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아가, 괜찮은 거지? 응? 괜찮은 거지?”
“네.”
입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피 맛을 느끼며 정호기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이 백난영의 사랑이 남긴 흔적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아니다. 네가 왜 죄송하단 말이냐? 네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단다. 알았지? 이건 네가 잘못한 것이 아니야. 응?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혹시라도 정호기가 자신을 자책할 것을 염려한 백난영이 애써 미소 지으며 그를 위로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했다.
비록 꿈일망정 지켜 주지 못하는 것이 한없이 죄송했다.
‘천하를 오시할 무공이 있으면 무엇 할 것인가? 사랑하는 분들도 구하지 못하는 것을…….’
“아니야, 아가. 엄마는 진짜 괜찮아. 응? 울지 말거라. 엄마는 아무렇지 않아. 응?”
두 모자가 서로를 끌어안고 울고 있을 때 드디어 황 의원이 도착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는지 서둘러 백난영의 상처를 치료하고는 말없이 물러갔고, 그사이 하녀들이 물과 옷을 가져와 정호기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저어… 장주님.”
“오늘 회의는 취소하겠네.”
“예?”
뒤늦게 찾아온 하 총관이 놀란 표정을 지었는데, 오늘 열기로 했던 회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대응방이 당장 쳐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의중을 더 살피자는 의견도 있었던 만큼 차후에 다시 회의를 열면 될 일이네. 그때까지 대응방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피도록 하고.”
“하오나…….”
“그만! 그리 알고 가신들을 모두 내보내도록 하게. 멀리서 온 이들도 있겠지만 나중에 다시 연락을 줄 것이니 오늘은 이만 가라고 일러 주게.”
혹시라도 정호기의 상태를 가신들이 알지 못하도록 그들을 내보내려는 심산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하 총관이 나가고 난 후에 백난영과 정호기가 누워 있는 침상 곁으로 다가온 정운룡이 정호기의 얼굴을 쓰다듬었는데, 거친 손가락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정호기는 부친의 정을 느낄 수 있었기에 그 느낌이 무척이나 좋았다.
“아빠, 같이 자요.”
마지막 어리광이었다.
“그럴까?”
오른쪽에 누운 정운룡이 머리를 쓰다듬었고, 왼쪽에 누운 백난영이 정호기의 가슴을 토닥였다.
‘이것도 좋구나.’
눈을 감은 정호기는 부모가 전해 주는 사랑이 담뿍 담긴 손길을 느끼며 이대로 꿈이 깬다고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이 가장 좋은 결말이었다.
부모의 사랑 속에서, 그들의 죽음을 보지 않고 깰 수 있다면 분명 이 꿈은 축복받은 꿈이리라.
***
어두운 석실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일이 틀어졌습니다.”
“으음… 눈치를 챘단 말이냐?”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가신들을 모두 내보내지 않았을 테니까요.”
“어떻게 된 일이냐?”
“정호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신들에게 알리기 싫었기에 해가 떨어졌는데도 가신들을 모두 내보낸 것 같습니다.”
“그 아이에게?”
“예.”
“자식이라면 끔찍하게 여기니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럼 일단 계획을 뒤로 물린다. 섣불리 계획을 실행하다 흔적을 남기면 안 되니.”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중년인, 하 총관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
“말해 보거라.”
“그냥 결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포섭하지 못한 가신들이 문제가 되겠지만,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암습하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 될 말이다. 이번 일은 비밀이 생명이니까. 어떻게 해서든 대응방의 소행으로 보여야 하고, 그것을 빌미로 순식간에 대응방을 정리해서 아무런 증거도 남지 않게 해야 한다. 안 그래도 요즘 정파에서 뭔가 냄새를 맡은 것 같으니 정가장은 각별히 더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 정가 놈의 행보가 석연찮습니다. 혹시라도 그가 어떤 의문을 품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신경 쓰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러면 언제쯤 거사를 벌일까요?”
“차후에 다시 알려 주겠다. 너는 그때까지 정운룡이 눈치 못 채도록 지금처럼 대응방과 정가장을 이간질하는 것에 노력하도록 해라.”
“예.”
대답을 마친 하 총관이 석실에서 빠져나가자 남은 복면인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정가장을 마지막으로 일을 정리하려 했건만 일이 이렇게 되다니……. 그렇다고 다시 도모하려 해도 정파에 꼬투리를 잡힐 수 있으니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엔 시기가 좋지 않다. 그리고 하가 놈은 욕심이 과하니 우리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면 어떻게든 혼자서라도 일을 벌일 놈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흑룡문이 벌였던 일들이 노출될 수도 있어.’
혼자 남은 복면인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
“잘 잤니?”
눈을 뜨자 보이는 부모님의 얼굴에 정호기는 당혹감과 함께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반갑기 그지없기는 했지만,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뭐지? 설마 계속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물론 꿈속에서 잠을 자고 다시 깬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넘기기에는 지나친 사실감도 그렇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어디가 안 좋은 것이냐? 그렇다면 말을 하여라.”
