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1화 (2/137)

1화

“으음…….”

“어머, 깼니?”

갑자기 여자 목소리가 들리자 정호기가 눈을 부릅떴다.

그냥 여자 목소리라면 시녀나 딸들 중의 누구라고 생각을 했겠지만… 반말이었기 때문이다!

반말을 들어 본 적이 언제인가?

혈신으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명사가 된 이후로는 없었다.

그런데 감히 누가 있어 그에게 반말을 한단 말인가?

그렇게 눈을 뜬 정호기에게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어이구, 우리 호기, 악몽이라도 꿨니?”

여인이 물었지만 정호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

한순간도 잊지 못한 그리운 어머니의 얼굴이었기에 정호기가 느끼는 감동은 남달랐다.

언제나 그의 기억 속에 있는 부모님은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특히나 어머니는 그 모습이 더욱 처참하였었다.

지금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할 수도 있었겠지만, 마지막의 모습이 너무 강렬하게 남아서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코 깨고 싶지 않은 꿈이구나.’

꿈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고 해도 정호기는 이 꿈이 영원했으면 했고, 그런 생각을 하는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어머, 왜 그러니? 그렇게 무서운 꿈이었니?”

중년의 단아하고 아름다운 여인, 정호기의 어머니인 백난영이 걱정스러운 물음을 던지자 옆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기아가 악몽을 꿨나 봐요.”

“사내 녀석이 겨우 악몽을 꿨다고 눈물을 보이다니. 당신이 너무 오냐오냐한 탓이오.”

말은 무정한 듯했지만 그 속에는 책망보다는 걱정하는 마음이 더욱 깃들어 있었다.

정호기의 아버지인 정운룡은 백난영 못지않게 자식인 정호기를 챙기는 팔불출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으니까.

정호기는 목이 멨다.

‘아버지…….’

덥수룩한 턱수염과 콧수염이 만나며 조금은 거칠게 보이는 얼굴은, 그 자신에겐 한없이 다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결국 고였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여 년이 훌쩍 지난 세월이었지만 그리움은 더욱 커져만 갔었다.

부모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가증스러운 정파를 응징하기 위해 살아온 세월에서 정운룡과 백난영은 그의 전부였다.

“이 녀석, 그만 어리광 부리고 어서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가정도 꾸릴 나이에 아직도 어미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짐짓 노한 듯한 목소리에는 질투도 섞여 있었다.

벌써 열 살인 정호기가 백난영의 품에 안겨 잠을 자는 것은 누가 봐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정호기의 어리광은 심했다.

물론 그것을 받아 주는 백난영과 이해해 주는 정운룡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고, 타인의 시선이 미치는 곳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정운룡이 호통을 쳤으나 정호기는 오히려 백난영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백이십 살이나 먹고 할 짓은 아니었으나 백난영은 자신의 어머니이고, 꿈이라 생각하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호기야, 그만 일어나겠니? 이 어미도 다리가 좀 아프구나.”

만일 현실이었다면 이 말에 벌떡 일어나 품을 벗어났겠지만, 지금은 그러기 싫었다.

자신의 몸무게가 있으니 어머니의 다리가 저릴 것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것은 꿈일 뿐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었고, 자칫 꿈이 깰 것을 염려한 정호기는 꼼짝도 하기 싫었다.

“어허! 어서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정운룡의 불호령도 정호기를 움직이게 하지 못했다.

절대 자신을 때리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기도 했고, 설사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움직이기 싫은 것이 정호기의 속마음이었다.

호랑이의 기운을 가지라는 뜻으로 호기(虎氣)라 이름 지었지만, 어린 시절의 정호기는 이름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었다.

“호기야, 만나야 할 분들이 있단다. 그러니 이만 내려가렴.”

일 각에 걸쳐서 두 사람이 달래고 호통을 쳤지만 정호기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급기야 정운룡이 물리력을 행사했다.

“윽!”

신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팠다.

귀밑머리를 잡고 당기는 고통에는 백이십 살의 나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정호기가 일어났지만 결코 고통을 참지 못해서가 아니었고, 혹시나 이 아픔으로 인해서 꿈이 깰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머리 가죽이 뜯겨져 나가는 한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녀석! 봐라, 너 때문에 엄마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잖느냐?”

의자에 앉은 채 저린 다리를 주무르는 백난영을 가리키며 정운룡이 혼을 냈으나, 정호기는 그것에 관심이 없었다.

‘꿈이라서 그런가?’

아버지가 자신에게 폭력을 썼다는 것이 신경 쓰인 정호기였다.

“어서 네 방으로 가도록 해라. 오늘은 중요한 볼일이 있으니 재워 주지 못하겠구나.”

정호기를 재워 주는 것은 언제나 부모님의 몫이었다.

그를 시중드는 시녀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녀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방을 정리하고 씻기고 옷을 입혀 주는 것밖에는 없었다.

“저, 저도 같이 가… 갈래요.”

처음 앳된 목소리에 멈칫했고, ‘가고 싶습니다!’라고 말을 하려다 다시 어린애의 말투로 바꿨다.

어리광.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 어처구니가 없었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벌게졌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어허! 오늘은 그럴 수 없다는데도!”

완강한 부친의 태도에 주눅들만도 하건만 정호기는 물러섬이 없었다.

“저도 같이 갈래요!”

정운룡의 허리를 붙들고 말을 하는 정호기의 온몸으로 소름이 돋았다.

‘주책이군. 늙으면 다시 어린애가 된다지만, 설마 내가 이런 짓까지 할 줄이야.’

꿈이라고 해도 민망한 것은 민망한 것이다.

“어허, 이 녀석이. 오늘따라 왜 이러는지…….”

