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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11화 (12/137)

11화

‘적어도 내가 추궁을 하면 당황하는 표정이라도 지을 것이라 생각했거늘, 마치 기다린 사람 같지 않은가? 혹시 이것을 노리고 나를 자극했단 말인가?’

“저잣거리에는 지금 총당주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은밀히 퍼지는 중입니다. 남색, 그것도 어린 남자를 좋아한다고요. 기름은 뿌려졌으니 불씨만 던지면 됩니다. 하지만 어설프게 했다간 일이 실패할 것이고, 자칫 제 목숨도 위험할 수가 있어서요.”

“그분을 기다리면 되지 않느냐?”

“최소한 오 년은 있어야 오신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 서신을 보낼 여력도 없으실 것이라 하더군요.”

‘이 말을 확인할 길이 없구나. 하 총관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곽현과 그가 배신을 계획했다는 증거는 없고, 무엇보다 사부라는 인물이 서신을 보냈다고 하지만 보여 달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때, 마치 진청운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했다는 듯이 정호기가 뭔가를 내밀었다.

“사부님이 보내신 전서입니다.”

손바닥만 한 작은 종이에 빽빽하게 글이 적혀 있고 돌돌 말렸던 흔적까지 있었는데, 그것을 받아 든 진청운은 내용보다도 글에 담긴 기운을 느끼려 했다.

‘패기, 오직 패기뿐이구나.’

작은 글씨임에도 거침이 없었고, 망설인 흔적도 없었다.

마치 칼날을 보는 것 같은 마무리는 글쓴이의 기상이 잘 나타나 있었다.

‘이런 인물이 과연 정파의 인물일까?’

오로지 패를 추구하는 듯한 글을 보다 문득 든 생각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털어 버렸다.

이런 편견으로 인해 척혼검이 배척을 받지 않았던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사람이 중요하지, 그가 어떤 것을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독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명의는 그것으로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언젠가 그의 부친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잠룡은 분명한데, 여의주를 얻는 날 어떤 행보를 걷게 될까?’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정호기의 눈을 마주 바라보며, 진청운은 그가 자신을 믿고 있다 여겼다.

‘어째서?’

사실 지금 정호기가 말한 것은 비밀, 그것도 아주 중차대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비밀이었다.

그런데도 그것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해 준 것이다.

심성이 바르지 못한 이라면 이 비밀을 이용해 정호기를 마음대로 휘두를 정도로.

“나를 이렇게까지 믿는 이유가 뭐지?”

“사부님이 추천해 주신 분이니까요.”

‘이 아이에게 이렇게까지 신뢰를 준 사부라는 인물은 도대체 누구일까?’

“좋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드디어 허락하는 진청운의 대답을 들으며 정호기가 미소를 지었다.

‘한 번의 부탁이 두 번, 세 번이 되면서 넌 내가 말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게 될 거야.’

진청운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서둘지 말아야 했다.

“제가 총당주를 방으로 끌어들인 다음 비명을 지를 테니, 들어오셔서 총당주를 쫓아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아버지께 말씀을 드려 장에서 내보낼 수 있겠지요. 물론 사부님도 증언을 하셔야 하고요.”

“알았다.”

만일 진청운이 곽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면 이런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비무를 시킨 것이었고,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그자를 제거하라고 했다면 따르지 않았을 테지? 하지만 넌 그놈을 죽일 수밖에 없을 거야.’

***

“대응방주님요?”

“그래. 조만간 방문하기로 하셨는데, 그분과 의형제를 맺었으니 넌 백부님이라 부르면 된단다.”

“네.”

정운룡의 대응방 방문은 상당한 성과를 거둬 두 사람이 의형제를 맺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이제까지 으르렁거리던 것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두 사람이 통하는 것이 많았는지 단 하루 만에 형님, 아우 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리고 말이다, 그분께 딸이 하나 있는데 마침 너와 동갑이더구나. 이름은 수련이라고 하는데 얼굴도 예쁘고 단정하더라. 흠흠! 그래서 말인데, 나중에 그 아이와 혼례를 올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혼례요?”

“물론 지금 하자는 것은 아니고, 네가 장성한 후에 그쪽에서 허락을 하면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정략인가?’

혈신으로 추앙받을 때 혼인을 세 번 했는데, 그 모두가 정략적으로 필요해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정호기는 이것을 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운룡과 백난영은 그 태도를 오해한 모양이었다.

“호기야?”

“예?”

반응을 살피듯 바라보고 있는 부모님의 눈길을 느끼며 그제야 너무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깨달은 정호기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혼례를 올려도 엄마, 아빠하고 같이 사는 거지요?”

“물론이지. 너도 왕삼이 혼례를 올리는 것을 봤으니 어떤 것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혼례란 많은 것이 변하는 것이란다. 일단…….”

장장 반 시진에 걸쳐 혼례에 대해 정운룡이 말을 했지만, 그것은 소귀에 경 읽기였다.

정호기는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으니까.

‘조만간 찾아온다고? 그럼 곽가 놈을 서둘러 정리해야겠구나.’

곽현을 제외하고도 아직 많은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하후명이나 곽현이라는 구심점이 없다면 장에 있어서 큰 힘을 발휘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중에 천천히 정리를 해도 상관없었다.

