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묻겠다. 있느냐, 없느냐?”
맹렬히 끄덕이는 고갯짓.
“좋아. 그럼 너 말고도 그들에게 포섭된 이들이 있겠지? 그놈들이 누구냐?”
“읍! 읍! 읍!”
하후명은 말하고 싶었지만 야무지게 재갈을 물려 놨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재갈을 조정하겠다. 필요한 말을 할 정도는 될 거야. 아주 작게. 알지?”
“말… 컥!”
재갈을 손보자 하후명이 말을 하였는데, 그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정호기가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쉿! 작게 말하라고 했잖아. 그리고 미리 말해 두는데, 이미 확보한 명단이 있으니 그것과 많이 다르다면 나머지 발가락과 손가락이 성치 못할 거다. 알겠느냐? 그러고도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네놈의 이를 모조리 뽑아 버리겠다.”
“무, 물론입니다. 모, 모두 말씀드릴 테니, 제발 살려 주십시오.”
“나도 이 나이에 살인자는 되기 싫으니까 제대로 고해 봐.”
하후명의 입에서 처음 나온 이름은 열다섯 명의 것이었고, 후에 나온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그들을 따르는 수준이었다.
“하나가 비는데?”
하후명이 말한 명단이 맞는지는 정호기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하후명도 그것을 알 수 없기에 슬쩍 떠보는 것이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린 그들이 전부입니다! 사실입니다! 믿어 주… 컥!”
“작게 말하라고 했잖아.”
“예, 알겠습니다. 작게 말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목숨만…….”
지금 하후명은 전후좌우를 따질 겨를도 없었고, 현재의 상황을 파악할 여력도 없었다.
오로지 살고 싶다는 욕망과 육체가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좋아, 믿어 주지. 그럼 네놈이 만나는 흑룡문의 문도는 누구냐?”
“그, 그것은 알지 못합니다. 그저 흑룡문에서 나왔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몰라?”
“예, 저를 만날 때는 언제나 복면을 쓰고 있어서 정체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럼 그놈이 흑룡문의 문도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그건…….”
잠시 하후명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정호기가 재갈 쪽으로 손을 뻗었다.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추풍검, 추풍검이 그를 소개시켜 줬기 때문입니다.”
“뭐?”
추풍검 냉백은 흑룡문의 외당주들 가운데 하나로, 톱과 같은 날을 가진 도를 쓰는 인물이었는데, 냉혹하며 잔인한 성격을 가졌다 알려져 있었다.
‘그분이, 아니 추풍검 그 개새끼가 감히!’
얼떨결에 그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냉백은 정호기에게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이었다.
흑룡문의 마중마 연성 계획에 참여하게 된 정호기를 맡아 가르친 것이 냉백이었고, 이십 명에 이르는 냉백의 문하에서 발군의 실력을 내보여 그의 양아들까지 되었으며, 그의 후광을 등에 업고 결국에는 흑룡문의 문주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 씹어 먹을 개새끼가 날 가지고 놀았단 말이지!’
분명 냉백은 정호기의 출신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자신이 정호기의 부모를 죽이는 데 일조한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양아들로 삼아? 감히 너를 아버지라 부르게 만들어? 감히! 감히! 감히!’
흥분에 못 이겨 부르르 떨던 정호기의 몸이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멎었다.
“추풍검을 아는 놈이 또 있나?”
“다른 놈들은 모릅니다. 그저 제가 포섭한 것이지요. 제 계획에 따른다면 장의 요직에 앉히기로 하고 끌어들인 겁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유월 열하루에 계획되었던 일은 그놈이 지시한 것이냐?”
“그걸 어떻게……!”
하후명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설마 그것까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답이 늦다.”
다시 망치와 대나무 못을 들어 올리는 정호기를 보면서 하후명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예예, 그렇습니다. 장주님의 행동이 심상치 않아 제가 보고를 올리자 지시를 하였습니다. 미약으로 포섭되지 않은 이들과 장주님 내외분을 중독되게 하고 일거에 장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제, 제발 목… 컥!”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입을 열었던 하후명의 가슴에 단검이 깊숙이 박혔다.
알고 싶은 것은 모두 알아냈으니 더 이상 하후명은 필요치 않았으니까.
“냉백.”
조용히 추풍검의 이름을 말하는 정호기의 전신에서 살기가 폭풍처럼 뿜어져 나와 연무실을 가득 채웠다.
***
나무 밑에 앉아 있는 정호기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건장한 성인의 시체를 묻는 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젠장!’
흑룡문이 뒤에서 조종하여 부모님을 죽이고 자신을 농락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그의 최대의 적은 흑룡문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정파가 되어 싸운다?’
싸우고 싶지 않아도 싸우게 될 것이다.
흑룡문은 앞으로 이십 년 후에 정파를 상대로 전쟁을 할 것이니까.
그 전란에 휘말려 중원은 피가 내를 이루어 흐르고, 시체가 산처럼 쌓일 것이었다.
정과 마.
단 두 가지만 존재했고, 어느 문파 하나 뒤로 물러나 관망할 수 없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전쟁이지.’
다른 방법도 있기는 있었다.
마중마 연성계획이 아니라고 하여도, 다른 수단으로 자신이 흑룡문에 들어가 그곳을 장악한 후에 냉백을 위시해서 정가장에서 음모를 획책한 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같은 삶을 또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놈들을 내 손으로 죽여야 하는가?’
