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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3화 (4/137)

3화

정호기의 일과는 단순했다.

부모님과 같이 식사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글공부를 하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정호기가 드디어 결심을 한 것은 열흘이 지나간 후였다.

‘이래선 안 되겠어.’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글공부가 아닌 무공을 수련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필요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자금이었다.

비록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과 다른 현실이 펼쳐졌지만 대응방을 그대로 놔두기에는 껄끄러웠고, 이 행복을 망칠 위험이 있는 것이라면 결코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계획도 가장 큰 문제가 있었으니, 만약 자신이 백이십 년을 산 꿈을 꿨다면 그 꿈에서 배웠던 무공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무맹랑한 것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어서 무공을 익힐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

“글공부를 그만두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엄마, 제가 그동안 사실 알고 있는 것도 모른 척하고 있었거든요.”

“응? 뭘?”

“에… 그러니까, 이거 하고요, 또 이것도, 그리고 이것도 이미 모두 알고 있어요.”

정호기가 하나하나 보여 주는 책들은 그가 아직 배우지 않은 것들이었고, 백난영도 가끔 꺼내 보면서 그 뜻들을 헤아리는 것도 끼어 있었다.

“정말 이것들을 모두 알고 있단 말이냐?”

“예.”

“그럼 왜 그동안 아무 말도 없었니?”

“그러니까… 엄마, 아빠가 신동이라고 소문낼 것 같아서요. 전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말을 하면서 얼굴이 벌게졌는데,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럼 엄마가 하나 물어봐도 되겠지?”

“네.”

지금 앞에 놓인 책들은 더 높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무공이 아닌 다른 곳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읽고 또 읽었던 것들이었고, 이것 말고도 그가 읽은 책들은 수없이 많았다.

“이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뭐라 생각하느냐?”

백난영은 책의 구절을 묻지 않고 책 속에 담긴 뜻을 물었는데, 그것은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자식을 믿지 않는다는 뜻으로 비춰질까 하는 것을 저어함이었고, 만일 전부 읽었다 하여도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면 읽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논어는 공자께서 품으신 이상이 깃들어 있으며, 그 이상은 의(義)와 덕(德)이 중심인 도덕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 민생을 위한 거라고 믿으셨어요. 하지만 저는 거기에 하나가 더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 뭐가 빠졌을까?”

“힘이요.”

“힘?”

“네. 의와 덕이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지키고 유지시키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을 혼내 줘야 하잖아요.”

‘미치겠군.’

정호기에게 있어 가장 곤란한 순간은 바로 부모와 대화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 같은 말투를 써야 하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하는 자체가 낯간지러운 것도 있었고.

‘이것도 조금씩 고쳐 나가야지.’

정호기가 이런 생각을 할 때 백난영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아들이 너무도 귀여웠기 때문이다.

‘어디서 주워들은 모양이구나. 어디, 그럼 다른 것도 물어볼까?’

이후로 사서오경을 모두 물어보았지만 정호기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엄마, 제 말이 맞지요?”

기대를 품고 바라보는 정호기의 눈을 보면서 백난영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것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글공부를 하지 않으면 뭘 하고 싶은데?”

“제 시간을 갖고 싶어요.”

“네 시간?”

되물으면서 백난영은 어이가 없었다.

이제 겨우 열 살인 정호기가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니.

“네. 음… 꼭 하루 종일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고요, 오전에는 엄마하고 같이 글공부를 하고 오후에만 저 혼자 있고 싶어요.”

“뭘 할 건데?”

“생각 중이에요.”

말을 하면서 방긋 웃는 정호기를 보면서 백난영도 따라 미소 지었다.

“엄마하고 같이 있고 싶어?”

그 질문에 볼이 벌게지면서 정호기가 고개를 숙이자 백난영이 그를 꼭 끌어안았다.

“어이구, 우리 아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런데 아빠가 질투하지 않을까?”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정호기였다.

‘주책이군.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모르겠네.’

***

‘느낌이 있다!’

정호기의 침실에는 연무실이 딸려 있었지만, 그것은 전각을 지으면서 으레 만들어 둔 것일 뿐 지금까지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곳에 쌓여 있던 먼지들을 털어 내고 운공을 시작한 지 오늘로 닷새째.

드디어 잠잠하던 단전에서 신호가 왔는데, 얼마나 기쁘던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잠시 운공을 쉬어야만 했다.

이것으로 정호기는 자신이 단지 백이십 년에 걸친 꿈을 꾼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았으며, 어떤 이유로 인해 다시 생을 살게 된 것이라 확신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도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무학의 마지막 말과 알 수 없는 빛이 그것이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어서 단전을 확실하게 자리 잡게 만들어야 해.’

그가 수련하는 것은 잠룡승천공으로 흑룡문주에게만 전해지는 비전이었데, 그를 제외하고는 극성으로 익힌 적이 없는 심법이었으며, 천하를 오시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일각, 이각… 시간이 흐를수록 정호기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숨은 느려졌다.

“후우…….”

긴 호흡과 함께 눈을 뜬 것은 운공에 든 지 한 시진이 지난 후였다.

“진기와 마음은 십 리인데, 몸이 한 걸음도 못 따라 주는구나.”

모르는 사람들은 운공만 해도 고수가 된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어림도 없는 말이었다.

