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꿀꺽.
백난영의 말을 들은 정호기는 마른침이 절로 삼켜지며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 어찌 이리 잘 알고 계시지? 거기다 열 살 이전에는 모른다고 하니, 아무리 뛰어난 의원에게 가더라도 칠음절맥이라 진단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진청운에게 큰소리치던 것이 생각나자 골치가 아파졌다.
‘의원이 진단을 못 내리더라도 사부님이 그리 말씀하셨다고 우기면 될 것이지만, 어머니는 어떻게 이해를 시킨다?’
칠음절맥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볼 것을 그랬다는 자책이 뒤따랐다.
‘너무 서둘렀어.’
“그거, 무서운 병인가요?”
“그렇단다. 하지만 시기만 놓치지 않으면 고칠 수 있으니 오히려 복이 될 수도 있지.”
“근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외할아버지께서 의원이시니까 잘 알지.”
‘의원이시라고?’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난 부모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구나.’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친가나 외가에 관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 잠깐만, 의원이시라고?’
만일 돌아가셨다면 과거형을 썼을 것이지만, 지금 백난영은 현재도 의원인 것처럼 말을 했다.
“의원이요? 우아, 멋지다! 황 의원님보다 뛰어나신가요?”
“물론이란다. 특히나 무인들 사이에서 유명하신 분이지.”
‘또 현재형을 썼다. 설마 살아 계신 건가?’
“훌륭한 분 같아요.”
“훌륭하다마다. 천수신의라 불리실 정도로 침을 놓는 손이 무척이나 빠르단다. 지금은 너무 멀리 계셔서 만날 수 없지만 언젠가는 꼭 찾아뵐 거란다.”
말을 하는 백난영의 손을 정운룡이 꼭 잡았는데,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그렇게 애틋하게 서로의 손을 잡은 그때, 정호기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럼 그때 그분이?’
[네놈이 천수신의냐?]
정파와 한창 전쟁을 벌일 무렵 예상치 못한 기습에 부상을 당한 정호기와 수하들이 찾아간 곳이 바로 천수신의가 있는 곳이었고, 끝끝내 자신들을 치료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천수신의의 가슴에 검을 꽂았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물론이고.
정호기의 눈이 정운룡에게로 향했다.
‘설마…….’
묻기가 두려웠지만,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다.
자신의 인생이 어디까지 꼬였었는지 알고 싶었기에.
“아빠.”
“응?”
“할아버지는 뭐하는 분이세요?”
“할아버지?”
질문을 받은 정운룡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런 그를 향해서 백난영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산서에서 제법 유명한 무인이시란다.”
‘산서? 산서에서 유명하고 정씨 성을 쓴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정호기의 뇌리를 맴돌았다.
“산서 태력문이 바로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 가문이다.”
정운룡의 말을 듣고는 정호기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크하하하하! 불을 질러라! 한 놈도 남김없이 씨를 말려라!]
그날, 자신의 몸을 적시던 뜨거운 피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젠장! 도대체 어디까지 꼬인 거야? 가만, 그때 태력문을 치라는 것도 냉백 그 개새끼가 내린 명령이었잖아? 그렇다면?’
다른 이들도 있었지만, 냉백은 정호기를 콕 찍어 태력문의 말살을 명령했다.
만일 정호기의 친가가 태력문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면 냉백은 그야말로 철저하게 정호기를 가지고 논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씹어 먹을 새끼!’
새삼 분노가 끓어올랐다.
정호기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멍하니 있는 사이, 진청운이 옷을 갈아입고 나타났다.
이후의 이야기는 정호기의 의도대로 흘러갔는데, 칠음절맥 부분에서는 진청운이 정호기를 한 번 바라보고는 지나던 분이 말을 해 주었다고 얼버무려 넘어갔다.
결국 진청운의 가족이 모두 정가장으로 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진수수는 이곳에 도착하면 의원의 진맥을 받아 보기로 했다.
***
“후우…….”
정운룡과 진청운을 배웅한 후 백난영에게 졸린다는 핑계로 글공부를 쉰 정호기가, 연무실에 앉아서 왕삼이 만들어 온 박도를 바라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유가 있었던 거군.”
손잡이는 한 자에 도신이 이 척 오 촌인 박도는 다른 박도와 비교해서 별 차이가 없었지만, 이것을 사용하는 것은 어린 시절뿐이었다.
“아버님이 가문에서 나온 것은 그것 때문이겠지?”
정운룡은 육 척이 못 되는 키였지만, 보통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태력문의 사람들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육 척을 넘는 체격을 자랑했으니까.
거기다 여자들의 팔뚝도 어지간한 남정네의 허벅지와 그 굵기가 비슷했다.
그 속에서 평범한 체격의 정운룡이 버티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호기는 친가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열세 살이 넘으면서 키가 크기 시작하더니 열여덟에 육 척을 넘었고 근육도 그와 비례하여 커졌는데, 결국엔 보통 검은 그에게 맞지 않았기에 특별히 크게 제작한 검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손잡이는 한 자 반에 달하고 도신은 오 척에 이르는 거대한 검을.
“한 번 잘못 디딘 발걸음이 나를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트렸구나.”
정파를 무너뜨리는 것도 모자라 친가와 외가를 모두 자신의 손으로 풍비박산을 만들고 친족들을 도살했으니, 그 죄를 어찌 다 감당할 수 있겠는가?
당시의 정호기는 여자나 어린아이라고 해서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었다.
