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진소소가 어렴풋이 거리를 두고 있으나 그러한 것 따위 하등 상관없다. 이러나저러나 그녀에게 있어 신유강이란 존재는 자신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거리감을 두고 있긴 하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차 마음을 열 것이고, 다시 한 번 과거와 같은 인연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신유강에게 있어 진소소든 당소혜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이미 그는 한 차례 진소소를 직접 죽였으며, 아련함이 없다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애정이 있다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도망치지 않고,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이 평온함이 좋은 것이다.
“자리 있나요?”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신유강은 눈을 뜨며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약 사 년 후, 갈가리 찢여 죽였던 백리지연이 싱긋 웃으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평온함을 깨 버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가?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없다 하면 어쩔 것이고, 있다 하면 어쩔 것이오?”
“있다 하든 없다 하든 앉을 겁니다.”
“그렇군…….”
그의 말에 백리지연은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지난 한 달 동안 무림맹 내 분위기를 정리하기 위해 분주했던 그녀는, 신유강이 돌아왔다는 소식만을 들었지 얼굴을 보진 못했다.
약간 낯선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달라지지 않은 그의 성격과 표정 때문인지 백리지연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큰일이 있었는데도 신 공자는 태연하네요. ……하지만 정말 놀랍더군요. 아수라멸천장을 얻어맞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이.”
“내 몸뚱이는 그런 늙은이에게 부서질 만한 것이 아니오.”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한 마디.
그러나 오만방자한 말이다. 객잔 안에 있는 모든 무인들이 그것을 들었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말인즉, 천마존의 한 수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망을 쳐 놓고 잘도 그런 소리를 하네요.”
“훗, 도망이라…….”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물론 본인 역시 그럴 생각으로 움직였던 것이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그는 천마존에게 도망을 칠만큼 약한 존재가 결코 아니다.
“전략상 후퇴라고 말하오.”
“어머, 대단한 전략이네요.”
백리지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신유강의 눈치를 살폈다.
무언가 미묘하다.
말하는 투나 행동은 변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곧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혼례식 소식이 곧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느린 것 같네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소. 늦어도 내년 봄에는 치를 생각이오.”
백리지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보름을 잡고 치러질 예정이었던 혼례였기에,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늦어지는 기분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굳이 그 속내까지 파헤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한데, 검후가 이곳엔 무슨 용무시오?”
“따지고 보며 제가 사저가 아닌가요?”
싱글싱글 백리지연은 웃음을 지었다.
신유강은 이미 무황의 제자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때문에 검후와 신유강이 함께 있는 것이 그리 이상한 상황은 아닌 것이다.
“사저라…… 농담하오?”
착 가라앉은 눈빛을 본 순간, 백리지연은 심령이 빨려 들어가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숨이 턱턱 막히며 영혼마저 떨리는 듯하였고, 전신의 힘이 풀려 당장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내 이를 악물며 정신을 차렸다.
“너무하네요. 그게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요?”
가라앉은 눈빛으로 백리지연을 바라보며 그는 입가에 한껏 비웃음을 머금었다.
눈앞에 있는 그녀는 무황의 제자라는 말로 신유강을 팔아먹고 그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훗날, 회천공이 알려지면서 신유강이 공적으로 몰렸을 당시 다른 세가와 문파의 눈치 때문인지 제일 앞서서 신유강을 죽이려 했던 것도 바로 백리지연이다.
겉으로 웃고 화사하며 성격이 좋아 보이지만, 그 속내는 여타 다른 세가의 인물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러 왔다면 이만 돌아가시오. 더 이상 내 평온을 깨지 마시고.”
귀찮다는 듯 그는 휘휘 손을 저었다.
백리지연을 보고 있자면 계속해서 그녀의 악랄한 손속과 표정이 떠올라, 당장에 저 골통을 부수고 싶은 충동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어째 사람이 달라진 것 같네요. 그래도 예전에는 제대로 상대 정도는 해 주더니.”
백리지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단순한 투정에 불과한 한 마디였으나, 그 말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는 무엇 때문인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한 번만 더 그딴 개소리를 입에 담는다면, 네 골통을 부숴 버릴 테다, 년!”
작은 목소리, 그러나 무인이라면 충분히 들릴 법한 소리라서, 객잔에 있는 모든 무인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그곳을 바라봤다.
심상치 않은 공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중원 무림 제일이라 불리는 신유강, 그리고 칠제의 일인인 검후가 이 객잔에서 부딪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기가 얼어붙었다.
더욱이 객잔에 있는 이들 중 몇 명은 이미 무림맹에서 신유강과 검후의 힘을 보았으니만큼, 자칫하다간 이 객잔이 무너져 내리는 것 또한 이상하지 않다 생각하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을 정도다.
“그게…… 지금 저에게 할 말인가요?”
“못할 말이라 여기지 않소. 내가 나이기에 이곳에 있는 것이지 어찌 다른 사람이라 여긴단 말이오.”
단순한 한 마디에 욱한 나머지 조금 과하게 화를 냈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지하며 조심스레 말했으나, 냉랭한 분위기는 쉽사리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해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은 백리지연이 아닌 그다.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힐끗 그녀를 한 차례 바라보고는 주위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객잔을 나가 버렸다.
