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다 네놈과 악연이 있는 놈들만 불렀다는 거지. 소림, 제갈세가, 하북팽가, 진주언가, 등 말이다. 아, 사천당가도 있기는 하지만, 그곳은 뭐 제외하고…….”
신유강은 머리를 긁적였다.
진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확실히 흑호의 입에서 나온 곳들은, 신유강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이며, 어찌 본다면 신유강을 노리고 있을지 모르는 자들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힘 있는 놈들은 다 초대받았다는 거다.”
“……내일이로군?”
“그래.”
“그런데 왜 지금 말하는 거지?”
“굳이 갈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리고 낌새도 영 좋지 않고 말이다.”
흑호는 당과를 씹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말을 모두 했으니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갈 필요가 없다면서 준 이유는?”
“결정은 네놈이 하라는 소리다. 이러나저러나 소소를 끼고 살려면 진가의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악녀 같은 계집이 저래 보여도, 속은 순진하기 짝이 없으니, 네가 진가를 무시하는 것을 본다면 말은 하지 않지만 화를 낼걸?”
지당한 말이다.
진소소는 이미 진가와 인연을 끊었다 말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만약 정말로 그들이 싫고 저주했다면 이십 년 전, 무황이었던 신유강에게 복수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을 테니까.
물론 너무 어렸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신유강은 그리 생각지 않는다.
“기억해 둬라. 소소에게는 이것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간다면 조심해야 할 거다. 천마비급 사건으로 다들 신경이 날카롭게 서 있는 상황에서 네 실수를 받아 줄 이는 아무도 없을 거다.”
그 말인즉, 자칫하다간 그곳에서 뼈를 묻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단순히 술 한잔하자고 부른 초대장에 불과하나, 이것이 바로 하북진가와 하북팽가가 손을 쓰기 시작했다는 말과 같기 때문에, 흑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신유강에게 경고했다.
* * *
진명이 머물고 있는 곳은 학관 내에서도 상당히 화려한 곳이다. 객을 묵게 하기 위해 만든 곳이 아닌, 무림맹 내에서 맹주나 부맹주 정도 되는 이들만 묵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곳인지라, 그 화려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화려함과는 다르게 주위는 조용하기 짝이 없다.
이번 천마비급 사건으로 수많은 후기지수들이 죽어 나간 탓인지, 학관은 조용하기 짝이 없다. 함께 수업을 듣던 이들 절반이 죽어 버렸으니만큼, 무림이라는 곳에 치를 떨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또한 맹주인 무현과 부맹주는 이번 일에 책임을 지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판국이다.
원했던 비급은 손에 넣지 못했다.
싸구려 잡서나 다름없는 그것을 얻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렀으니 응당 당연한 결과다.
진명은 그 모든 것을 생각하며 숨을 골랐다.
“권룡이라…….”
어찌 보면 참으로 보잘것없는 별호이긴 하지만, 현 중원에서 그만큼 인지도를 쌓고 있는 이는 아마 드믈 것이다.
더욱이 이번 천마비급 사건에서 유일하게 흡혈광마를 죽이면서 이름을 올렸으니, 그야말로 승승장구(乘勝長驅)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님, 혹시 아셨습니까?”
진명은 이미 죽어 사라진 아비를 떠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진소소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그 이유, 그것을 이제야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금의 소소는 아주 행복해 보입니다.”
물론 웃는 모습을 본 것이 아니니 뭐라 말할 수 없으나, 진명이 보기에는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하북진가의 있을 때보다 더욱 말이다.
그러나 왠지 모를 그늘이 지어져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권룡에 대한 소문을 모르지 않으니만큼 진명 또한 해 준 것 없는 아비이긴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사실이다.
주위에 수많은 여인들이 있다 했던가.
진명은 조소를 머금었다.
귀하디 귀한 자신의 딸을 데려다 놓고 감히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다니,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운염.”
“부르셨습니까.”
“세가에서 사람들은 도착하였느냐?”
하북으로 올라가던 도중, 천마비급에 대한 소문이 들리면서 결국 길을 돌려야 했던 진명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모두 보아야 한다.
현재 진소소는 물론이며, 그녀가 선택한 남자 또한.
그리고 달라져야 한다.
진명은 지금까지 하북진가라는 곳이 약육강식에만 매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이제는 달라져야 할 시기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설령 좋지 않은 쪽이라 해도 말이다.
“대부분 도착하셨습니다.”
“추란은 어찌 되었느냐?”
“내키시지 않은 표정이긴 하셨습니다만, 가주님의 명령을 거역하지는 않았습니다. 표면적으로 말입니다.”
“하하, 재미있는 말이로군.”
“…….”
“틀린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네 입에서 틀린 말이 나오지는 않지.”
운염은 오랫동안 진명을 섬긴 무인 중 한 명이다. 물론 진명의 그림자들 또한 있기는 하지만, 그들보다 가까운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자다.
더욱이 하북진가에서는 이미 우호법으로 이름을 날렸고, 천하백대고수에 들어 있으니만큼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이 또한 없다.
“자칫하다간 하북진가의 치부가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다른 세가들에게 말입니다.”
“신경 쓰지 않는다. 그놈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녀석이지.”
