 일찍 꺼내 드리는 건데. 죄송합니다.”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 정호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청운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죄송은 무슨. 사제 간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네가 무사해서 다행일 뿐이다.”

진청운의 말을 들으며 정호기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흐흐흐! 그래야지. 넌 떠날 수 없어. 그러라고 없는 사부도 만들어 낸 것이니까.’

진청운은 자신의 무공을 세상에 떨칠 기회가 있어야 했다.

예전, 조부인 진우현이 그랬던 것처럼 무작정 비무행을 다닐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니까.

그런 그에게 신비에 싸인 정호기의 사부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흑룡문을 언급하면서 음모가 있는 것처럼 구슬리면 너는 더욱 빠져들겠지? 곽현은 그런 너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인 셈이지.’

정호기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어렸다.

***

집으로 돌아온 진청운은 서재에 혼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소리를 지를 수 있음에도 나를 총당주와 싸우게 만들었다. 아마 총당주가 갑작스레 그런 행동을 한 것도 호기 때문이겠지? 왜?’

진청운을 부른 것은 분명 정호기였는데 지금까지 그가 한 행동은 마치 시험이라도 하는 듯 자신을 자극하고 있었고, 그것이 진청운을 혼란스럽게 했다.

‘떠나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직접 말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노리는 것이 무얼까?’

정호기의 의중에 대해서만 생각하느라 정작 자신이 왜 떠나지 못하고 있는지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도 은연중 노리는 것이 있기에 그렇다는 것을…….

* * *

“하압!”

별원의 연무장에서 정호기가 열심히 도를 놀리고 있었다.

“허허허! 몸이 아주 가볍군요.”

정호기는 제 키 만한 박도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무게가 상당할 터인데도 막힘없이 공기를 갈랐고, 그런 정호기의 모습을 보면서 연방 탄성을 발하고 있는 것은 대응방의 방주인 백영호였다.

“춤추는 나비와 일렁이는 불꽃, 그리고 멈추지 않는 강물이 떠오르는군요.”

자식이 칭찬을 받는데 어찌 부모가 기쁘지 않겠는가?

백영호의 말을 듣고 있는 백난영과 정운룡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후우…….”

짝짝짝짝.

긴 호흡과 함께 정호기가 도를 멈추자 관전하던 이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는데, 그들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진청운뿐이었다.

“진 사부님, 수고하셨습니다.”

진청운의 손을 잡고 고마움을 표하는 정운룡의 모습은 마치 정호기가 무과에 급제라도 한 것처럼 들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