“후우…… 도대체가…….”
백리지연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고작 한 달 만에 이렇게 변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오늘 단순히 기분이 좋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 생각을 한다 하여도 조금 전 말투는 심하기 짝이 없다.
“큰일이네.”
정도무림이 무너지기 직전이니만큼,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신유강을 무림맹 안으로 끌어와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지금 보인 신유강의 태도를 본다면 그것이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백리지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토했다.
반면 객잔을 나선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숨을 골랐다.
굳이 화를 낼 필요가 없는 상황임이 분명한데 울컥한 것은, 마치 그가 현 시점의 신유강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에게 들킨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피식 웃는다.
그녀와 같이 생각하는 이는 적지 않다.
아마도 진소소는 물론 당소혜마저 느끼고 있을 것이다. 같은 모습, 같은 목소리, 같은 행동을 취해 본다 한들, 그녀들이 겪었던 신유강과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기분이 나쁘군.”
그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거리를 걸었다.
곳곳에서 익숙한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누구 하나 말을 거는 이들은 없다. 최근 들어 보이는 신유강의 행동에 사람들이 겁을 집어먹고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이것은 하나의 평온이다.
때문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으나, 왠지 모르게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아마도 착각이 아닐 것이다.
한참을 걷던 그가 돌연 와락 인상을 구기며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곳곳에서 수많은 시선들이 느껴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 시선에 적의가 없다.
“찾았소?”
인적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곳.
거지들조차 쉬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그곳에서 입을 열자, 스르륵 하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마존 사마강.
사마강은 미소조차 띄지 않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흔적을 보긴 했네만, 유강이는 없더군.”
“하하, 결국 못 찾았다는 소리로 들리오만.”
“맞네. 주위를 샅샅이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핏자국 조금을 발견했을 뿐이네.”
“……약속이 조금 다르지 않소? 나는 그를 잡아다가 평생 뇌옥에 집어넣으라 했소이다.”
싸늘한 그의 말투에 사마강은 웃는다.
이어 그의 눈에서 검붉은 마기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주위를 얼어붙게 만드는 기세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고작해야 오 할 정도의 내공이긴 하나, 어째서 사람들이 그를 천하제일인이라 부르는지 잘 알게 해 주는 광경이다.
쩌적!
사마강이 서 있던 자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쾅!
이어 사마강의 힘을 이기지 못한 담벼락과 돌덩이들이 그대로 부숴져 나가며, 파편이 맹렬한 기세로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퍼퍼퍼퍽!
그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맞으면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둔탁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나, 기이하게도 가만히 서 있는 그에게 어떠한 영향조차 미치지 못한다.
이윽고 그가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순간, 천마신공의 내력이 빠르게 사마강을 향해 되돌아가기 시작했고, 무너진 담벼락과 움푹 파인 바닥이 본래의 형태를 찾아갔다.
“내가 네놈의 수하로 보이더냐?”
“그런 약속이지 않았소? 나는 당신에게 회천공을 보여 주고, 당신은 힘없는 그놈을 잡아다 평생 가둔다는 것 말이오.”
그는 사마강의 기세조차 아랑곳하지 않았다.
손을 쓸 생각이라면 언제든지 오라는 듯, 도발적인 시선마저 보내고 있을 정도다.
사마강은 그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결국 승자의 말을 따라 주어야 하는 패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내 책임이 아니네. 절벽 밑은 물살이 거센 탓에 순식간에 하류까지 흘러간 모양이네. 인근을 샅샅이 뒤지기는 했지만, 발견한 것은 고작해야 옷 조각이 전부지.”
“흐음…… 그래서 어찌할 생각이오?”
“자네와의 약속을 했으니 조금 더 찾아는 보겠네. 그러나 보름, 보름 안에 그 녀석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후의 일은 자네가 알아서 해야 할 것이네.”
“하하, 그게 약속을 지키려는 사람의 태도요?”
“건방진 놈! 감히 누구에게 그따위로 입을 놀리는 것이냐?!”
사마강의 눈초리가 또다시 매섭게 변했다.
회귀신공에 대한 것을 어느 정도 인지했고 이미 한차례 손을 섞은 적이 있으니, 지난번처럼 쉬이 승기를 내주지 않으리라는 각오였다.
하지만 그는 사마강과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은 것인지 휘휘 손을 내저었다.
“되었소. 놈이 죽지만 않으면 그만인 것이니…… 보름이 지난 뒤에는 수하 몇 놈을 시켜 찾아보았으면 싶소. 죽으면 이쪽이 곤란해지니 말이오.”
“……그 정도는 받아들이도록 하지.”
마지못해 사마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만족한 웃음을 머금으며 등을 돌렸다. 조금 더 성질을 긁었다간, 이 자리에서 한판 해보자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돌연 사마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아이를 너무 무시하지 말게나.”
“하하, 내가 누구인지 잊으셨소?”
“……나는 자네와 그 아이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네.”
“해서?”
“반드시 네 녀석의 앞에 다시 나타나겠지. 그때까지 지금의 생활을 즐기도록 하게.”
“하하하, 충고 고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