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그는 내게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인물이니 네가 데리고만 온다면 향이와 혼례를 올려 주겠다. 자, 이것도 같이 전해 드리고.”
서찰과 주머니를 내밀며 다시금 향이를 거론하면서 왕삼을 자극하자 그의 얼굴에서 결연의 빛이 보였다.
“꼭 모시고 오겠습니다!”
왕삼이 잔뜩 흥분한 채로 서찰과 주머니를 챙겨 나간 후에 개방에서 보내 준 서찰을 바라보면서 미소 짓는 정호기였다.
‘데리고 오든 못 데리고 오든 크게 상관없다. 물론 데리고 오면 좋겠지만 실패한다고 해도 나중에 다시 찾아가면 될 일이니까.’
진청운.
지금도 무공이 뛰어나지만 이십 년 후에는 일가를 이룰 정도의 무공 실력을 자랑하게 될 인물이었다.
마중마 연성 계획을 마치고 중원에 나왔을 때 정호기를 위협했던 최초의 인물이었으니까.
‘나머지 놈들도 천천히 그 위치를 파악하면 되겠지.’
정파를 멸문시킬 당시 만만치 않던 이들 중에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이들을 생각해 내고 그들을 영입하기 위해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 정호기였다.
‘장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무공을 익힌다는 핑계를 대려면 무공 사부가 필요해. 그것도 내 뜻대로 조종할 수 있는 무공 사부가.’
이대로 무공을 익히면 언젠가는 그것이 겉으로 드러날 것이고, 그때를 위한 변명거리가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청운 같은 인물이 제격인 것이다.
‘답답한 놈들.’
쥐뿔도 없으면서 무공 하나만 죽어라 파며 가족은 나 몰라라 내팽개치고, 자식이 죽어 가는데도 도둑질이라도 해서 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든 정당하게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정호기는 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세 명의 인물이 정호기의 뇌리에 각인되었고, 그들은 마치 그것이 옳았다는 듯이 정호기를 상대로 놀라운 무위를 보여 줬었다.
‘조해는 떠돌이라 그 행방이 묘연하고, 영초린은 좀 더 커야 하니 기다려야 하고,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것은 진청운밖에 없구나. 아직 애송이이긴 하지만 그 덕에 손쉽게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거야.’
그들 말고도 자신의 기억에 있는 이들이 있었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도 있고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시간은 흐를 것이고, 때를 잘 맞춰 그들을 데리고 오면 된다. 그렇게 되면 장은 강해질 것이고, 흑룡문이 발호하게 되면 정파의 축이 되어 그들과 싸울 수 있겠지.’
복수를 위해 흑룡문과 싸울 것이지만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될 생각은 없었다.
당당하게 정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자신이 없는 흑룡문과 일전을 벌이고 싶은 것이 그의 진정한 속내였다.
‘조금 더 기억을 떠올려 보자. 쓸 만한 놈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
***
“소장주님! 소장주님!”
이른 새벽,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운공에서 깨어난 정호기가 문을 열자, 그곳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왕삼이 서 있었다.
“모시고 왔느냐?”
“예.”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으로 보아 간신히 서 있는 것 같았고, 눈 밑은 시커멓게 죽어 있어 마치 시체를 보는 것 같았지만 왕삼의 입가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어디에 계시느냐?”
“접견실에 계십니다.”
“수고했다.”
“저…….”
“다른 할 말이 있느냐?”
“총당주님도 같이 계십니다.”
세 개의 당이 있는 정가장에서 총당주직을 맡고 있는 이는 장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곽현이었다.
새벽에 외인이, 그것도 정호기의 처소로 간다는 소식에 달려온 것이리라.
“오늘 장주님께서 대응방에 가시는 일 때문에 철야를 하신 모양입니다.”
“알았다.”
정호기가 접견실로 향하자 그제야 왕삼이 풀썩 주저앉았는데, 그런 그의 눈은 멀어지는 정호기의 등에 고정되어 있었다.
‘너무 변하셨다.’
[삼아, 삼아, 전병 사다 줘.]
주방에 말하면 언제라도 먹을 수 있는 밀전병이지만 정호기는 자주 왕삼에게 길거리에서 파는 전병을 사 달라고 부탁하곤 했는데, 그때의 모습이 왕삼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그것을 떠올리던 왕삼은 조금씩 멀어지는 정호기의 등을 보면서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입구나 지켜야겠군.’
전각의 입구로 걸어가는 왕삼은 그래도 박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자신은 임무를 완수했으니까.
***
활짝 열린 접견실의 문으로 들어서는 정호기를 보면서 곽현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정호기의 시선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진청운이란 청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고, 자신에게 알은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방진 놈.’
곽현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정호기가 갑자기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총당주님, 이분은 제가 모신 것이 맞으니 안심하시고 이만 돌아가셔도 돼요.”
어찌 보면 곽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 같았지만,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이만 꺼져 달라는.
“크허험! 알겠습니다.”
불편한 속내를 숨기지 않고 접견실을 나서는 곽현이었으나, 정호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하후명이 죽으면서 끈 떨어진 연 신세였고, 조만간 처리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변절자를 계속 옆에 두는 것은 그의 성격상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반갑습니다. 정호기라고 합니다.”
“진청운입니다.”
이제 스물다섯 살인 진청운은 행색이 초라했는데, 거친 마의와 해진 신발은 그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정호기의 서찰을 꺼내더니 물어 오는 진청운의 얼굴에는 약간의 불쾌함도 묻어 있었다.
‘기분이 상했나?’
서찰에는 그를 자신의 무사부로 모시고 싶다는 내용과 함께 월 은자 스무 냥의 사례를 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액수가 적다면 더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수에 대해 어떻게 알고 계시냐 하는 것입니다.”
