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게 죽는다!’
왕삼 자신이 미약을 사는 것은 솔직히 다른 이들이 보기에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젊은 놈이 뭔가 꿍꿍이가 있는가 보다 하고 여길 테니까.
평판은 나빠지겠지만 완전히 생뚱맞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호기가 미약을 원한다면?
‘절대 누구도 알면 안 돼. 그것뿐만이 아니라 개방에서 정보를 알아본 것도, 그리고 이제부터 소장주님이 시키는 그 어떠한 일도 소장주님과 결부시키면 안 된다.’
“다, 다른 분부는 없으십니까?”
“응.”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서둘러 방을 빠져나가는 왕삼을 보면서 정호기가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 심부름꾼이야. 미련하다는 것만 빼면 말이야.’
정호기도 왕삼이 미련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어떤 면으로는 오히려 약삭빠른 이가 바로 왕삼이었다.
그럼에도 미련퉁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한 여자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이유에 있었다.
‘여자 따위에 정신을 빼앗기다니. 그것도 한 여자에게.’
삶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만을 강요당한 정호기에게 있어서 여자와의 사랑은 사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 여자에게 품을 수 있는 감정은 욕정뿐이었고, 세 명의 부인과 그들 사이에서 난 자식들에게도 애정을 갖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의식은 아직까지 변하지 않았다.
부모를 끔찍이 생각하는 정호기의 모습을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의 집착에 가까운 애정은 오로지 부모에게만 향해 있었고,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은, 살려서 이용할 것인가 죽여서 후환을 제거할 것인가 하는 것뿐이었다.
만일 하후명이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고 하여도 그를 죽였다는 것에 후회 따위는 하지 않았을 정호기인 것이다.
***
“흠… 하후명이 사라졌다고?”
“예.”
보고를 하는 복면인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인물이 얼마나 잔인하고 수하들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풍검 냉백.
검은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와 있고, 머리에는 문사들이나 쓰는 모자를 쓰고 있어 얼핏 보면 서생처럼 보일 정도였지만, 그의 허리에 달린 낭아도가 뽑히면 늑대의 이빨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는 날이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냉백의 상대는 멀쩡한 시신을 남긴 이가 없었고, 너덜너덜한 살점과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잔해들은 그의 상징과도 같았다.
“다른 놈들은?”
“우왕좌왕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하후명이 사라진 지금 그들은 끈 떨어진 연 신세이니 말입니다.”
“놈을 찾지 못했나?”
“예. 다만 장을 나선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내부에서 변을 당한 것 같습니다.”
“내부에서 당했다? 그럼 정운룡이 나선 것인가?”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놈이 정가 놈에게 불었을까?”
“…….”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람의 입이란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도 열리게 마련이었으니까.
“너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느냐?”
“정가장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정운룡과 그의 가족만이라도 죽여야 한다고 봅니다.”
냉백의 물음에 복면인이 속으로 안도하며 바로 대답을 했는데, 의중을 물어본다는 것은 아직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쯧쯧! 개방의 눈은 어떻게 할 것이냐? 놈들의 의심에 확신이라도 심어 주겠다는 것이냐?”
“놔두면 정운룡이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 봤자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놈이 아는 것이라고는 나뿐일 테니까. 지금까지처럼 단지 의심으로 끝나는 것이지.”
무어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복면인은 자신의 실수가 덮어지고 목숨을 건진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모두 문으로 철수하도록 해라. 천이(千耳) 계획은 끝났으니.”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복면인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에 냉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끝났는가?’
일천 개의 귀를 만드는 계획은 십 년에 걸쳐 이루어졌고, 중원 곳곳에 흑룡문의 사람들을 심는 것에 성공했다.
그것도 정파가 알지 못하도록.
‘준비를 마쳤으니, 이제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마중마의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정파는 의심을 지울 것이고, 그들이 방심하는 날 우리 흑룡문은 그들의 심장을 찌를 것이다. 마중마 연성 계획에 의해 날카롭게 다듬어진 검으로!’
모두 삼백여 명의 소년소녀.
정파가 파악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크고 작은 문파들이 흑룡문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그 문파들의 생존자이자 후손들이 정파에 이를 갈고 있었다.
마중마의 계획에 의해 계속해서 정파에 대한 증오심을 키울 것이고, 정파를 간악한 모리배로 알게끔 세뇌를 시킬 것이었다.
‘어차피 정가장을 제외하고도 이곳 섬서에는 세 곳의 거점이 더 있으니, 일부러 자극할 필요는 없겠지.’
하후명이 살아 있다고 해도 그를 앞세워 정파에 하소연한들 흑룡문에 따지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일단 흑룡문에서 모르쇠로 나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증거라고는 단 한 번 추풍검을 만났다는 하후명이 전부인데.
만일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누명을 씌운다고 괘씸죄를 물어 쓸어버리면 간단한 일이었다.
솔직히 타인이 보기에 냉백 정도 되는 인물이 하후명을 상대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고,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 냉백이 일선에 나선 것이었으니까.
