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신유강은 쯧쯧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천마도해가 나타난 연유를 알고 있는 그로선 허튼짓에 목숨을 거는 이들의 행동이 우스운 것이다.
사천 악산에 있는 천마비동을 가리키는 천마도해.
그것은 본래 신유강의 손에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유강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이십 년 전 되찾아 온 천마도해임이 분명하였기에, 지금 이 상황은 참으로 기이하기 짝이 없다.
같은 천마도해가 두 장이나 되었던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같은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그저 그러려니 하며 넘어간다.
천마도해 하나 때문에 진소소와 사이가 뒤틀렸다.
아직까지 아무런 말도 없지만, 그녀의 시선은 명백히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긴 이십 년 전 일을 이야기했다고는 하지만 천마도해에 대한 것은 말하지 않았으니, 아직 그 일에 대한 오해가 풀리지 않은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신유강은 굳이 풀려 하지 않는다.
남자의 자존심 때문이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요?”
그때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백리지연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 신유강이 홀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뒤따라온 것이다.
이 상황을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틀림없이 입을 쩍 벌린 일이었지만, 신유강과 백리지연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다.
“너도 나를 믿지 못하나?”
“풉, 우리가 알고 지낸 게 얼마나 되었다고 제가 사부를 믿겠어요?”
사부라 이르긴 하나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안다. 그녀는 그저 예전의 추억에 빠져 있는 것뿐이었고, 지금 역시 장난스레 입을 연 것뿐이다.
신유강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그런데 누군가 나를 믿지 못한다는 건 참으로 힘든 일이로군.”
씁쓸한 미소가 절로 흘러나온다.
이십 년 전 이야기를 한 것은 이번 일에 대한 오해를 풀고자 함이 맞다.
물론 진소소를 속이고 있었다는 것 또한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기도 하였으나, 결정적인 것은 조금이나마 누그러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진소소는 여전히 신유강과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지금 또한 그녀는 다른 곳이 아닌 하북진가의 막사에 있었다.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것도 상당히 말이다.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요? 천하의 무황, 거칠 것 없는 남자, 세상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 같은 철면피?”
“칭찬으로 들어야 되나?”
“칭찬이에요.”
백리지연은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깔깔 웃었다.
딱히 연정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설령 과거에 있었다 해도 그것이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될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하다.
“진 소저 때문에 그런가요? 하북진가의 막사로 가서? 혹시 둘이 싸웠어요?”
“비슷하지.”
싸웠다기보다 신유강이 보기에 결국 터져야 할 것이 터졌다는 느낌이다.
진소소는 총명한 여인이다.
회귀신공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는 신유강. 그리고 그것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저도 모르게 드는 불안감에 거리를 두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에 대해 할 말은 없다.
신유강 본인 또한 누군가 이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것이 가까이 있는 이라 한다면 인간이 아닌 괴물로 보일 것이 분명하니까.
“자, 기분 풀어요.”
백리지연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며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는 신유강의 표정을 바라봤다. 그것이 어찌나 가여워 보였던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에 들려 있던 한 병의 술을 건넸다.
“뭐지?”
“소홍주.”
신유강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 * *
진소소는 하북진가 막사 안에서 조용히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 세가의 가주이자, 하북의 절대자.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무감각한 표정.
그 옆으론 삐딱한 표정의 진자명이 서 있다.
다른 한 쪽으로 하북팽가의 가주 팽자웅과 그 뒤를 이을 장남 팽호언이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빛내는 것이 보였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다.
“하하, 아까도 보았지만 정말 천하절색이로군. 호언이 네가 아주 봉을 잡았구나.”
팽자웅은 꽤 기분이 좋은지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시절 집을 나갔다는 말을 들었던 탓에 더 이상 하북진가와 맺을 수 있는 인연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때마침 좋은 시기에 나타났으니 경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로써 팽가는 사실상 하북진가의 배경을 얻게 되는 셈이고, 어쩌면 천하제일세가의 이름을 얻을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하, 진 소저, 그곳에 서 있지 말고 이곳에 앉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팽호언 역시 기분이 좋은지 한껏 웃음을 치며 자리를 권했다. 자연스레 옆자리를 권하며 혼약자임을 과시하려는 심산으로 보였지만, 팽가 쪽을 제외한 진가 쪽 인물들은 그것을 그리 좋게 보지만은 않는다.
물론 진자명은 오히려 팽가와 연을 맺기 바란다.
그래야 진소소를 완벽히 지워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진소소와 권룡 신유강의 사이를 알고 있는 진가 사람들은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다.
뛰어나다고는 하나 고작 무림맹 내에서 무사 짓이나 하며 이렇다 할 별호조차 얻지 못한 팽호언과 권룡 신유강의 차이는 정말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누가 더 진가에 이익이 되는가?
말해 무엇하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딱 부러지는 말투에 팽자웅과 팽호언의 안색이 굳어졌다. 지금 저 말은 팽가와의 인연을 부정하겠다는 식으로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장래 혼인을 할 사람의 옆자리에 앉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말로 들리는데, 맞는가?”