“권룡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건 아닌가 합니다.”
진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같은 백대고수에 들어 있는 이라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운염 딴에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일 터다.
“네가 나와 오십 합을 겨룰 수 있겠느냐?”
“…….”
운염은 누구보다 진명을 잘 알고 있는 이 중 한 명이다. 때문에 십대고수라는 이름을 얻고 있기는 하지만, 기실 이미 칠제에 다가선 고수라는 사실 또한 잘 안다.
그런 진명과 오십 합을 겨룬다?
상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
“그놈은 나와 오십 합을 겨뤄도 밀리지 않을 녀석이다. 많은 사람들이 백대고수라 말하지만 이미 칠제에 다가섰지.”
진명의 말에 운염은 대답 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평생토록 모시는 주군의 말에 반박을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허튼소리를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권룡 그 아이는, 얼마 있지 않아 천마존과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자가 될 것이다.”
진명은 두 눈을 빛냈다.
고작해야 짧은 만남.
몇 번의 부딪힘에 불과하지만 진명은 확실히 신유강이라는 존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더욱이 처음 만났을 때와 지난번 악산에서 보았을 때는 그 느낌마저 달랐다.
“하북진가는 날개를 달 것이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신유강은 무언가 기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기에, 섬뜩한 나머지 넓게 기감을 펼치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게 누구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 이 장원에 한 사람이 없으니만큼, 또한 지금 신유강의 기감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은 고작해야 사마강뿐일 테니까.
신유강은 영 꺼림칙한 모습이다.
천마비급에 대한 일을 물으러 와야 함이 마땅한 늙은이가 아직까지도 그 소식이 없으니 자연스레 불안감부터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곧 신색을 가다듬고 호흡을 한다.
지금은 다른 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님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 어디 가는 건가요?”
장원을 나서려는 신유강을 발견한 진소소가 붉어진 얼굴로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지난번 고백 이후, 혼인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얼굴을 보면 부끄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진소소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신유강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는 듯하다.
“잠깐 갔다 올 데가 있어. 저녁때까지는 돌아올 듯한데…….”
“중요한 일인가요?”
고개를 갸웃하며 진소소는 되물었다.
지금의 사천은 쥐죽은 듯 고요하기 짝이 없다. 천마비급 사건 탓에 희생을 당한 무인들이, 그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무림맹 인사들을 그리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색하지 않으나 속에 담긴 울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다.
애초에 그것이 천마비급이라 확신한 것이 무림맹이었고, 그 덕분에 악산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죽어 나갔는데 알고보니 삼류 잡서라는 말을 들었다.
물론 그것을 본 이들 중 몇몇은 믿기야 하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무림맹에서 천마비급을 가로챘다고 여기고 있는 판국이다.
물론 마교와 천무황성 또한 마찬가지다.
“위험한 일인가요? 알다시피…… 지금 사천은 그리 좋은 분위기가 아니에요.”
신유강 또한 잘 알고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퇴군했다고는 하지만 마교의 힘은 아직까지 숨어 움직이고 있다.
무관에 있을 것이라 짐작되는 비급을 손에 넣기 위함일 테고, 그것은 천무황성 또한 다르지 않다.
“아니, 그리 위험한 일은 아니야. 사정은 다녀와서 이야기해 주도록 하지.”
“알겠어요. 조심하도록 해요. 유강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한 사람이 다수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에요.”
“하하, 알았어.”
웃음을 짓는 신유강을 바라보며 진소소는 짧게 숨을 골랐다.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그의 앞에서 머뭇거리며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자, 이제 막 장원을 나서려던 신유강이 돌연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할 말이 있는 거 아닌가?”
“에? 아, 그게, 말이죠 유강…… 그, 지난번에는…….”
“그 이야기도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해. 이미 지나간 일이고, 소소 딴에는 나를 걱정하여 한 행동이었을 테니까.”
진소소는 지난번 신유강에게 칼을 들이밀려 했던 것을 사과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그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사람처럼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넘겨 버리자 결국 숨을 고르며 표정을 폈다.
“알았어요. 그럼 다녀오세요.”
진소소 딴에는 그 일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당장 바쁘다는 듯 등을 돌리는 신유강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배웅을 해야만 했다.
반면 신유강은 당시의 일을 더 이상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다. 좋지 않은 기억인 데다, 되풀이해 본다 한들 당장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은 할 일이 있다.
어느새 신유강은 장원을 빠져나가 무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섰다. 평소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야 할 길이긴 하나, 지금은 고요하기 짝이 없다.
악산에서 벌어진 일이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잘 알게 해 주는 모습이다.
신유강은 조용히 주위를 살피며 신음을 흘렸다.
아직까지 그의 품에는 천마도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그것이 새어 나갔다는 것이 영 꺼림칙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진소소의 말처럼, 마치 이번 일을 신유강이 벌여 놓은 듯한 느낌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간간이 보이는 무인들은 옹기종기 서로 모여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고 있었다.
대부분 이번 일에 대해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는 무현과 청허에 대한 이야기일 테지만 그들의 눈으로 보기엔 그저 천마비급을 손에 넣은 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기 위한 일종이 방책이라 여기고 있는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