진수수는 이제 네 살 된 진청운의 딸이었고, 병세라고 할 만한 것이 발병한 지 겨우 두 달 된 시점이었다.
“무사부를 모시면서 어찌 그런 것도 조사하지 않았겠습니까?”
“아직 의원을 모신 적이 한 번도 없거늘 알고 계시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근처의 산에 올라 약초를 캐면서 생활하던 진청운이었고, 딸이 아프면 그 약초로 치료를 했었다.
이번에도 열이 살짝 오르기에 약초를 달여 먹이자 금방 가라앉았는데, 그것이 계속 반복이 되어 의원을 찾아갈까 생각하던 중이었던 것이다.
‘네놈의 그 고지식한 면은 우리 흑룡문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지. 그것 때문에 딸자식을 죽인 멍청한 놈이라고 말이다.’
이십 년 뒤, 진청운의 명성이 조금씩 퍼지기 시작할 때 앓다 낫기를 반복하던 진수수가 드디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그를 식객이나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는 이들도 있었고, 그들이 진수수를 치료해 주겠다고 했지만 진청운은 거절했다.
그 조건이 진청운을 무사부로 영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청운도 얻고 그가 익힌 무공도 날로 먹으려는 속셈이 뻔히 보였기에 가문의 무공을 외인에게 줄 수 없다는 마음에 거절한 것이지만 결국 그로 인해 진수수가 죽게 되었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아는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병세가 예사 병세가 아니라는 것도요.”
“의원에게 가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 왜 오셨습니까?”
진청운의 말마따나 의원에게 가도 알 수 있는 일이라면 이곳에 굳이 찾아오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왕 소협의 간청도 있었고, 이것을 돌려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같이 가지 않겠다면 차라리 죽이라면서 대성통곡을 해대는 왕삼이 한몫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주머니에 든 것이 더 큰 공을 세웠다.
왕삼이 발버둥을 치는 와중에 주머니가 열리면서 그 속에서 작은 금송아지가 굴러 떨어졌는데, 그것을 본 진청운의 처가 서찰을 빼앗다시피 하여 읽은 후에 그를 닦달했고 아직은 젊은 나이의 진청운이었기에 서슬 퍼런 부인의 잔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를 피하려는 마음에 왕삼과 같이 길을 나서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비록 값이 나가는 물건이지만, 따님의 진료비로는 턱없이 모자랄 것입니다. 거절하시더라도 따님의 약값에 보태 쓰시라는 저의 작은 성의이니 받으셔도 됩니다.”
정호기의 말에 진청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정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개도 안 물어 갈 자존심.’
진청운의 대답을 들으며 정호기는 속으로 비웃었다.
“동정이 아닙니다. 제 성의지요.”
“제안을 거절할 것이니 받을 이유가 없소이다. 그리고 내 딸의 병은 내가 고치오.”
“무슨 병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의원에게…….”
“그렇군요. 그럼 알게 되시겠지요. 그 병을 고치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갈 것인지도 말이지요.”
비아냥거리는 것 같은 정호기의 말에 진청운이 폭발하고 말았다.
“닥치시오!”
“닥쳐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오! 의원에게 데리고 간다? 그럼 알 것 같소? 솔직히 말하지. 당신이 데리고 간다는 그 싸구려 의원은 병명도 짚어 내지 못할 것이오. 용한 의원을 찾아가기에는 돈이 부족할 것이고. 사실 그 금송아지는 뛰어난 의원에게 진맥이라도 받아 보라는 의도에서 준 것이었소. 약값? 진맥을 받고 침이나 한 번 맞으면 없어질 금액이오. 따님의 병명이 뭔지 아시오? 바로 칠음절맥이오.”
정호기의 말에 다시 발작하려던 진청운의 얼굴이 굳었다.
“치, 칠음절맥이라고 하셨소?”
약초를 내다 파는 진청운이었기에 여러 가지 병명들을 알고 있었고, 의원들과 어울리다 보니 희귀한 병의 이름도 여럿 주워들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칠음절맥도 있었기에 진청운의 얼굴이 굳은 것이었다.
“오성은 뛰어나나 약관을 넘기기 어렵고, 치료시기를 놓치면 설사 전설의 만년삼왕이라고 하여도 살리기 어렵다는 그 칠음절맥이 맞소.”
서서히 혈맥이 굳어 가는 점에서는 구음절맥과 비슷하지만 일정 시기가 지나면 굳은 혈맥이 썩어 가는 차이가 있었고, 구음절맥은 굳은 혈맥을 풀어 줄 수 있는 영약이 있다면 언제라도 고칠 수 있지만 칠음절맥은 시기를 놓치면 어떠한 영약으로도 고칠 수 없었다.
진수수가 스무 살이 넘어도 살 수 있었던 것은 진청운이 먹인 약초와 뛰어난 진청운의 내공으로 인한 것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스물을 넘기기 전에 죽었을 것이었다.
“그, 그것이 정말이오?”
사실 진청운은 자신을 청한 이가 꼬맹이라는 사실에 실소를 금치 못하였었다.
정가장이란 이름도 들어 봤고, 정운룡이 장주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또한 정운룡의 슬하에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아들이 있다는 것도.
그렇기에 왕삼을 보낸 이가 정운룡이라 생각했고, 서찰도 그가 썼다고 여긴 것이다.
그렇게 여길 만큼 서찰에 적힌 글에 힘과 패기가 느껴진 것도 한몫했지만.
“사실인지 아닌지는 의원에게 물어보면 될 것 아니오.”
맞는 말이었고, 이렇게 당차게 나오는 걸 보면 그것이 사실일 확률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