세뇌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가슴속에서 솟아오르는 살기를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이라고 다를까?”
부모님을 위협하는 존재라면 그것이 설사 여자나 아이라고 해도 봐주지 않을 것이었다.
“막아서면 벨 뿐!”
다짐을 한 정호기가 도를 들고 일어섰다.
“추혼(追魂)!”
도가 허공을 노닐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쫓듯이 어지럽게 누비던 도가 점점 빨라지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정지했다.
“절혼(折魂)!”
쉬익!
도는 가만히 있건만 한 줄기 바람이 앞으로 쏘아졌다.
비록 힘이 약해 미풍에 불과했지만 그것도 정호기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으음…….”
아랫배를 부여잡고 주저앉는 정호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리였나?”
단전이 찌르르한 것이, 마지막에 절혼을 펼치며 쓴 내공이 문제가 된 모양이었다.
“후우… 후우…….”
한동안 심호흡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같이 진정시킨 정호기가 자신의 뺨을 양손으로 강하게 쳤다.
“천천히, 서둘지 말고. 조바심은 더욱 뒤로 가게 만들 뿐이다. 천천히 가는 거야.”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이미 한 번의 주화입마를 겪은 정호기였기에 조심스럽게 가고 싶었지만 마음이 따라 주지 않았다.
“또다시 침상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싶진 않겠지?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아직 시간은 있다.”
되뇌고 또 되뇌어도 오늘처럼 심란한 날이면 어김없이 무리를 하게 되는 자신이 불안했다.
“난 할 수 있다, 난 할 수 있어.”
몇 번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오빠, 어디 아파?”
“응? 아니.”
“근데 왜 울어?”
“아무것도 아니야. 자, 가자.”
수수는 자신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정호기의 눈가에 맺힌 눈물과 그가 나온 건물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곽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 아저씨가 또 혼낸 거야?”
“아니라니까. 수수야, 이건 비밀이야. 알았지?”
“응? 응.”
“사모님 기다리시겠다. 어서 가자.”
진수수가 정가장에 도착한 지도 벌써 보름이 되어 가고 있었고, 정호기와 자주 어울린 때문에 이제는 오빠라 부르며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진청운과 가족들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진수수가 낮에 봤던 광경을 이야기했다.
“아빠, 낮에 오빠 또 울었어요.”
“응?”
“오빠는 아니라는데, 눈에 눈물이 있었어요.”
진수수의 말을 들은 독고화란이 진청운을 째려보았다.
“너무 심하게 가르치는 것 아니에요? 얼마나 힘들면 울겠어요?”
독고화란은 지금의 생활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수수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게 할 수 있었으며, 자신도 더 이상 돈을 벌기 위해 바느질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독고화란의 볼멘소리를 들은 진청운은 어이가 없었다.
‘가르치긴 뭘 가르친단 말인가?’
오후로 책정된 시간 중 자신과 정호기가 마주하는 시간은 다 해야 일각이 채 못 되었는데, 정호기가 연무실에서 혼자 수련을 하는 까닭이었다.
그런데 이런 억울한 누명을 쓰다니.
“또 울었다고?”
아무리 억울해도 독고화란과 말싸움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진수수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는 울보야. 총당주 아저씨만 만나면 울어. 근데 안 혼났대. 혼나지도 않았는데 왜 울지? 아, 이건 비밀인데… 엄마, 아빠, 이건 비밀이에요. 네?”
비밀이라며 약속하자는 진수수의 얼굴은 무척이나 앙증맞았지만, 진청운은 그런 딸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운다? 그 영악한 호기가?’
진청운은 이미 정호기를 보통 소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총당주와 무슨 일이 있나? 그러나 그런 일이 있다면 장주께 말하면 해결될 것인데?’
정운룡의 정호기에 대한 애정은 얼마 지켜보지 않은 진청운도 알 정도였다.
‘말하지 못할 무슨 사정이라도?’
하지만 자신을 상대하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도저히 울고만 있을 정호기를 떠올릴 수 없었다.
‘아니야. 설사 울더라도 그것을 누군가에게 보일 정도로 허술한 호기가 아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총당주와 내가 비무를 한 날에도 어두운 표정을 보였었지. 하지만 만일 진짜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것을 내비치지 않았을 거다.’
***
“수수를 이용하지 마라.”
정호기를 따라 연무실로 들어온 진청운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티가 났나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직접 해.”
“좋습니다, 말씀드리지요. 총당주를 쫓아내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왜지?”
“하 총관이 실종된 것은 아시지요?”
“알고 있다.”
“사부님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장을 배신했습니다. 사실 배신을 계획한 것은 하 총관이었고, 총당주는 그것을 따르는 입장이었죠.”
“배신이라면?”
“부모님을 모두 죽이고 장을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사부님이 그것을 미리 파악하시고 하 총관을 제거하였지만, 전 그것으로 마무리 짓고 싶지 않습니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을 계속 옆에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마음을 고쳐먹었을 수도 있다.”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장주께 말씀을 드리면 되지 않겠느냐?”
“증거가 없습니다.”
“네 말이라면 증거가 없다고 해도 믿으실 거다.”
“저를 무척 사랑하시는 것은 맞지만, 그것 때문에 확실하지 않은 이유로 총당주를 내치실 분은 아니십니다. 그리고 저는 확실한 결말을 원합니다.”
“그래서 일을 꾸미는 것이냐?”
“예.”
막힘없이 대꾸하는 정호기를 보면서 진청운은 이 작은 소년이 정말 열 살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