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더욱이 유강이라며 서슴없이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나이가 많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낭군을 대하는 것 같지 않은가.
“물론 잘 알고 있죠. 아마도 검후님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어요.”
“헤에…… 자랑?”
“……그렇게 생각하세요.”
“호호호, 농담이야 농담. 하지만 나이 많은 사람을 낭군으로 삼으려 하다니 의외로 재주가 좋은걸?”
진소소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백리지연을 쏘아봤다. 마치 무황이라는 이름과 그 배경을 얻고 싶어 신유강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잘못 알고 계세요. 유강이 무황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리고 그의 배경과 힘 따위 관심이 없어요.”
“정말로?”
“물론이죠.”
확언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결코 그 어떤 흔들림조차 존재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바꿀 생각조차 없다는 듯 단호하기 짝이 없다.
백리지연은 그것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신유강이란 존재에겐 진소소라는 아이만이, 그리고 진소소라는 아이에겐 신유강만이 존재한다는 거다.
“후후, 정말이지 두 사람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끼어들 생각 없으니 열심히 해 보렴!”
백리지연은 두 주먹을 굳게 쥐며 응원해 주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때문인지 진소소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지만 이내 신색을 가다듬고 목소리를 다듬었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딱히 검후님과 유강이 무슨 사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요.”
“나 때문에 싸운 거 아니였어?”
백리지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신유강과 진소소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하지 않았던 백리지연은, 일부러 진소소가 있는 쪽으로 골라서 온 것이다.
물론 그것이 정답이었고, 만약 이곳에 그녀가 없었더라면 틀림없이 진소소는 힘겨운 사투를 벌이며 흡혈광마에 의해 더럽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맞나 보네 호호호.”
백리지연은 또다시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런 생각 없이 과거처럼 신유강에게 접근한 것이, 아마도 진소소에게 있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며 웃고 있던 백리지연은 웃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반 시진 전에 깨기는 하였으나, 사실 영단의 힘이 너무 강해 그것을 다스리느라 주위에 신경을 쓸 여력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우, 어쨌든 이 이야기는 여기서 접도록 하자꾸나. 먼저 흡혈광마라는 녀석부터 어떻게 해야지?”
“그,그거 말인데요.”
진소소는 표정을 굳히며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흡혈광마는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있었기는 했지만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 신유강이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설명하기 시작한다면 신유강의 능력 또한 이야기해야 한다.
때문에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이다.
백리지연은 곤란해 하는 그녀의 모습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파헤칠 생각이 없던 것인지,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무황의 여자쯤 되면 흡혈광마쯤 상대가 안 될 테지? 호호호, 잊고 있었네.”
진소소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어물쩍 이 상황을 넘어가려 하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것에 대해 매우 고맙게 생각하는지, 조금 전보다 많이 경계심 풀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여긴 어디지? 천마가 펼쳐 놓은 진법 속에 이런 장소가 있었던가?”
“아무래도 이곳이 그…… 비급을 숨겨 놓은 비동 같아 보이네요.”
누가 생각을 해도 그리 여길 것이다.
천마가 직접 깔아 놓은 진법이 있고, 그 안에 비동이 있으니만큼, 이곳에 비급이 있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주변 또한 상당히 넓다.
그녀들이 서 있는 곳에서 우측에는 기나간 동굴 안쪽으로 들어서는 길이 보였으며, 그것은 상당히 깊게 만들어져 있는 듯하다.
“그럼 움직여 볼까?”
백리지연은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떠한 영단을 먹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순식간에 몸이 나을 정도로 대단한 물건이다.
그러나 짐작은 한다.
무황은 석무자의 후예라 했으니 진소소가 가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선기단 말이다.
백리지연은 터벅터벅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조심스레 따라오는 진소소를 향해 말했다.
“이런 말 듣는 거 그리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네가 가지고 있던 그 영단.”
“아, 알아요.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호호, 그렇지? 선기단이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중원은 한바탕 뒤집어질 것이 분명해.”
진소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다른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일이다.
석무자의 선기단은 영단 중 영단이라 불린다. 불사의 영단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그 능력이 좋은 데다, 내공마저 늘려 주니 무림인들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물이다.
때문에 그녀는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정말 어둡네 여기…… 횃불이라도 만들어 왔으면 좋았을걸.”
“감각이 돌아오지 않으니 무서워 보이네요.”
“호호, 감각에만 의존한다면 좋은 무인이 될 수 없단다.”
백리지연의 말에 진소소는 고개를 저었다. 한때는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아 본 것은 아니다. 신유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에 무인이 되어, 하북진가의 콧대를 눌러 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무림이라는 것보다, 객잔을 운영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이 더욱 즐겁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저는 이대로가 좋아요.”
“천하제일세가의 여식이 할 말은 아닌거 같네. 후후.”
“무공이 고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그것이 제 인생이라 생각하니까요.”
진소소에게는 자신의 인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틀림없이 지금처럼 사는 것이다.