몸이 바탕이고 그것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내력이었기에, 몸을 단련하지 않고 운기만 하는 것은 깨지기 쉬운 독에 무겁디무거운 수은을 들이붓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 정호기의 상태가 그러한 것이다.

“일단 몸을 만들고 난 연후에 본격적으로 내공을 수련해야겠다. 자, 그럼 남은 문제는 광랑십삼검인데…….”

내공은 어찌 숨긴다고 해도 검술은 쓰면 표가 나기 마련이니, 익힌다고 해도 막상 필요한 순간이 와도 쓸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기로 흑룡문은 중원 전체에 걸쳐 비밀 지부가 있었고, 그들이 전해 주는 정보에 의해서 정파를 압도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그들의 눈에 정호기 자신이 흑룡문주의 비전검법인 광랑십삼검을 펼치는 모습을 들켰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었다.

비전인 만큼 알아보는 이들이 적을 것이지만,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만 죽는 게 아니라 가문 자체가 위험하지.’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한 것이었고, 그 위력도 그가 배웠던 어떤 무공보다 뛰어났었기에 광랑십삼검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거 말고 또 뭐가 있었더라?’

정파를 무너뜨리면서 얻은 무공들도 많았고, 곁다리로 끼어들었던 문파들을 쓸어버리면서 얻은 무공들도 많았다.

하지만 광랑십삼검에 필적하는 무공이 없었기에 관심을 두지 않다가 사서오경을 읽은 것과 마찬가지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파고들었던 무공들이 더러 있었기에 열심히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절영도(折影刀)가 광랑십삼검과 느낌이 비슷하고 위력도 쓸 만했지.’

절영도는 소림을 불태우던 날 입수한 도법이었는데, 그것을 익히는 도중에 주화입마에 걸려 완전히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주화입마는 절영도 때문이 아니라 잠룡승천공을 무리하게 운기하는 바람에 걸린 것이니 절영도와는 무관했다.

‘좋아, 그것으로 하자. 그러자면 일단 도를 구해야겠지? 손잡이는 내 팔 길이면 되겠고, 도신은 이 척(尺)오 촌(寸)이면 되겠구나.’

그 뒤로 계속 절영도와 잠룡승천공을 생각하던 정호기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면서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그래, 알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뭔가를 깨달아서 기쁨에 겨워 외치는 음성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를 향해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젠장! 무학, 너는 죽어서도 나를 고뇌에 빠지게 만드는구나!”

정호기가 화를 내는 대상은 무학이었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학이 부린 조화로 인해 이루어졌다면 그가 말한 비틀어진 운명이란 것도 맞는다는 말이 되었다.

그것을 잊기 위해 무공에 관해서 생각을 거듭하면 할수록 무학이 남긴 말이 계속 솟구쳐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운명이 비틀어졌다고 했는데, 벌써 내 운명은 그때와 다르게 흐르고 있다. 그럼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다는 소리야?’

답답했지만 단서는 있었다.

비틀어진 운명.

정호기의 삶이 바뀐 것은 부모님의 죽음부터였으니, 아마도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비틀어지게 만든 계기이리라.

이미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사건이 벌어지게 만든 원인이 있을 것이니, 그것을 파악하면 실마리가 잡힐 것이었다.

‘부모님의 죽음은 대응방이 쳐들어오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대응방에 대응하고자 부모님과 가신들 모두가 모여 회의를 했고, 그 회의장에 복면인들이 난입하여 부모님과 대부분의 가신들을 죽였었지. 그 복면인들이 대응방의 무사들로 밝혀져 곧바로 장의 모든 무사가 출동해 대응방을 쓸어버렸고.’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그래, 이상한 점은 있었어. 장을 기습할 정도로 준비를 한 대응방이 너무도 쉽게 무너진 것.’

의문을 느끼긴 했지만, 깊게 파고들진 않았었다.

그런 의문을 느꼈을 때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상태였고, 당시에는 부모님을 죽인 대응방보다 가증스러운 정파에 대한 적대감이 더 컸기에 오로지 정파의 씨를 말리는 것에만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은 만큼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대응방에 대해서는 어차피 알아볼 생각이었으니 겸사겸사해서 정보를 수집하면 그만이었다.

‘이 근처에 거지새끼들이 있었던가?’

우습게도 사파들 대부분이 정보를 얻는 것은 정파에 속한 개방이었다.

그만큼 정확하고 아주 중요한 사안이 아니면 정사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시각에서 바라본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굴 보내지?’

직접 나가서 알아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지만, 아직은 그 방법을 쓸 수 없었다.

조금 더 변화된 자신을 부모님께 보여 주고 활동 영역을 넓힌 후에야 가능하리라.

‘왕삼 녀석이 빨빨거리고 잘 싸돌아다니니, 그놈을 보내면 되겠군.’

정호기가 있는 별원에서 잡일을 하는 왕삼은 향이에게 마음이 있으면서도 고백을 못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는 한심한 놈이었다.

‘덕칠이 놈에게 빼앗기고 죽는다고 발광하던 미련퉁이지만 덕분에 부려 먹기는 편한 놈이지.’

***

“삼이 좀 불러오너라.”

“예? 아, 예.”

느닷없는 정호기의 말투에 박향이 조금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지만,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나갔다.

‘좋아, 이렇게 조금씩 바꿔 나가면 되는 거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춰 바꾸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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