***
“뭐? 아버지께서 어딜 가신다고?”
“대응방에 가신답니다. 저번에 회의를 연 것도 직접 대응방주와 대면하여 그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의 전말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답니다.”
왕삼의 말을 들으면서 정호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버지는 어떤 낌새를 눈치 채신 거야. 그렇기에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으려고 직접 나서시려고 했겠지. 그걸 안 하 총관이 일을 벌인 것일 테고.’
장에 속한 가신들을 모두 모이게 했던 지난번의 회의가 그런 목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정호기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새삼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위험하지 않을까?”
“대응방주도 흔쾌히 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한다면 그쪽에서 우리 장으로 오겠다는 전갈을 보낸 것으로 보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께서 직접 가신다고 했느냐?”
“예.”
“언제 가신다고 하더냐?”
“모레 오시 초까지 가신다고 하셨으니, 대응방주와 같이 점심을 드실 모양입니다.”
“알았다. 그만 물러가거라.”
“예.”
왕삼은 완전히 정호기의 심복이 되어, 그의 심부름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장의 정보도 알아 왔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자신만의 시간이었기에 그동안 무공을 익히는 것에 할애하던 정호기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전각을 나서 정운룡의 집무실로 향했다.
***
“아빠.”
“어이구, 우리 아들. 그래, 어쩐 일이냐?”
근 한 달을 혼자만의 시간을 갖던 정호기였기에 찾아온 아들이 반가운 정운룡이었다.
“모레, 어디 가신다면서요?”
“삼이에게 들었느냐?”
“예.”
“그 녀석이 별소릴 다 하는 모양이구나.”
“괜찮으시겠어요? 대응방은 우리를 싫어한다고 하던데…….”
“이리 오너라.”
정호기를 무릎에 앉힌 정운룡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오해하고 있는 거란다. 오해가 쌓여 불신이 되고, 그것이 폭력을 부른 것이지. 만일 이대로 간다면 누군가 크게 다칠 수 있기에 그것을 막으려는 것이란다. 알겠니?”
“네.”
“사람과의 사이에서 분쟁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은 각기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니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대화가 필요하지. 머릿속에 담아 두기만 해서는 상대를 이해시킬 수 없으니 말이다.”
“네, 그렇군요.”
대답을 하면서 정호기가 주먹을 살짝 쥐었는데, 그는 대화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주둥이 아프게 놀려도 못 알아먹는 놈들도 있지.’
그런 면에서 보면 대응방은 말이 통하는 상대일 것 같았다.
‘흠, 그래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진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방법을 생각해 낸다고 해도 시간이 촉박한 것이 문제였다.
‘곽가 놈은 이미 변절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믿을 수가 없고.’
정가장의 경비를 맡고 있고 정가장 최고수인 곽현은 하후명에게 포섭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런 이에게 장을 맡길 수 없는 정호기였기에 다방면으로 고심을 했지만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벌써 보름째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아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
“소장주님, 드디어 소식이 왔습니다!”
부친을 만나고 온 정호기를 향해 왕삼이 흥분된 얼굴로 말했다.
“이리 줘 봐라.”
서둘러 왕삼이 내민 봉투를 받아 든 정호기가 그 안의 서찰을 읽고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군, 그리 멀지 않아. 삼아, 너 말은 탈 줄 아느냐?”
“예? 모르는데요.”
하인인 왕삼은 말을 탈 기회가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탈 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흠, 그럼 마차를 타면 되겠지.”
잠시 고민하던 정호기가 왕삼을 바라보았다.
“하루빨리 향이와 혼례를 올리고 싶지?”
“예?”
갑자기 튀어나온 질문에 왕삼이 되물었다.
“이번 일만 성공시킨다면 당장 혼례를 올려 주겠단 말이다.”
“시켜만 주십시오!”
가슴을 치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왕삼을 정호기가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적어 주는 서찰을 가지고 가서 한 사람을 데리고 오너라. 혹시라도 오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오게끔 만들어야 한다. 알겠느냐? 만일 네가 그 사람을 데리고 온다면 바로 향이와 혼례를 올릴 수 있도록 해 주겠다.”
“어디의 누굽니까?”
엉덩이를 들썩이는 왕삼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다.
“안강현에 있는 화석산이다. 산기슭에 진청운이라는 인물이 살고 있는데, 그를 되도록이면 모레 아침까지 데리고 오는 일이다. 할 수 있겠느냐?”
“하겠습니다!”
안강현은 쉬지 않고 말을 달려도 세 시진이 걸리는 거리였다.
마차로 가면 최소한 다섯 시진은 걸릴 테니 이런저런 변수를 가정한다면, 왕삼은 잠도 자지 않고 왕복해야 가능할 것이었다.
거기다 진청운을 찾고 그를 설득해야 하니 모레까지 데리고 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진청운이 정호기의 서찰과 왕삼의 설득에 넘어간다는 보장도 없었기에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