위협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팽자웅의 말투는 날카로웠다. 진득하게 기세를 뿜어낼 정도였으니,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아마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소소는 태연하다.
“이미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호오, 그건 권룡에 대한 이야기인가?”
“…….”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맞는 모양이군. 하나, 그 권룡이라는 자 말일세……. 사천당가의 여식은 물론이고 검후 백리지연과도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소문이 들리던데…… 그런 자와 혼례를 치르겠다는 말인가?”
“소혜의 일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검후님을 모독하는 말은 삼가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팽자웅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천하 명문세가, 그것도 제일세가라 불리는 하북진가의 여식이, 고작해야 점소이 짓이나 하던 인간과 장래를 약속했다는 이유 하나로 벌써 그 첩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으흠…… 그렇군. 한데 검후는 어디 갔는가?”
팽자웅은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 시선을 돌리며, 팽가의 인물을 한 명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제갈가후다.
“검후는 조금 전 어디론가 사라졌네. 권룡과 함께 말일세.”
“이 야밤에 말인가? 하하하.”
제갈가후는 진명의 눈치를 살피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으나, 팽자웅은 뭐가 그리 기쁜지 한껏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며 진소소가 앙칼지게 입술을 깨물었다.
第四章 권룡기세(拳龍氣勢)
신유강은 천천히 숲길을 걸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뒤로는 백리지연은 물론 진소소와 도우겸, 그리고 청랑 등이 뒤를 따른다.
멀리서 낭인들과 팔대세가, 구파일방의 인물들이 쫓아오고 있었으나, 그것은 아마도 권룡의 이름 때문이 아닌, 검후의 이름 때문일 것이다.
“가는 곳곳마다 사방팔방이 적이로군.”
신유강은 아미를 찌푸렸다.
무림맹 막사에서 나와 흡혈광마를 찾기 시작한 지 벌써 몇 시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나, 보이는 것은 죄 천무황성의 인물들과 사도련의 무인들이다.
마교측은 아직까지 조용하기 짝이 없으나, 한번 움직인다면 천무황성이나 사도련보다 더욱 큰 피해를 줄 것이 뻔하다.
가장 두려운 대상은 바로 마교다.
“죽은 흔적들로 보아 틀림없이 이곳 어딘가로 향한 것 같은데…….”
지금까지 신유강은 흡혈광마가 나타났던 장소를 돌아다니며 그의 흔적을 쫓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애초에 천마비급이니 무림맹이니 그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지 않은 것이다.
“어린 녀석이 영악하다 들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한 것 같군요.”
백리지연은 아미를 찌푸렸다. 무림에 대한 경험도 지식도 일천하기 짝이 없는 어린아이가 갑작스레 힘을 얻었으면, 충분히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난리를 피워도 이상하지 않다.
한데 전혀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쥐죽은 듯 움직여 내공을 취하고는 쥐죽은 듯 사라진다.
조금씩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허탕을 치기 일쑤. 그럴 때마다 이게 정녕 갓 열 살이 넘은 어린아이의 짓인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또 두 갈래네요.”
진소소 또한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흔적을 쫓아 움직이니 또다시 갈림길이 나온다. 한쪽은 산 정상을 향해 움직이는 길이며, 다른 한쪽은 산을 내려가는 길이다.
“발자국이 많은 쪽은 내려가는 길이로군.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던가?”
“무림의 공적, 더욱이 천무황성은 사도련, 마교에게까지 찍혔으니 쫓긴다 한들 그리 이상할 것도 없잖아요.”
백리지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녀의 말마따라 정사 상관없이 그 내공을 취하고 있는 덕분에, 이미 전 무림 공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몰려 있는 것이 바로 흡혈광마다.
자연스레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 또한 있는 일이라는 소리다.
“흩어져야겠군.”
“도 소협과 청랑, 그리고 제가 이쪽 길로 가도록 하죠.”
진소소는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바라봤다. 흔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가장 의심스럽다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지금까지의 일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위로 올라갔을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이다.
때문에 신유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소소는 이쪽 길을 확인해 주었으면 하는군. 물론 다른 이들도 말이다.”
“……혼자 올라가겠다, 그런 말인가요?”
“이 정도 흔적이라면 적은 상당히 많겠지. 설령 허탕이라 하더라도 말이야.”
“당신의 생각이 그렇다면 따라 주도록 하죠.”
진소소는 툭하고 말하며 냉랭한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기운이 흐르자, 도우겸과 청랑이 어색한 몸짓으로 힘겹게 뒤를 따른다.
며칠 전부터 둘 사이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리도 오래갈지는 몰랐다는 듯, 청랑은 내심 한숨을 토해 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럼 저는 어쩔까요?”
백리지연이 싱글싱글 웃음을 지으며 슬쩍 신유강이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그 순간 앞서 가던 진소소가 힐끗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약이라도 올리는 듯 백리지연은 여전히 웃고 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것이 어떠신가요?”
“물론, 그럴 생각이란다. 하지만 천하의 권룡보다는 너희를 따라는 편이 더 좋겠지?”