흑룡문에서 자신의 등을 지키고 목숨을 바쳐 충성한 부하들도 있었다.
호탕하고 자신의 말 한마디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우직했던 이들의 얼굴이 스쳐 갔다.
‘하지만 냉백, 그놈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냉백은 앞으로도 오십여 년을 더 살 것이고, 정호기가 흑룡문주가 되기 위해서는 그가 가진 배경과 힘이 필요했기에 그가 죽는 날까지 그의 그늘에 머물러야만 했다.
아니, 그가 죽은 후에도 필요했다.
그렇기에 흑룡문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놈의 얼굴을 마주하며 지낼 자신이 없었기에.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 외에도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았고, 가족을 떠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결론은 한 가지군.’
몸을 일으킨 정호기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자 그곳에 둥근 보름달이 있었고, 그 속에서 웃고 있는 무학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는 네놈의 장단에 놀아나는 것이냐?’
이런 기회를 준 무학이 고맙기는 했지만, 어쩐지 이 삶은 무학이 짜 놓은 각본대로 움직이는 경극 배우와 같아 찜찜했다.
‘어쨌거나 기회는 기회이니, 절대 놓치지 않겠다!’
다짐을 하고 전각으로 들어가 몸을 씻고 침상에 눕던 정호기의 머릿속에 또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그놈을 이길 놈이 아무도 없으니, 그놈이 죽는 일도 없겠군.’
냉백과 같은 위치의 다른 외당주인 홍여립도 다른 소년들을 가르쳤는데, 그의 밑에 있던 갈천하는 마중마를 키우는 계획에서 정호기만큼이나 두드러지게 실력이 뛰어났던 이였다.
비무를 하던 와중에 정호기에게 죽지 않았다면 끝까지 남아 흑룡문주의 위를 다퉜을지 모를 정도로.
이제 정호기가 흑룡문에 가지 않는다면 그가 최고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호기가 걸었던 길을 똑같이 걸을 수도 있었다.
물론 죽지도 않을 것이고.
‘그놈의 본가가 어디였는지 알아 둘 것을 그랬나?’
당시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고, 죽어 버린 놈이었기에 이후로도 그는 정호기에게 있어 관심 밖의 인물이었다.
‘다시 만날 수도 있겠어.’
* * *
“헉, 헉… 젠장! 쉽지 않군.”
마중마 연성 계획에 따라 수련을 할 때는 복수심이 뒷받침되기도 했지만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놀렸었다.
수련이라는 이름의 탈을 쓴 고문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강제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생각만큼 따라 주지 않는 몸이 불만족스러워서인지 몸을 만드는 것은 진척이 별로 없다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만들어 놓은 척도가 높아서이지, 그의 몸은 남들보다 몇 배 빠르게 단련되고 있는 중이었다.
“올 때가 됐군.”
새벽 수련을 마치고 연무실을 나선 정호기가 의자에 앉아 있자, 늘 그렇듯 향이를 비롯한 시녀들이 들어왔다.
“물은?”
“받아 놨습니다.”
“오늘부터 나 혼자 씻을 테니 옷은 거기 놔두고 나가 봐. 밥도 혼자 먹을 테니 시중들 필요 없어.”
“예? 예, 알겠습니다.”
시녀들이 문을 나선 후, 미리 받아 놓은 물에 몸을 씻고 옷을 입은 정호기가 방으로 돌아오자 음식은 탁자에 놓여 있었고, 왕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 총관님은?”
“아직 소식이 없으십니다.”
하 총관이 실종된 지 오늘로써 사흘째.
아무런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린 그 때문에 여러 가지 말이 많았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뭐라고들 하는데?”
“일부는 대응방의 소행이라고 말하고 있고, 다른 이들은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라고도 하고 있습니다.”
“알았어. 그나저나 그때 그것 좀 더 구해야겠다.”
“예? 미약 말입니까?”
하후명을 제압한 미약은 용정차에 녹아있었던 것이었는데, 그것을 구해 온 것이 바로 왕삼이었다.
“응, 내일까지 구해 와. 그리고 대장간에 가서 이것 좀 만들어 오고.”
정호기가 내민 봉투를 받아 든 왕삼이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소장주님.”
“왜?”
“미약은 어디에…….”
“쉿!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다. 함부로 주둥이 놀리지 마.”
말을 하는 정호기의 눈을 바라보던 왕삼이 흠칫했다.
뭔가 알 수 없는 느낌이 그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던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요새 정호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지금 보여 준 표정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광기와 같은 번들거림이라니…….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왕삼은 정호기에게 두려움을 넘어선 어떤 것을 느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순수하게 솟아오른 감정이었고, 그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이십 대의 건장한 청년이 겨우 열 살에 얼마 전까지 철부지였던 어린아이에게 느낄 법한 감정이 아니었지만, 막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그것은 그를 사로잡았다.
‘마치 목에 날카로운 칼날이 닿아 있는 것 같아.’
정호기는 왕삼을 미련퉁이라고 했지만 그저 사랑에 눈먼 불쌍한 남자일 뿐, 바보는 아니었다.
적당히 술도 즐기고 퇴폐적인 문화도 알고 있는, 어찌 보면 순진한 것하고는 거리가 좀 있는 청년이었기에 개방에서 정보도 가지고 오고 미약도 사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정호기가 말하지 않은 숨은 뜻도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