신유강과 함께 객잔을 꾸려 나가고, 가끔 말싸움도 하면서 평범한 인생을 즐기는 것 말이다.
“하지만 권룡의 옆에 있으면 그게 되지 않을 텐데? 그 사람 뭐니 뭐니 해도 적을 만들어 내는데 있어선 최강이 잖니. 호호호.”
너무나 지당한 말에 진소소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만큼 신유강이 걸어온 행보는 적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무현 사태 또한 조금 더 좋게 해결할 수도 있었겠지만, 신유강은 대 놓고 무림맹주에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만약 검후가 나서지 않았다면, 체면을 구긴 무림맹주가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 고치려고 노력 중이에요. 아마도.”
“아마도라…….”
백리지연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더욱 안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축축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습기가 차기 시작한 모양이다.
약 일각여 정도 안쪽으로 더 들어갔을 때에는, 참으로 화사한 광경이 눈앞에 드러났다. 작은 연못이 보였으며, 그 주변으로 야명주가 한가득했다.
뽑아다 팔면 아마도 성을 하나 살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라 할 수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쉽게 뽑히지 않을 것 같다.
그 주변에는 온갖 시체들이 널려 있었는데, 백골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전, 이곳에 침입했던 이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목이 잘린 이들은 물론이며, 가슴이 뭉개지거나 골이 부서진 이들 또한 적지 않다. 이곳에서 비급 쟁탈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 수 있게 만들었다.
백리지연과 진소소는 그 참상에 아미를 찌푸리며 더욱 샅샅이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곳 어딘가에 비급이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백 년은 된 것 같네.”
“낡은 옷과 쌓인 먼지의 양, 그리고 주변에 흔적을 볼 때, 이삼백 년은 되어 보이네요. 우연찮게 발견해서 싸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가지고 나갔다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어요.”
이곳에 들어온 모든 이들이 죽지 않았다면, 비급은 틀림없이 외부로 새어 나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말을 한 진소소는 물론이고, 상황을 살피고 있는 백리지연마저 그 가능성을 버렸다.
이 정도로 많은 이들이 죽었다.
비급을 가지고 나간 이가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 하더라도, 사람의 피 정도는 묻었을 테니, 나가는 길목 어딘가에 핏자국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주위는 깨끗하다.
그 말인즉 전멸이라는 말이다.
“……독을 풀었네요.”
병장기에 당해 죽은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들은 독에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먼저 죽은 이로 보이는 이의 손에는, 자그마한 무언가가 들려 있었는데 그것은 틀림없이 독무(毒霧)였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검상이나 다른 어떠한 것도 없는 이들이, 쓰러져 죽어 있었고 죽은 이들 주변으론 각혈을 한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이거 아니야?”
백리지연은 자그마한 연못 가운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소소가 다급하게 시선을 돌리자, 연못 중앙에 한 권의 책자가 덩그러니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물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닌, 단순히 연못 깊이 돌을 박아 놓고, 그 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백리지연은 후우-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손을 뻗기만 하면 천마의 비급 중 하나가 들어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마교와 천무황성에서 그녀를 쫓기 시작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다.
때문에 꺼려진다.
그렇다고 진소소에게 맡기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꺼, 꺼내 보도록 하죠.”
“으, 응.”
두 여인은 콩닥콩닥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며 연못을 향해 다가섰다. 상당히 깊은 곳인지 발이 닿지 않아 쉬이 들어가지 못하니만큼, 결국 연못 바깥에서 손을 뻗어야 할 판국이다.
백리지연은 힘겹게 몸을 움직여 그것을 쥐었다. 끙끙 거리는 신음 소리를 내며 회수하려는 그 순간, 몸이 크게 휘청이며 당장에 연못으로 빠질 것만 같은 모양새다.
“언니!”
다급하게 소리를 지른 진소소가 휘청이는 백리지연을 간신히 붙잡자, 곧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비급을 손에 쥔 백리지연이 주저앉았다.
“후우, 빠졌으면 체면 구기고 죽었을 거야. 나 수영 못하거든…….”
“아하하.”
진소소가 어색하게 웃음을 짓자, 백리지연은 비급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의 두 손을 잡으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니까 소소는 내 생명의 은인인거네. 그리고,언니라…… 푸훗, 얼마만에 들어 보는 말이지? 이후부턴 계속 그렇게 불러 줬으면 좋겠는데?”
“그, 그건.”
천하의 검후에게 함부로 그런 소리를 입에 담을 자신이 없었던 것인지 진소소는 쭈뼛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백리지연은 계속해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손을 놓지 않고 있자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 좋아요, 언니.”
“그래 동생! 자, 그럼 어서 비급을 확인해 보도록 할까?”
확인을 할 필요도 없이 완벽한 천마비급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칠제인 그녀의 이목을 완벽히 감추고, 그 감각마저 앗아 가는 절진이 깔려 있는 데다, 주변 상황을 본다면 천마비급이 확실하다.
두 여인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비급을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