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감숙 진가의 청운이며,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의 검법을 익혔습니다. 별호는 아직 없습니다.”
독기가 자르르 흐르는 곽현의 눈빛을 받으며 진청운이 자신의 이름과 무공 내력을 담담하게 말했지만, 사실 그는 흥분한 상태였다.
‘드디어!’
아직까지 타인과 비무 한 번 해 보지 못한 진청운이었기에 자신의 첫 상대가 질풍검 곽현이라는 것에 조금은 걱정도 들었다.
질풍검 곽현은 섬서에서는 그래도 이름을 날린 무인이었고, 별호가 말해 주듯 거침없이 몰아치는 검법을 사용했다.
“질풍검 곽현이오.”
상대가 정중하게 나오는데 이쪽에서 그것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니, 곽현도 자신의 별호와 이름을 말하고는 자세를 잡았다.
“후읍.”
깊게 숨을 들이쉰 진청운이 검을 뽑아 들고는 곽현을 향해 몸을 날렸는데, 검이 그의 옆구리에 위치하고 검봉은 곽현을 노리고 있었다.
‘찌르기인가?’
검이 찌르기를 위주로 개발된 무기라고는 하나 그것은 내공이 발전하면서 잊힌 지 오래였다.
‘점으로 공격하면 면으로 방어하면 그만인 것을.’
역시나 곽현의 예상대로 진청운의 손이 움직이며 검의 잔상들이 그를 노리고 쏘아졌다.
“흥!”
코웃음을 친 곽현이 검을 놀렸는데, 처음 좌에서 우로 검이 지나갈 때 미풍이 불더니 검이 움직일수록 그 바람의 세기가 세졌다.
질풍검의 비밀은 검면을 이용해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었고, 그것으로 상대를 혼란에 빠뜨림과 동시에 공격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한 번만 부딪치면…….’
검날을 따라 미끄러지듯 파고들 수 있도록 곽현의 뒷다리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쨍!
드디어 검과 검이 부딪혔지만, 곽현은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뒤로 물러나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배가시켜야만 했다.
진청운의 검봉이 곽현의 검날을 정확하게 찔렀던 것이다.
‘어떻게?’
종잇장처럼 얇은 검날을, 그것도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바람으로 형체를 일그러트린 검날을 정확하게 맞힐 수 있단 말인가?
곽현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쨍! 쨍! 쨍! 쨍!
검봉과 검날은 계속 부딪쳤고, 그러는 동안 바람은 잦아들었으며, 곽현의 뒷다리는 단단한 연무장의 땅을 발목까지 잠길 정도로 파고들었다.
쩡!
이제까지와는 다른, 귀청을 찢을 듯한 소리가 들리며 진청운이 훌쩍 뒤로 물러났다.
“더 이상은 힘들 것 같습니다. 손속에 사정을 두심에 감사드립니다.”
말을 하면서 진청운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는데, 지금 진청운의 모습은 패배를 자인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곽현은 그것이 자신을 모독하는 행위라 여겼다.
작은 실금.
한 번의 부딪침만 더 있어도 부러지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발끈했겠으나 그럴 수 없었다.
검을 거둔 곽현이 진청운을 바라보자 어느새 떠오른 햇살에 반짝이는 물방울들이 얼굴에 맺혀 있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젖어 있었는데, 짧은 공방에도 불구하고 많은 심력을 소모했기에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리라.
‘놈! 다음에는 다르리라!’
이번 비무는 상대를 몰랐기에 나타난 결과라 생각하고 있는 곽현은 자신이 패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진우현 대협과는 어떻게 되시오?”
“조부님이십니다.”
“과연. 몇 합이었는지 아시오?”
“제가 센 바로는 백사십칠 합이었습니다.”
“나도 그렇소.”
부딪치는 소리는 겨우 여섯 번이었지만, 공방은 백마흔일곱 번이나 있었다는 말이었고, 그것은 전부 검날을 두드린 숫자였다.
“척혼검이 다시 주목받을 날이 머지않았구려.”
“감사합니다.”
진청운과 마주 포권을 한 곽현이 정운룡을 바라보았다.
“소장주님의 무사부를 맡기에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소?”
“예. 그럼 저는 이만.”
몸을 돌려 걸어가는 곽현의 등이 흠뻑 젖어 있었는데, 그것은 진청운이 흘린 땀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진청운이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며 기분 좋은 흥분을 느꼈다면, 곽현은 등골이 서늘한 긴장 속에서 식은땀을 흘렸기 때문이다.
그것을 유심히 바라본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정운룡이었다.
‘총당주가 비세였단 말인가?’
겉으로는 진청운이 신나게 공격을 하다가 지쳐 물러난 것처럼 보이고, 땀도 진청운이 더 많이 흘렸기에 곽현이 이긴 것 같았다.
왕삼의 경우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정운룡은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했던 것이다.
내심 흐뭇한 시선으로 진청운과 왕삼을 바라보던 정운룡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 녀석이 어디 갔지?”
***
“총당주님.”
별원을 나선 곽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정호기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곽현이 약간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정말 멋있었어요!”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정호기의 얼굴은 상기되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총당주님이 그렇게 강하신 줄 알았다면 왕삼에게 말하지 않는 건데…….”
