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기실 그녀는 손에 검을 쥐고 있었고, 언제든지 신유강을 죽이고 자결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공이 없는 그녀가 발검술을 펼친다 하더라도 그 속도는 상당히 떨어질 테고, 다른 이들에게 막힐 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사마강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금제를 풀어 준다면 틀림없이 신유강을 향해 검을 뽑고, 이내 죽을 테지.’
그때 작은 정문이 열리며 조금 전 안으로 들어갔던 문지기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사마강과 신유강 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무슨 소리를 들었던 것인지, 처음 대면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양새다.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는 것이, 마치 손님 대접을 잘하지 못하여 크게 혼이라도 난 듯하다.
사마강은 피식 웃으며 바닥에 앉아 있는 신유강을 안아 들었다. 마치 잘못 건드리면 부서질 새라 사뭇 조심스러운 손길이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백리지연은 둘 사이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가 알기로 천마존은 혼인을 하지 않았기에 이제까지 자식이라 여기지 않았으나,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끼이익-!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문지기들이 정문을 열어 주었고, 어느새 사마강은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교의 교주라 하더라도 주가장의 힘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조금도 기죽은 기색이 없다.
“오호……. 밖에서 보던 것보다 더욱 넓군.”
끝도 없이 보이는 담벼락을 바라봤을 때에는 그저 무림맹 수준이라 생각을 했을 정도였는데, 안으로 들어와 본 풍경은 그야말로 마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수천, 아니, 만이 넘는 인원이 들어와 산다 해도 넉넉히 공간이 남을 정도다. 말 그대로 자그마한 황궁을 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신유강 또한 사마강과 같은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에 있는 그의 장원 또한 넓다 할 수 있었지만 이곳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어서 오세요. 저를 찾으셨다고요?”
“으음…….”
정문을 열고 들어가 얼마 걷지 않았는데, 그들의 눈앞에는 새하얀 궁장을 입은 여인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나름대로 미모에 자신이 있는 백리지연은 물론, 설령 이 자리에 진소소가 있다 한들 뺨을 후릴 정도로 완벽한 미모다.
눈이 돌아간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사마강이 신음을 흘릴 정도이니 그 미모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는가?
황급히 정신을 차린 사마강이 그녀에 대해 물으려는 그 순간, 보다 빠르게 신유강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그대가 의원이오?”
“은하련이라 합니다.”
“듣기로 그 이름을 가진 의원은 이백 년 전 인물이라 들었소만.”
신유강의 말에 은하련은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며 웃었다. 입가에 머금은 것은 실소(失笑), 그러나 눈빛과 표정은 부드럽기 짝이 없다.
“은하련이란 이름은 대대로 내려오는 겁니다.”
“……그렇군.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나를 고칠 수 있소?”
은하련은 신유강이 상당히 다급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처음 보는 상황, 객방으로 안내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절실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그 모습이 참으로 우스우면서도 재미가 있었기에, 은하련은 고소를 머금으며 천천히 신유강을 향해 다가섰다.
그녀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향긋한 냄새가 풍겨 왔다. 신유강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으나, 이내 신색을 가다듬었다.
“어디 보도록 하죠.”
사마강의 품에 안겨 있는 신유강에게 다가선 은하련은 조심스레 손을 움직여 그의 맥을 짚기 시작했다.
별다른 행위는 없었다. 단순히 평범한 의원들이 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무언가 눈치를 챘는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맥이 찢겨져 나갈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네요. 힘줄이야 다시 붙일 수 있다지만, 설령 고친다 하더라도 무공을 익힐 수 없습니다.”
“단전은 어떻소?”
“무공을 익힐 수 없다는 말은 단전이 무너졌다는 말과 같아요, 공자.”
은하련은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듯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신유강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 보지 않아도 알 정도였기에, 그녀는 다시 한 번 손을 뻗어, 둘둘 말고 있는 붕대를 풀어 헤쳤다.
“우욱!”
그리고 그 얼굴이 드러난 순간 백리지연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얼굴 가죽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아, 마치 생 근육을 쳐다보는 느낌이다.
시뻘건 근육과 칼자국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세상에 태어나 역겹게 죽어 나간 이들을 무수히 많이 보았다 생각했던 그녀였지만, 그의 몰골을 보는 순간 토악질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흐음, 정말로 심각하군요. 힘줄을 잇는 것은 금방이지만, 얼굴을 본래의 상태로 돌리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거에요.”
“……돌릴 수 있습니까?”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의 상응하는 영약과 내공이 있어야 해요.”
“그의 상응하는 영약이라……. 만년설삼 정도는 있어야 된다는 소리오?”
“호호, 재미있는 소리를 하네요.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에요. 음기가 강한 영약과 양기가 강한 영약. 이 두 가지가 있어야 하죠.”
“환골탈태를 시키는 것보다 어려운 소리로군.”
사마강이 어이없이 웃자 은하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분의 상태로는 환골탈태는 무리겠죠. 그래서 그 영약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환골탈태를 시키기 위해서 말이죠.”