“네? 아, 아니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황 의원님을 모셔 오라 했으니 일단 진맥을 받아 보자꾸나.”
자신의 손을 꼭 쥐고 있는 백난영의 온기를 느끼면서 정호기는 눈을 감았다.
‘잠시 생각 좀 해 보자. 분명 이건 꿈이라고 여겼는데, 꿈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 사실적이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백이십 년을 산 것이 꿈은 아닐까? 내 기억대로라면 어제 대응방이 쳐들어와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야 했는데 멀쩡하게 살아 계신 것도 알고 있던 것과 다르고.’
말도 안 되는 얘기였지만, 그게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았다.
백이십 년을 살고 다시 시간을 거슬러 와 어린아이로 산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미치겠군. 어느 쪽이 진실이란 말인가?’
눈을 감고 있으니 자신은 백이십 살 먹은, 죽을 때를 기다리는 노인이 된 것 같았다.
“어, 엄마?”
용기를 내어 눈을 감고 백난영을 불러 보았다.
사실은 백이십 살 먹은 노인이고 주위에는 자식들과 제자들이 유언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해 보고 싶었다.
“그래, 나 여기 있단다.”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와 귀를 파고드는 다정한 음성.
갑자기 정호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엄마, 아빠, 분명히 계시는 거지요?”
“당연하지.”
눈을 뜬 정호기가 백난영과 정운룡을 끌어안고는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부르고 또 불렀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백이십 년을 산 꿈을 꿨으면 어떻고, 백이십 년을 살고 다시 시간을 거슬러 왔으면 어떻단 말인가? 이것이 현실이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을.’
자신을 사랑해 준 부모님을 다시 만난 것, 그것 하나로 모든 것을 뒤로 물릴 수 있는 정호기였다.
***
“단지 악몽을 꿨다니. 허허! 그래, 어떤 악몽이었기에 그리한 것이냐?”
웃는 정운룡이나 백난영의 얼굴에서 정호기를 탓하는 감정은 없었으며 심지어 백난영은 자신의 손이 찢어질 정도로 다친 것에 대해서도 벌써 잊은 듯 보였는데, 정호기의 손을 멀쩡한 손으로 잡고 다친 손은 옷소매로 감추고 보이지 않는 이유는, 정호기가 그것으로 인해 혹시 죄책감이라도 느낄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엄마, 아빠가 죽는 꿈을 꿨어요.”
정호기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굳었다가 이내 풀어졌다.
굳은 것도 정호기를 걱정하는 마음에 그리된 것이었다.
“그랬구나. 하지만 꿈일 뿐이잖니? 우린 여기 있단다, 네 옆에. 그리고 언제나 네 곁에서 있을 거란다. 알았지?”
“네.”
대답을 한 정호기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오늘 엄마, 아빠하고 같이 지내면 안 될까요?”
“안 되긴, 당연히 되지.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 같이 지내자꾸나. 말 나온 김에 나들이나 갈까? 햇볕도 좋으니 말이다.”
“그래요, 상공.”
그날 정호기는 부모와 같이 지냈고, 잠도 같이 잤으며, 다음 날도 마찬가지인 하루를 보냈다.
***
‘현실이야.’
사흘을 부모와 같이 지낸 후에야 자신의 침실에서 눈을 뜬 정호기는 홀로 맞는 아침 햇살을 느끼며 지금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마음속에서 완전히 두려움을 몰아낸 것은 아니었다.
언제 갑자기 이 모든 것이 한순간의 꿈으로 끝나고, 자신은 침상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한심한 늙은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아무래도 좋다. 이게 꿈이든 아니든 아무래도 좋다. 난 살아 있고, 그것을 느끼고 있으니까.’
똑똑.
“향입니다.”
“들어와.”
“예.”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은 박향을 비롯한 세 명의 하녀였다.
그녀들의 아침 일과가 정호기를 씻기고 옷을 입힌 다음 방을 정돈하는 것이었으니, 열 살인 정호기의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흠흠, 껄끄럽구먼.’
하녀들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느껴지는 묘한 감정에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당장 바꿀 수는 없었다.
‘조금씩, 천천히 바꾸면 되지.’
이전과 같은 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현재 정신 상태로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나태하고 미련하게 살았는지…….’
철부지.
딱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 일 전까지의 정호기였다.
‘급히 바꾸다가는 부모님이 오히려 더 걱정하실 것이니, 앞으로도 당분간은 이렇게 지내야겠지?’
철이 드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급작스럽게 변해 버리면 그날의 일도 있으니 좋은 쪽보다는 나쁜 쪽으로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자, 그럼 오늘의 일과를 시작해 볼까?’
마음 같아서는 글공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부모님과 계속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자신과 지내면서 부모님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살포시 내려앉은 것을 보고는 그럴 수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미처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표정의 변화였고 감정이 새 나온 것이었으나 지금의 정호기는 알아볼 수 있었기에, 단 나흘 만에 자신의 침실이 있는 전각으로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