정운룡이 화를 내는 것도 지쳤는지 너털웃음을 흘렸다.

“알았다. 그럼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았지?”

“네. 근데 무슨 일이에요?”

한 번 하는 것이 어렵지 두 번, 세 번 하는 것은 쉬웠다.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니 한쪽에서 엄마랑 가만히 있도록 하여라.”

“네.”

어쨌거나 허락을 얻었다는 생각에 정호기가 백난영의 손을 붙들고 둘을 따라가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응? 가만,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던 정호기는 자신이 처음 나눴던 대화와 지금의 상황을 떠올리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왜 그러니?”

굳은 얼굴로 멈춰 선 정호기를 향해 백난영이 묻자 앞서 가던 정운룡도 문을 열다 말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대화! 나보고 먼저 자라던 그 대화! 내가 그걸 잊다니!’

처음으로 자신을 혼자 자게 했던 날이었고, 참화가 장을 덮친 그날 나눴던 대화였으며, 그것이 부모님과 나눴던 마지막 대화였다.

그리고 그렇게 헤어져 잠자리에 들었는데, 자는 도중 하 총관이 자신을 깨워 무작정 그와 함께 도주를 했었다.

다음 날 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부모님과 가신들 몇은 죽음을 당한 후였으며, 그것이 대응방의 소행으로 밝혀졌었다.

“엄마, 오늘이 유월 열하루인가요?”

“응? 응. 맞는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니?”

확인까지 마쳤다.

‘젠장! 어쩐지 나한테 이런 복이 있더라니…….’

이런 꿈이라면 차라리 꾸지 않는 편이 더 나았으리라.

‘뭐, 이제라도 깨면 되지.’

손으로 볼을 꼬집었지만 아픔만 느껴질 뿐, 꿈은 깨지 않았다.

‘좀 약한가?’

아까 정운룡이 귀밑머리를 당긴 아픔보다 약하긴 했다.

‘좀 더 강하게!’

“어머어머! 무슨 짓이니!”

볼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꼬집었건만 역시나 꿈은 깨지 않았다.

그 탓에 백난영이 기겁을 하고 정운룡도 놀라서 정호기의 팔을 붙잡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지금 정호기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 깨지 않는 거야! 꼭 내게 부모님의 죽음을 보여 줘야만 하겠냐!’

지금처럼 너무도 사실적인 꿈에서 부모님의 죽음을 또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다.

‘제발, 제발, 이제 좀 깨잔 말이다!’

“우아아악!”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질렀지만 그것뿐이었다.

“왜! 왜! 왜! 왜!”

갑자기 미친놈처럼 변해 버린 정호기의 행동에 백난영과 정운룡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정운룡이 정호기의 팔을 붙들고 소리를 지르자 밖에서 대답이 들렸다.

“부르셨습니까?”

“가서 황 의원을 모시고 오너라! 어서!”

“예.”

수하가 황 의원을 데리러 간 사이에도 정호기는 미친 듯이 날뛰며 제 몸을 상처 입혔고, 그런 그를 말리느라 백난영과 정운룡도 같이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몸은 돌보지 않고 오로지 정호기를 말리는 것에만 온통 집중했다.

나중에는 정호기가 혀를 깨물려고 하는 것을 백난영이 자신의 손을 집어넣어 막느라 손등이 찢어져 피가 흘렀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아가, 아가! 정신 차려라! 응? 아가, 제발!”

눈물범벅이 된 백난영은 연방(連方) 정호기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고, 정운룡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발 호기야, 제발!”

결국 두 남녀의 통곡 소리를 들으면서 정호기의 발작이 멈췄는데, 그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정호기의 가슴도 찢어졌기 때문이다.

‘어째서… 어째서…….’

깨지 않는 이 꿈이 저주스러웠다.

차라리 평소와 같이 흐릿한 꿈이었다면 이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으리라.

깨고 나서도 기억하기 힘든 꿈이었다면 마음이 아프지 않으리라.

너무도 선명하고 사실적인 꿈에서 부모님의 죽음을 또 겪어야만 한다는 현실이 그에겐 저주였다.

백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도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울 만큼 부모님은 그에게 지극 정성이었고, 그렇기에 복수를 위해 그 오랜 세월과 고통을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에겐 지금 이 꿈이, 또다시 겪게 될 아픔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크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아가, 괜찮아. 괜찮을 거야. 이 어미가 지켜 주마. 아가, 아가…….”

피가 흘러내리는데도 백난영은 정호기의 입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혹시나 또다시 정호기가 혀를 깨물려고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정호기의 등을 감싸고 그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고 있었다.

‘가슴이 아프구나.’

어머니의 손길을 느끼며 따뜻함을 가져야 하건만, 오히려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곧 닥쳐올 이별의 고통을 더욱 크게 할 것이란 것을 알고 있는 정호기였기에 가슴이 아팠다.

슬픈 눈으로 자신의 팔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정운룡을 바라보았다.

“괜찮은 거냐? 응?”

이미 눈을 통해 정호기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운룡은 몇 번이고 되물었다.

그런 그를 향해서 정호기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정운룡이 팔을 놓아주었다.

“여보, 이 손 좀…….”

정운룡이 정호기의 입에 있던 백난영의 손을 잡자 그녀가 흠칫하면서 힘을 주었는데, 결코 빼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기아는 괜찮은 것 같으니 일단 손을 빼구려.”

정운룡의 말에 백난영이 정호기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슬픈 정호기의 눈을 보면서 천천히 손을 뺐다.

그녀의 손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핏줄이 터졌는지 피가 흥건히 흘러내렸기에 정운룡이 혈도를 눌러 지혈을 하고도 멈추지 않아 머리에 두르고 있던 영웅건으로 묶어야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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