‘아버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은 대응방주하고도 어느 정도 말씀을 나눈 것이겠지? 대응방과 좋은 관계를 맺어 놓으면 쓸데없는 소모전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면 내가 무공을 배우는 데 있어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니 나쁠 것은 없겠군. 나중에 혼례를 하건 안 하건 말이야.’

“잘 알아들었니?”

“네.”

“그리고 말이다, 그분이 오시면 너를 볼 터인데 아빠, 엄마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으니, 이제부터는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도록 하여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조만간 바꿀 계획이었는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바뀌니 정호기는 만족했지만, 백난영의 얼굴에는 아쉬운 빛이 가득했다.

“아버지, 어머니.”

“오냐, 그렇게 하면 된다. 그리고 말투도 어른스럽게 바꾸고.”

정운룡은 자식이 성장한 것 같아 기쁜 기색이었지만, 백난영은 자식이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아니 있습니다. 사부님께서 무공의 기초가 중요하다면서 오전에도 무공수련을 했으면 하셨어요… 아니 하셨습니다.”

약간 부자연스러운 정호기의 말투에 백난영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대신 밥은 꼭 함께 먹어야 한다.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연무실에 앉아 있는 정호기는 스스로의 감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나도 그분들을 사랑하고. 그 마음에는 전혀 변함이 없건만, 어째서 멀어지는 것 같을까?’

생각 같아서는 하루 십이 시진을 모두 부모님과 같이 있어도 부족할 것 같았지만, 요즘 들어 자신만의 시간을 더욱 원하게 되었다.

‘겨우 두 달이거늘.’

어째서 부모님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는지 모르는 정호기였지만, 그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백이십 년을 산 혈신으로서의 인생은 부모의 사랑이 가장 절정에 달했을 때 이별을 했고, 그것은 그의 가슴속에서 수많은 상상과 애틋함을 더해 커져만 갔었다.

그러던 것이 다시 부모님을 만나며 폭발했던 것이다.

품고 있던 감정이 화산처럼 터진 연후에는 천천히 불길이 잦아들며 뜨거운 용암만 입구에서 찰랑이는 수준으로 변한 상태였다.

지금은 알 수 없어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의 감정에 대한 정확한 답을 알게 되리라.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듯 휘휘 고개를 저었다.

‘오늘 끝내자. 그리고 오로지 무공만 익히는 거야.’

연무실을 나온 정호기가 방에 있던 진청운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슬슬 장을 돌아다녔다.

섬서성의 남쪽에 자리한 정가장은 순양현을 대표하는 상가이고 전장과 점포들을 가진 부유한 가문이었으며 그것답게 장의 크기도 컸는데,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었다.

장주 부부가 살고 있는 전각과 정호기가 사용하는 전각, 그리고 정운룡이 집무를 보는 웅혼각이 있는 곳과 하인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각 부분은 담으로 구분이 되어 독립성을 가졌고, 그중 가장 큰 곳은 물품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넓은 공간을 가진 웅혼각이 있는 곳이었다.

천천히 장의 무사들이 무공을 수련하는 연무장 겸 물건이 들어올 수 있는 곳으로 사용하는 마당을 지나 웅혼각으로 향하는 정호기의 눈에 곽현이 보였다.

‘역시 여기 있군.’

곽현의 동선은 거의 일정하여 대부분을 연무장에서 보내거나 웅혼각에 있었다.

곽현과 눈이 마주치자 약속된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가 먼저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슬쩍 건물 뒤로 움직이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곽현이 그곳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물량이 많아 일이 바쁘니 다음에 말씀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많겠지. 그걸 알고 왔으니까.’

“저기… 아주 중요한 일인데요.”

“예?”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조금은 망설이며 주저하는 모습에서 곽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놈이 왜 이러지?’

언제나 미리 준비한 듯이 묻고 싶은 것을 물어 온 정호기였기에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그, 뭐냐면 말이지요.”

“어려워 말고 뭐든 말씀하십시오.”

“저…….”

꾸물거리는 정호기 때문에 짜증이 솟았지만, 곽현은 가까스로 그것을 억누르며 얼굴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아이, 부끄러워서 여기선 말씀 못 드리겠어요. 혹시 저녁에 제 방에 와 주실 수 있나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유시 초에 찾아뵙겠습니다.”

“네, 그럼 그때 뵈어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달려가는 정호기의 모습을 보면서 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응방과 혼담도 오간다고 했는데, 저 모습을 보면 과연 대응방주가 허락을 해 줄까?”

대응방주가 정가장을 방문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곽현은 그의 방문 목적이 과연 소문대로 정호기가 쓸모없는 놈인가 확인하러 오는 것이라 여겼다.

“쯧쯧…….”

혀를 찬 곽현이 짐을 가득 실은 마차가 들어오는 정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

‘응? 누가 또 있나?’

문 앞에서 곽현이 잠시 망설였다. 분명 비밀스러운 얘기를 할 것처럼 해 놓고 다른 사람을 불러 놨기 때문이었다.

“흐흠.”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곽현의 눈에 보인 것은 의자에 앉아 있는 정호기와 진청운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진청운과 어색한 눈인사를 하고 있는 곽현을 향해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킨 정호기가 찻잔에 차를 따랐다.

“총당주님을 위해 준비한 것이랍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어 마시려던 곽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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