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무황은 모르겠으나 석무자라 한다면 정파의 어른 중 어른이며, 영웅 중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이다. 때문에 진태협은 신유강을 죽이려 하는 것을 잠깐이나마 망설일 정도였다.
오랜만에 짧은 한숨을 내쉰 진태협은 검을 들었다.
“그럼, 선선운현무라는 것을 구경하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인 신유강이 일보(一步)를 내딛기 위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신유강을 향했다. 삼백 년 전의 절대고수인 석무자의 무공이 현현하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이다.
구름이 흐르기 시작하며 바람이 신유강을 뒤덮는다.
진태협은 그것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단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뿐인데, 전신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진 바 내공을 한껏 끌어 올려 언제라도 일격에 신유강을 베어 버릴 기세를 풍기고 있었지만, 사실상 이미 진태협은 기세를 잃어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름이…….”
“바람마저…….”
유유히 일보를 내딛는 신유강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입을 열었다. 구름이 움직이며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신유강과 하나라도 된 것처럼, 참으로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곳곳에서 마른침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무현은 더더욱 그러하다.
과거 자신이 당했던 그 한 수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 역력했다.
과거 그가 보았던 선선운현무보다 더욱 부드럽다.
보이는 구름이, 느껴지는 바람이 다르다.
부드러움 속에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이것은 명백히 사람을 죽이려 하는 살기(殺氣)가 섞여 있다는 증거.
“대단해.”
백리지연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칠제니 뭐니 하며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그녀가 보았던 선선운현무를 잊지 못하고 있다.
당시의 보았던 그것을 잊지 못하였기에 그녀는 더욱더 검에 매진하였고, 그로 인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눈앞에서 다시 한 번 펼쳐지고 있다.
명백한 살기(殺氣)를 담고 말이다.
“놈!”
진태협은 몰려드는 바람과 구름을 바라보며 검을 휘둘렀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완벽하게 그것들을 깨부술 심산이었다.
선천지기마저 끌어 올린 한 수다.
콰아앙-!
엄청난 폭음이 몰아치며 매서운 폭풍이 일었다.
연무장 전체에 균열이 갈 정도로 엄청난 힘이 몰아쳤고, 주위는 어마어마한 양의 흙먼지가 튀어 올라 일순 시야가 가려졌다.
사람들은 꿀꺽 침을 삼켰다.
고작 한 수이긴 하지만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촤아아악!
그리고 동시에 사방으로 피분수가 솟구쳤다.
그것이 누구의 피인지 이미 짐작한 백리지연과 청허, 그리고 무현조차 미간을 찌푸릴 정도로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곧 먼지가 가라앉고 서서히 시야가 트이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에서 헛구역질 소리가 들려왔다.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이자 하북진가의 좌호법이었던 진태협은 가슴에 여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머리는 산산히 부서져 찾아볼 수가 없었다.
머리를 잃어버린 몸뚱이만이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진태협이 서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을 뿐이다.
“꺄아아악!”
추란은 그 장면을 보며 괴성을 내질렀다.
너무나도 처참한 몰골에 살인 경험이 있는 이들 또한 고개를 돌릴 정도였으니, 오랫동안 강호 경험을 하지 않았던 추란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진태협은 추란에게 있어 현재 마지막 남은 패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이가 눈앞에서 처참히 살해당했으니, 정신이 흐트러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네, 네가 감히! 네가 감히! 하북진가의 좌호법을 죽이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울분에 받쳐 앞뒤 생각을 하지 못한 추란이 검을 빼어 들며 신유강을 위협했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검날은 당장이라도 목을 꿰뚫을 듯하였지만, 신유강의 표정은 무덤덤하기 짝이 없다.
전신을 피로 뒤집어쓴 그의 모습은 섬뜩하다.
시선을 마주하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였기에 추란은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진자명이 다급하게 그녀를 부축하자, 그제야 묵묵히 서 있었던 신유강이 입을 열었다.
“죽어 마땅한 이를 죽였소. 뭐가 문제요?”
“죽어 마땅하다니! 좌호법께서 어찌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냐!”
진자명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그에게 있어 좌호법은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다. 진명이라는 친아비가 있기는 하나, 부정(父情)을 받으며 자라지 못한 그에게 있어 진명보다 더한 존재였다.
그런 이가 눈앞에서 죽었으니 마음이 오죽할까.
진자명은 시뻘게진 눈빛으로 신유강을 바라봤다. 아득바득 이를 갈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두려운 마음에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십 년 전 일, 내가 모른다 생각하는가? 남해검문의 놈들을 이용해 그 어린 소소를 잡아다 모질게 학대를 하고 어딘가로 팔아 버리려 했던 것을?”
진자명은 흠칫 몸을 떨었다.
당시 그러한 일이 있기는 했으나,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기에 지금까지 생각도 나지 않았던 것이다.
진자명은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흘겼다.
다른 팔대세가의 인물들은 물론, 구파일방의 인물들 또한 경악에 겨운 시선으로 그들 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그걸 좌호법이 저질렀다는 말이냐!”