신유강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년설삼이니 뭐니 하는 영약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니, 애초에 구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힘줄을 이어 놓는 것이라도 해 놔야 공자께서도 마음이 편하시지 않겠어요?”
은하련은 웃으며 사마강의 품에서 신유강을 안아 들었다. 기이하게도 미세하게 손을 떨고 있었는데, 그것을 확연하게 느끼고 있는 신유강만이 기이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 * *
“왔군.”
주유선은 기이한 표정으로 드높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량하기 그지없는 그것을 보고 있을 때마다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울컥 치밀어 오른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주씨 가문의 인물로 태어났다면 응당 거쳐야 할 문제. 물론 그 과정이 살짝 꼬이기는 했어도 매듭을 풀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본인이다.
“어쩔 심산이지?”
그때 돌연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짙은 안개를 가르고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은하련이 아닌 다른 누군가였으며, 붉은색의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세간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붉은 여우를 보는 듯하다.
“하련 언니의 표정이 말이 아니야.”
“하하, 그놈의 인생은 그놈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야. 다만 나는 조금 뒤를 밀어줄 뿐이지.”
“십 년, 십 년 동안 가르쳐 놓고도 아직도 뭔가 남아 있어?”
십 년이라는 말에 주유선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과거의 인연이라 하면 인연이고, 현재의 인연이라 하면 현재의 인연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니 언제라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러 버렸다.
그런 생각을 하던 주유선은 머리를 벅벅 긁적였다.
“아니, 그놈이…… 나를 닮지 못해서 무공에는 재능이 영 없더군.”
“어느 정도인데 그래?”
“십 년 동안 때리고 가르쳐도 머릿속에 반도 들어가지 않았다.”
주유선의 말에 여인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어이없는 말이다. 핏줄이 핏줄이니 천하의 다시 없을 기재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무재(無才)라니?
주가장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하지만 사천에 있는 녀석은 꽤 강해.”
“물론 잘 알지.”
“끼어들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이건 내가 벌인 판이 아닌, 놈과 놈이 벌인 판이다. 자기들의 인생에 타인이 끼어드는 것만큼 실례되는 일은 없겠지.”
“호호, 웃겨. 녀석에게 회귀신공을 전해 준 것은 주유선, 너잖아?”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여인의 말에 주유선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회귀신공은 천하의 다시없을 무공이다.
그리고 그 인연자를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주유선, 그였으며, 그가 선택한 것은 신유강이다. 물론 진소소라는 덤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변수이긴 했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것 또한 나름 재미있는 일이었다.
“다른 형제들보다 무능한 놈이니 그 정도 힘은 있어야 할 거라 판단했을 뿐이다. 물론 약간 오산이 있었다만…….”
주유선은 검미를 찌푸렸다.
오산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신유강의 멍청함이다.
“설마 그 정도로 머리가 떨어질 줄이야…….”
눈썹을 찌푸리며 골을 매만지는 주유선의 모습에 여인이 또다시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저런 모습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기에 나름 옛날 생각이 난 듯했다.
“하지만 네가 가르친 것은 회귀신공이 아니잖아.”
여인의 말에 주유선은 웃는다.
“아아, 하지만 완벽하게 아닌 건 아니지. 사천에 있는 놈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만…… 글쎄, 이곳에 있는 놈은 그걸 알아낼 수 있을까?”
“머리가 나쁘다며?”
들려오는 여인의 말에 주유선은 한껏 인상을 썼다.
第四章 암운(暗雲)과 환희(歡喜)
그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 다른 이들과 그 어떤 접점조차 가지지 않은 채, 장원과 객잔을 오가며 평범한 신유강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보이는 그의 행동 때문인지, 사람들이 신유강을 두려워하여 객잔의 손님들이 뜸하다.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퍼걱!
매섭게 뻗어 나간 주먹에 건장한 청년의 몸이 훌쩍 날아가 벽에 틀어박혔다. 어찌나 강하게 휘둘렀는지, 이빨이 우수수 부러져 나간 모습이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신유강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섬뜩한지 도망을 가고 싶어도 쉬이 발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다.
권무존의 이름을 얻은 신유강을 꺾고 이름을 알리기 위해 찾아온 그들이었으나, 단 몇 수만에 십여 명이나 되는 이들을 피떡으로 만드는 것을 보며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되었는가?”
감정조차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들리자 낭인들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그를 향해 검을 겨눌 만한 담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동료 대부분이 처참하게 당했다.
그중 몇몇은 이미 숨을 거뒀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무더기로 덤빈 것은 분명 그들의 잘못이기는 하나, 수준 낮은 이를 상대로 이리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으니,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권무존과는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다.
많은 사람들이 권무존에 대해 말하길, 강하긴 하나 약한 이에게 과하게 손을 쓰지 않는 대협이라 했기에 설령 당하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죽는 이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건 뭔가?
줄줄이 시체들이다.
열 명 중 넷의 숨통이 끊겼으며, 살아남은 여섯조차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모양새로 엎어져 있다. 아마 두 번 다시 무인 행세를 하고 다니지 못할 만큼 처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때문에 신유강의 명성을 얻으려 찾아왔던 다른 이들도 쉬이 나서지 못한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