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4화 (5/137)

4화

“소장주님, 부르셨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하마. 너, 향이 좋아하지?”

“예? 그, 그걸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지. 만약에 말이다, 내가 너와 향이를 맺어 준다면 너는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정호기의 말에 왕삼이 바닥에 오체투지를 했다.

“뭐든지,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제 목숨이라도 드리겠습니다!”

“목숨은 필요 없고, 내가 시키는 일을 아무도 모르게 잘 처리만 하면 된다. 알겠느냐?”

“예!”

“만일 누군가에게 들키거나 불성실하게 임한다면…….”

잠시 말을 끊은 정호기가 왕삼을 바라보자 초조한 듯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향이를 덕칠이에게 주겠다.”

짝을 찾아 미리 혼인을 한 하녀가 아니라면 주인의 뜻에 따라 미래를 결정할 수 있었다.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있으니 감히 거부하지 못하는 것이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그런 망나니 같은 덕칠이 놈에게 향이를 주다니…….”

“그러니 네가 내 명을 잘 완수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여름이 가기 전에 향이와 맺어 주겠다.”

“말씀만 하십시오!”

대답하는 왕삼의 얼굴에선 마치 일기전을 떠나는 장수의 그것과 같이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마을에 개방이 있느냐?”

“예!”

“그럼 가서 이 서찰을 전해 주거라. 이것도 함께 주고, 부족하면 더 말하라 일러라. 단 이 사실을 누구도 몰라야 한다.”

“알겠습니다!”

서찰 하나와 주머니 하나를 받아 든 왕삼이 바람처럼 방을 빠져나갔다.

***

그날 저녁, 왕삼이 전해 준 서찰을 읽으면서 정호기는 생각에 잠겼다.

‘누가 원인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이 년 전부터 관계가 악화되었다?’

정가장과 대응방은 상가와 무가라는 차이로 일견 연관이 없을 것 같지만 대응방도들의 대부분이 상가나 표국 등을 운영하고 있기에 사소한 마찰은 이전부터 있어 왔다.

그러한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 바로 이 년 전이었고, 그때부터 서로를 탓하면서 상대를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때로는 무력 충돌도 있었는데, 아직까지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이것만 보면 단순한 영역 싸움이야. 누가 죽은 것도 아니니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할 정도의 단계도 아니고. 더군다나 무가로 이름을 높인 대응방이, 이후에 우리 정가장에게 속절없이 멸문당한 것도 이상해.’

따지고 보면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흠… 단순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군.’

이어지는 서찰의 내용을 보자 더욱 의심의 골이 깊어졌다.

‘우리와 비슷한 사례가 섬서에서만 두 곳이 있고, 하남에서도 한 곳, 사천에서도 두 곳이 있다. 물론 단순한 세력 다툼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그리고 이런 정보를 개방이 반나절 만에 입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들도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또한 이렇게 자세한 정보를 넘겨준 것은 요구한 이가 나라는 것을 모르고 장에 경고하기 위함일지도 모르겠구나.’

의문을 느끼자 그것은 새로운 의문을 가져왔다.

‘아버지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계실까?’

알고 계실 것 같았다.

자신이 기억하는 부친은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그때 부모님을 비롯해 가신들 대부분이 죽은 사건은 아버지께서 그런 정황들을 파악하고 바로잡으려 하셨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음모를 꾸민 누군가가 위험을 느껴 일을 서두른 것일 수도. 그렇다면 그놈이 대체 누굴까?’

의심이 가는 인물이 있었다.

‘하 총관.’

그때 자신의 목숨을 구했던 인물이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서 장의 실권을 대부분 차지했었고, 흑룡문에 줄을 대어 자신이 흑룡문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던가.

‘휴우… 무학, 네가 알려 주고자 하는 것이 이것이냐? 그 일이 정파의 가증스러운 면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파, 그것도 흑룡문이 배후에서 조종한 일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냐?’

중원 전역에 걸쳐 있던 조직적인 정보망.

아마도 그것은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닐 수도 있겠지. 그저 내가 너무 비약하여 상상한 것일 수도.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추측은 막힘이 없었고, 하나의 물꼬를 트자 그것은 끊어짐 없이 흘러갔다.

“으음…….”

그를 지탱하고 있던 단 하나의 진실, 그것은 정파는 가증스러운 탈을 쓴 집단이고 부모의 원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좋아, 확인할 방법은 하나지.’

당사자를 통해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아니라면 실수한 것이고.

물론 그 실수는 하 총관의 죽음으로 이어지겠지만, 정호기는 혈신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이들의 목숨을 취한 인물이었던 만큼 그런 것을 신경 쓰며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

“하 총관님.”

고개를 빠끔 내밀고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정호기를 보면서 하후명이 입맛을 다셨다.

‘계획만 성공했더라면 이 녀석을 꼭두각시로 내세운 다음 장을 장악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러십니까, 소장주님.”

정호기를 따라 건물 뒤편의 으슥한 곳으로 향한 하후명이 묻자 정호기가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저기, 의논드릴 일이 있는데요.”

몸을 배배 꼬면서 말을 하는 정호기의 모습에 하후명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열 살이나 먹은 녀석이 이 모양이라니. 이 녀석이 장을 이어받으면 언젠가는 장이 무너질 거다.’

그런 사태를 막으려면 어서 빨리 장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있잖아요, 그러니까… 에…….”