“……네놈과 네놈 어미, 그리고 네놈 형제와 죽은 놈이 저지른 짓이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네놈은 내 스승님을 모독하는가? 당시 소소를 구해 주었던 것 역시 내 스승님이다. 지금은 없는 사람이라 하여 발?할 생각이라면 그만둬라.”
신유강은 저벅저벅 연무장을 내려와 진자명 앞에 섰다. 그 눈빛과 기세 때문인지 누구도 말리러 들지 못하였고, 진자명과 추란은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어야만 했다.
그때 진명이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냐?”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기는 하였지만, 설마 정말로 추란이 벌인 일이라 여기고 싶지 않았기에 그로서도 충격은 상당하다.
그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추란과 진자명 등을 쏘아봤다.
십대고수라 불린다 하나, 기실 칠제에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은 정도의 수준에 오른 이다. 자연스레 퍼지는 그의 기운은 공기를 얼어붙게 하였으며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장악하는 듯했다.
덜덜덜-
진자명은 몸을 떨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아비의 기세에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두려움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이냐 물었느니라!”
쩌렁쩌렁 울리는 진명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악에 받쳐 있다.
단순히 진소소가 제 발로 집을 나섰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끔찍한 속사정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으면서도 부정했다.
“그, 그럴 리가 없지않습니까, 상공……. 설마하니 저 권룡의 입에서 나온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지요?”
추란은 덜덜 떨리는 시선으로 되물었다.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함께 살을 맞대며 살아왔다. 이제 갓 알기 시작한 신유강의 말을 믿는 것보다는, 자연스레 추란의 말을 믿어야 함이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진명은 대답하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불안해진 추란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 상공. 정말로 저자의 헛소리를 믿는 것은 아니지요? 예?”
간절히 자신을 믿어 달라는 추란의 눈빛에는 일말의 거짓조차 없는 듯하다.
그러나 진명은 질끈 눈을 감고는 숨을 골랐다.
지금까지 세가에서 추란이 저질렀던 일들을 떠올린다면, 진소소에게 그런 짓을 한다는 것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상공?!”
“아버님! 어찌 저자의 말은 믿고 우리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악에 받친 진자명이 소리를 쳤다.
형제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리나 소심하기 짝이 없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는 것에 거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눈을 뜬 진명의 눈은 무덤덤하다.
“자네는, 자네가 한 말을 증명할 수 있는가?”
시선을 돌려 다시 한 번 신유강을 바라봤다.
그럴 수도 있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다른 마음 또한 들었기 때문이다.
친모가 아니라 해도 어찌 딸 같은 자식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때문에 다시 한 번 신유강에게 그 진위를, 확실한 물증을 원하는 듯 말한 것이다.
하나 애초에 물증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당시 일을 맡았던 남해검문은 무너졌고, 진소소를 데리고 나갔던 이들 또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좌호법마저 죽었으니만큼, 지금 이 일을 알고 있는 이들은 고작해야 추란과 진자명, 그리고 그 형제들이 전부다.
추란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누가 뭐라 해도 과거의 일로 그녀가 묻힐 일은 결코 없다.
하나, 대답은 전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증명할 수 있어요, 진 가주. 당시 그 자리에 저 역시 있었으니 말이죠.”
검후의 입이 열리자 그 파장은 더욱 크게 퍼져 나갔다.
진명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추란과 진자명의 안색은 시퍼렇게 변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잊지 않으셨겠지요. 당시 하북에는 제 스승님인 무황께서 계신 것을…… 그리고 당연히 그 자리에 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았습니다. 남해검문의 패를 지닌 이들이 소소라는 아이를 납치해 끌고 가는 것을 말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장면을 다 본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녀가 도착했을 당시에는 이미 마중천의 손에 모든 이들이 죽어 있었으니, 그들이 남해검문의 무인이란 확증을 가질 수 없다.
검후라는 위치에 있으니만큼, 확신이 없는 말을 쉽게 내뱉을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당하게 추란과 진자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실이오?”
“천지신명께 맹세하도록 하지요.”
은근슬쩍 모든 상황을 덮어 버리고 남해검문의 짓이라는 점만을 강조했다. 그러나 천하의 검후가 하는 소리였으니 그 말을 믿지 않는 이가 없다.
웅성웅성.
곳곳에서 사람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팔대세가의 한 곳, 그리고 천하제일세가라 불리는 곳에서 엄청난 대사건이 터진 것이다. 더욱이 치부라 할 수 있는 그것을 모든 이들 앞에서 밝혔으니만큼, 추란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네놈들이…… 감히!”
쾅!
폭음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다.
그것과 동시에 곳곳에서 소란이 들려오더니 곧 사람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기 시작했다. 진명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당황하며 시선을 돌렸다.
“스, 습격이다!”
“마교, 마교의 습격입니다!”
땡땡땡-!
누군가 무관의 담장을 넘어 침입했다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며, 시끄러울 정도로 큰 소리의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의 안색이 굳어진다.
마교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뭣들 하는가! 어서 가서 저 간악한 마교의 무리들을 막아 내지 않고!”
무현이 소리를 내지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자, 청허와 백리지연마저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움직였다.
사천은 지금 정도무림의 중심지와 같은 곳, 이런 곳이 습격을 당해 피해가 막심하다면 정도무림의 기강이 헤이해질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