정호기의 모습은 고수의 결투를 보고 잔뜩 흥분한 하수의 그것과 같았다.
그런 정호기를 곽현은 처음에는 서둘러 말을 끝내고 헤어지려 했으나, 지금의 자신을 돌이켜 보자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 애송이가 장을 이어받을 것이다. 그때 내가 이놈을 쥐고 흔들면 되지 않겠는가? 여차하면 놈을 제거해도 되고. 이놈의 곁에 있으면서 내 사람들을 요직에 심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약속을 해 버려서 진 대협을 보낼 수도 없고. 아빠가 남자는 약속을 지켜야지, 그렇지 않으면 꼬추가 떨어진다고 했는데…….”
혼자 웅얼대면서 고민하는 정호기의 모습은 그야말로 철부지 어린아이였다.
“소장주님, 약속을 어길 필요는 없습니다. 이대로 진 대협에게 무공을 배우시면 됩니다. 그러다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그때 제게 물어보러 오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진 대협이 대답을 해 주지 못하는 걸로요.”
“그러면 되겠네요. 총당주님은 진 대협보다 강하니까 더 많이 아시겠지요?”
“물론입니다.”
“저기… 무공 말고 다른 것도 물어봐도 될까요?”
“뭐든 물어보십시오. 제가 아는 한에서는 성심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진 대협이 알게 되시면 저한테 심술궂게 하지 않을까요? 수련할 때 일부러 힘든 것만 시킨다든가 하는 것 말이에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럼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나중에 몰래 저를 찾아오십시오.”
“총당주님을 자주 찾아뵙는다면 그것도 언젠간 소문이 날 테고, 진 대협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까요? 아!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떤가요? 총당주님은 장을 많이 돌아다니시잖아요? 저와 마주칠 때 제가 이렇게 손가락을 올리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이니까, 그것을 보시면 근처의 으슥한 곳으로 먼저 들어가시는 거예요. 그럼 제가 따라 들어갈게요. 어때요, 멋진 생각이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두 사람이 막 결론에 도달했을 때, 정호기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호기야! 이 녀석, 어디 있는 게냐?”
담장 너머로 들리는 정운룡의 목소리에 정호기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곽현을 바라보고는 후다닥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곽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젠장! 하가 놈이 사라진 지금 저 애송이의 비위를 맞추는 수밖에 없는 건가? 도대체 그놈은 어디로 사라져서…….’
오늘 정운룡이 대응방에 다녀온다면 그간 하후명이 벌였던 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를지도 몰랐다.
뭐, 어차피 그것은 하후명이 전면에 있었기에 모든 책임은 그에게 지워질 것이지만, 알게 모르게 동조해 온 자신과 나머지 인물들의 행동도 드러날지 몰랐기 때문에 미리 정호기를 구워삶아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야. 하가 놈이 사라진 것이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만약 자신들의 잘못이 드러나더라도 모든 것을 하후명에게 뒤집어씌우면 될 것 같았다.
‘저놈이 뭘 좋아하더라?’
다음에 만날 것을 대비해 정호기가 좋아하는 선물이라도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한 곽현이었다.
***
“왜 그러느냐?”
조금은 침울한 얼굴로 문을 들어서는 정호기의 얼굴을 본 정운룡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분명 곽현과 헤어질 때만 하더라도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건만 문을 들어서는 짧은 순간에 바뀐 것이다.
“아니에요. 저… 근데 저분을 무사부님으로 모셔도 되나요?”
“물론이다. 그런데 정말 아무 일 없는 거냐?”
“예.”
애써 밝게 말하고는 있지만, 그 속에 담긴 무거움을 느낀 정운룡이 별원의 문을 바라보았다.
‘호기가 왜 저러지?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밖으로 나간 이라고는 총당주뿐인데, 그가 무슨 서운한 말이라도 한 것인가?’
정운룡도 곽현이 왜 그리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났는지 짐작하고 있었고,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호기에게 화풀이를 할 총당주가 아니거늘…….’
“저기, 아빠.”
“응?”
“이제 사부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물론이지. 자, 일단 들어가자꾸나.”
***
접견실로 들어온 정운룡, 백난영, 정호기는 진청운이 씻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제가 그분과 얘기를 나눠 봤는데요, 그분 딸이 아프대요.”
“아파? 어디가?”
“칠음절맥이라고 하시던데요?”
“칠음절맥?”
정운룡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백난영의 얼굴엔 놀란 표정이 가득했다.
“정말 칠음절맥이라고 하셨느냐?”
백난영이 조금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칠음절맥이 무엇이오?”
“서서히 혈맥이 굳어 가는 병으로, 약관을 넘기기 어렵지만 대신에 오성이 뛰어납니다. 시기에 맞춰 치료할 수만 있다면 기재가 될 수도 있지요. 호기야, 따님이 몇 살이라고 하시던?”
“네 살요.”
“네 살?”
이번엔 대답을 들은 백난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하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요.”
“이상하구나. 발병이 된다고 해도 열 살 이전에는 병명을 확정할 수가 없는 것이 칠음절맥이거늘. 앓고 낫기를 반복하기에 그저 허약하다 여기게 되고, 혈맥이 굳는 시점도 열 살이 넘어야 하는데…….”
뭔가 일이 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