뜸을 들이며 말을 하지 않는 정호기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다.

만일 그런 일을 정운룡이나 백난영이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물론 겨우 그 일로 장에서 쫓아내지는 않겠지만 눈 밖에 날 수도 있었고, 한직으로 물러날 수도 있었다.

“저…….”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니요, 잠깐만요! 사실은 요새 향이가…….”

“향이요?”

“예, 향이가 풍기는 냄새가 무척이나 좋고, 또… 막 만지고 싶어……요.”

부끄러운지 정호기의 얼굴은 완전히 시뻘겋게 변했다.

“허허허! 그러시군요.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랍니다. 소장주님이 남자가 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이지요.”

“그런가요? 남자가 되어 간다고요?”

“네.”

“그래서 말인데요, 하 총관님께 부탁드릴 것도 있고 해서, 이따가 저녁에 뵙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에 찾아뵙도록 하지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몰래 만나고 싶어요.”

“몰래 말입니까?”

“예, 아무도 모르게 찾아와 주실 수 있나요?”

말을 하면서 정호기가 혀로 연방 입술을 핥았는데, 그 표정이 못된 계획을 꾸미고 있는 난봉꾼의 그것과 같았기에 하후명은 어이가 없었다.

‘허어… 이놈이 이런 놈이었다니. 애당초 싹이 글러 먹은 놈인 줄은 알았다만, 이렇게까지 썩었을 줄이야.’

어이가 없고 한심스러웠지만 나중에 있을 계획에서 정호기를 이용하려면 그의 신임을 얻어 두는 것이 좋았다.

“알겠습니다. 축시에 찾아뵙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절대 몰라야 돼요.”

“물론입니다.”

비밀을 쥐고 있다면 정호기를 손안에 넣고 흔들기 편할 것이었고, 비밀은 아는 자가 적어야만 그 효과가 큰 법이었기에 다른 누구에게 말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

“소장주님.”

낮은 목소리에 정호기가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오세요. 하인들은 모두 내보냈으니, 큰 소리만 내지 않는다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 연무실에서 말했으면 하는데요.”

“그렇게 하십시오.”

정호기의 연무실에는 어느새 가져다 놨는지 탁자와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자, 일단 차라도 한 잔 드세요. 솜씨가 부족해 제대로 맛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용정이니 드실 만하실 거예요.”

“허허, 소장주님께 직접 용정차를 대접받다니, 이거 영광입니다.”

“영광은요, 무슨…….”

쪼르르륵.

찻잔에 차가 담기고 은은한 향을 음미한 하후명이 차를 마실 때까지 정호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만든 차에 대해서 평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기에 하후명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오히려 차를 입속에 머금고 그 맛에 대해서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흠…… 용정으로 겨우 이따위 맛을 내다니. 저잣거리의 차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아니, 도리어 그보다 못한 것 같구나. 쯧쯧! 이래서 보검도 주인을 잘못 만나면 주방의 식칼보다 못한 처지가 된다는 말이 생겼으리라. 그래도 후한 점수를 줘야겠지?’

찻잔을 내려놓은 하후명이 막 차에 대한 평가를 말하려고 할 때,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이게… 무슨……?”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옆으로 풀썩 쓰러지는 하후명을 바라보던 정호기가 그를 의자에 묶더니, 주섬주섬 자신의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이놈이 무공을 익히고 있었지? 그럼 좀 제대로 손을 봐야겠군.”

하후명의 입에 재갈을 물린 정호기가 가장 먼저 손에 쥔 것은 잘 갈린 단검이었다.

“여기하고, 여기, 그리고 여기면 될까? 아니야, 이곳도 좀 잘라 놔야겠군.”

정호기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하후명의 몸이 퍼덕거렸고, 그의 옷은 피로 물들어 갔다.

그러나 단검이 몸을 파고든 것에 비해서는 피가 많이 흘러내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인간의 몸을 잘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기술이었다.

“으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린 하후명이 신음을 흘렸다.

“으읍… 크으…….”

“정신이 드느냐? 아아, 그렇게 발버둥 치면 고통만 커질 뿐이야. 이미 손발의 힘줄을 모두 끊어 놓았거든. 혹시나 몰라 어깨 쪽도 손을 봐 뒀지.”

한 손에 망치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정호기를 본 하후명은 그의 말을 듣고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맞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아니면 고개를 저어라. 네놈 뒤에 흑룡문이 있느냐?”

하후명은 흑룡문이란 말에 몸과 마음이 굳었고, 갑자기 변해 버린 정호기의 태도에 혼란을 느끼며 어떠한 답도 하지 못했다.

“다시 묻겠다. 있느냐, 없느냐?”

여전히 몸이 주는 고통과 정신적인 혼란으로 멍하니 있는 하후명을 향해 정호기가 다가섰는데, 한 손엔 망치를, 그리고 다른 한 손엔 대나무로 만든 못을 들고 있었다.

“좋게 말해서 듣지 않으면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모르나 보지?”

퍽!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망치를 내리쳤고, 대나무 못은 하후명의 엄지발톱을 뚫고 들어갔다.

“커억!”

이미 충분한 고통이 전해졌을 것이지만 정호기는 멈추지 않았다.

퍽! 퍽! 퍽! 퍽!

하후명의 오른쪽 발가락 전부에 대나무 못이 박혔고, 그제야 정호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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