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자신보다 신유강의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이곳에 놓고 간다면…….’
천하의 검후라 하더라도, 이 정도 화마를 내공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뒤집어쓴다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숯검뎅이가 될 것이다.
그럼 두 번 다시 그녀와 신유강이 함께 있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될 것이고, 괜스레 마음 아파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진소소는 피식 웃음을 짓고 일어섰다.
힘겹게 백리지연을 부축하며 화마 속을 걷는다. 전신이 타오를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그래도 지금은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하다.
그때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 있다.
“저곳은……?”
폭발하기 전에는 없었던 틈새가 보인 것은 그 순간이다.
흡혈광마, 호야는 타오르는 화마를 바라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것은, 이미 죽음이라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인지 모른다.
“하하, 도망을 쳤나?”
안타깝기 짝이 없다.
백리지연의 실력이 두려워 가진 바 벽력탄을 모조리 날려 버린 것이 실수다. 보아하니 상당한 중상을 입기는 한 것 같지만 도망갈 시간을 벌어 주었기 때문이다.
“쯧.”
호야는 혀를 차며 시체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살아 있을 것 같은 이가 있다면, 여지없이 그 머리통을 밟아 터트리기는 주저하지 않는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곳은 천마가 펼쳐 놓은 절진 안이다. 한 번 들어오면 쉽게 나갈 수 없음은 물론이며, 감각과 기감마저 빼앗아 간다.
백리지연이 호야의 기척을 찾아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호야는 불길을 뚫고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뜨거운 화마에 몸이 녹아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 심지어 옷이 타올라 살갗이 익어가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의 눈빛은 그저 진소소가 어디로 갔는지 찾고 있을 뿐이다.
“분명히 이곳이었을 텐데 말이지.”
품 안에서 주섬주섬 작은 독침을 꺼냈다.
사천당가의 인물들을 죽였을 때 얻은 것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극독이 발라져 있는 물건이다. 그것을 손에 들고 천천히 걸으며 호야는, 한참 동안 찾아도 진소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인상을 찌푸렸다.
“권룡에게 그년의 머리를 선물해야 할 텐데.”
보이지 않으니 벌써부터 짜증이 치솟아 오른다.
지나가다 발에 걸리는 시체가 있다면 지그시 밟아 분풀이를 하며 계속해서 시선을 돌렸다. 정식으로 붙는다면 진소소의 상대가 되지 않는 그로선, 지금이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멀리가지는 못했을 거다…….”
그것은 틀림없다.
백리지연이 진소소를 감싸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몰려드는 충격을 전부 감수할 만큼 약한 벽력탄이 아니다.
틀림없이 진소소 또한 중상을 입었다.
호야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흡혈마공의 힘을 끌어 올리니, 두 손이 붉게 변하며 눈빛 또한 괴기스레 변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기습에 대항하려는 심산이다.
“응?”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여인의 몸이라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틈새다. 물론 남자들은 조금 힘들겠지만, 호야 정도의 나이라면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는다.
“하하하! 그곳에 있었구나!”
틈새 주변으로 찢어진 치맛자락이 보였다. 색으로 보아 진소소가 입고 있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호야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그 틈새를 향해 빠르게 독침을 날렸다.
그러나 반응이 없다.
아무래도 안에는 공간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군.”
이곳은 천마가 깔아 놓은 절진. 지금까지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던 비동의 입구가 바로 저곳이라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셈이다.
“일거양득이라는 것이로군.”
호야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작은 틈새 사이로 몸을 움직였다. 누군가에게 기습을 당한다면 틀림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나, 그의 행동은 거칠 것이 없다.
물론 그 대비책으로 손에는 독침이 한가득이었다.
* * *
진소소는 숨을 죽였다.
기습을 위해 대비하고 있었던 그녀는 돌연 날아드는 독침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내고 재빨리 백리지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숨을 죽였다.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든 지금 이 상황, 더욱이 수준 높은 무인이면 무인일수록 감각에 기대는 것이 많은데, 지금 이곳에선 그러한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흡혈광마에게 더없이 좋은 조건인 셈이다.
애초에 흡혈광마는 불과 몇 달 전 만해도 무공조차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니만큼,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에 더욱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후우, 후우.”
“으윽.”
“쉿, 조용히 계세요.”
진소소는 신음을 흘리는 백리지연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한 손에는 검을 들고 있었지만, 설령 걸린다 한들 반격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사모님, 어디 계시나요?”
밉살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퍽퍽! 소리가 들려왔는데, 다름 아닌 조금 전 틈새를 향해 던졌던 독침이 분명하다. 아마도 어둠에 익숙지 않으니,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보인다면 경계부터 하는 것이겠지.
진소소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온갖 기이한 생각이 다 든다. 지금 이곳에서 백리지연을 버린다면, 홀몸이 된 그녀는 틀림없이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중상을 입은 백리지연은 짐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러나 소소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 자리에서 흡혈광마를 죽여야 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폭발에 휘말리면서 몸이 크게 흔들렸다.
아직까지도 정신이 멍하며, 힘이 들어가지 않는 데다 시야가 흐릿하여 눈앞에 있는 자그마한 돌덩이조차 두세 개로 보일 지경이다.
진소소는 질끈 눈을 감았다.
왜 하필 이런 상황이 되었던가.
이런 곳에서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만 든다. 신유강을 보살펴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혹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신유강은 미쳐 날뛸 것이 불 보듯 뻔하다.
해 줘야 할 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털어놔야 할 불만이 하늘만큼 있다. 하고 싶은 일도 가득하고, 그와 함께 중원 유람도 하고 싶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렇게 됐단 말인가.
진소소는 흘러내려는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 내며 검을 더욱 굳게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하! 여기 있었구나!”
태연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들려오며, 커다란 동굴에 흡혈광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은 소리이긴 하지만 어찌나 귀를 울리는지 진소소는 눈을 부릅떴고, 곧 그의 손이 매섭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호야는 거칠게 진소소의 멱살을 쥐고는 잡아당겨, 그대로 박치기를 했다.
퍽!
“악!”
“하하! 재미있는 소리로 우시네요, 사모님. 우리 문주님은 죽을 때 더 분한 소리를 냈는데.”
“…….”
호야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다시 한 번 멱살을 잡아끌며, 진소소의 머리를 들이박았다.
퍽퍽!
그러나 이번엔 그 어떤 신음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그 때문에 흥미가 식은 것인지 호야가 시큰둥한 투로 입을 열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조금 더 울어 보세요. 아아- 천하에 둘도 없는 우리 낭군님 나 좀 살려 주세요, 하고. 하하하.”
“퉤!”
과장스럽기 짝이 없는 몸놀림으로 말하는 호야가 역겨웠던지, 진소소는 거칠게 침을 뱉으며 앙칼지게 쏘아봤다.
호야는 얼굴에 묻은 침을 닦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히죽 웃음을 짓고는 더욱 진소소의 멱살을 잡아끌어, 그녀의 곱디 고운 얼굴에 그것을 부비기 시작했다.
“하하, 이런 건 통하지 않아요. 잊으셨나? 난 이런 거 많이 당했거든.”
느껴지는 역겨운 호야의 살결에 진소소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아무리 강인하고 총명한 무인이라고는 하지만 여인으로서 드는 수치심은 어쩔 수 없다.
“그럼 오랜만에 만난 인사 겸, 우리 문주님을 대신해 사모님을 안아 드리도록 하죠. 하하하!”
호야는 거칠게 진소소는 땅으로 내팽개쳤다.
그 힘이 어찌나 강했던지 진소소의 신형이 힘없이 널브러졌고, 아주 자연스럽게 호야의 몸이 그 위를 덮는다.
“반항조차 하지 않는 겁니까? 재미없게.”
진소소는 얌전하다.
그러나 혀를 깨물고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입가에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호야의 손이 거칠게 그녀의 입을 열고 그것을 막았다.
그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는 말했다.
“편히 죽겠다는 생각은 버려. 네놈 네년들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변했으니까.”
호야는 거칠게 다른 손을 뻗어 진소소의 옷깃을 잡아채는 그 순간, 진소소는 질끈 눈을 감았다. 동시에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게 그 손가락을 물었다.
탁!
그러나 입이 다물어진다.
이빨과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갑작스런 상황에 진소소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
보이지 않는다.
호야의 모습이 말이다.
* * *
흡혈광마 호야는 지금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소소를 밑에 깔고 있었고, 언제라도 그녀를 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돌연 주위가 뒤바뀌며 언젠가 한 번 보았던 산속임을 인지했다.
그리고 보이는 것에 경악스레 눈을 치켜떴다.
수십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것 때문이 아니다, 우두커니 서 있는 저 모습은 틀림없이 가장 만나기 싫었던 인간이기 때문이다.
피 칠갑을 하고 있는 그는 한 차례 호야를 바라보더니, 왼손에 쥐어진 옷깃에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무덤덤하기 짝이 없다.
“만나고 싶었다.”
“이, 이게…….”
“네놈이 서 있던 곳…… 그곳으로 끌고 왔지. 그런데 그 옷깃은 누구 것이지?”
신유강이 한 걸음을 걷자 호야가 두 걸음 물러섰다. 심장이 거칠게 뛰고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왼손에 쥐고 있는 옷깃을 황급히 버리고, 줄행랑을 치려 했지만 움직이는 그 순간, 어느새 또다시 신유강이 보였다.
신법?
그딴 게 아니다.
마치 본래 있던 장소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묻지. 네놈이 가지고 있던 옷깃, 누구의 것이지?”
“으하, 하하하…… 마, 말해 줄 리가 없잖아. 이 개 자식아!”
호야는 발악을 하며 소리치더니 품 안에 있던 독침을 뿌렸다. 암기술 따위 배운 적이 없는 그의 손에서 날아간 것치고는 매섭기 그지없으나, 그래 봐야 당소혜보다 못한 수준이다.
“뭐……?”
신유강은 암기들을 뚫고 걸어왔다.
맞았어야 할 그것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눈을 부릅뜨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멍해 있는 그 순간, 어느새 자신이 뿌린 암기들이 도로 돌아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네, 네놈, 대, 대체 뭘 익히고 있는 거야…….”
탁탁탁-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여지없이 들리며 두려움에 몸부림쳤다.
무섭다.
너무 무섭다.
인간이 어찌 저러한 신기가 가능하단 말인가.
저게 정말로 인간이란 말인가!
“이, 이, 괴물…… 자식이!”
퍽!
그때 어느새 다가온 신유강의 주먹이 호야의 얼굴을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